EP.33 루체 (1)
학사는 대련 평가가 끝난 뒤 학생들에게 입장을 표명했다.
그들은 빈번한 마족 출현의 원인을 파악하는 중이며,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의 안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리큘럼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학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며 진실을 밝히라고 시위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소수에 불과했다.
‘물론 상식적으로 납득 가는 상황은 아니지.’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가 수차례 나타났고, 실제로 학생이나 교수가 죽을 뻔했는데도 아카데미가 돌아간다니.
아무리 마족이 자연재해쯤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들, 말이 안 되잖아.
실상은 이사장과 교장, 학사 인력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밤낮으로 구르는 중이다. 웬만큼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그 사실을 모르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1학년 1학기 마지막 파트, 뇌신조 토벌전이 끝날 때면 일이 커져도 너무 커져 버려서, 결국 황실 기사단이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되려 하찮은 황녀, 신성력(물리)을 다루는 헬창 성녀, 동방의 소시오패스 무녀 등 이른바 ‘황금의 세대’를 한 곳에 불러 모으게 되는 계기가 된다. 황녀는 원래부터 입학할 계획이었고, 성녀와 무녀는 이 세계의 어둠에 맞서겠다는 정의감이나 호승심 따위로 오는 것이다.
잘 모르겠지만, 신분이나 태생이 특별한 녀석들은 사고방식이 특이한 경향이 있나 보다. 내가 멀쩡히 살아남는다면 그녀들, 황금의 세대는 내 후배가 되겠지.
‘그건 나중 일이고….’
중요한 건 시나리오가 크게 뒤틀린 지금이었다.
대련 평가 때 6막 3장의 최종 보스, 허상의 리파가 나타나 버렸다. 그놈은 입이 가벼운 탓에 페르난도 교수가 눈치채게끔 중요한 정보를 흘린 모양이었다.
바로 ‘내통자’의 존재.
나 같은 평민 찌끄레기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당연히 학사 주요 인력들을 [심리 간파]로 살펴본 덕분에 알았다. ‘마족에게 내통자가 있다는 생각에 앞날을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자세하게 뜨더라.
이렇게 되면 IF 시나리오를 대비해야 한다. 앨리스가 흑막이라는 사실이 본래 시나리오보다 빨리 드러나는 경우를.
참고로 도로시의 [천라만상]으로는 앨리스가 흑막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없다. 앨리스에게는 [붉은 여왕의 역설]이란 고유 특성이 있어서 그렇다.
결론적인 얘기만 하자면, 앨리스의 심리나 본질은 그 누구도 읽어낼 수 없다.
‘아무튼, 앨리스의 정체가 예상보다 빨리 드러나는 경우도 대비해야 할….’
「암석 붕괴 (바위 속성, ★4)」
쿠우우우우우웅───!!
“으악!!”
으아아악!!
개아파!!
“저, 적당히 3성급 이하로 쓰라 했잖아…!”
황색으로 빛나는 바위덩이가 내 육신을 덮치더니, 서로 부딪치며 마나 폭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에 내 몸은 잔디밭을 거칠게 뒹굴다가 나무에 거세게 부딪혀 버렸다.
와, 깜짝 놀랐네….
나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나를 냅다 날려 버린 존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작은 골렘이었다.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몸체는 몹시 단단해 보였다.
내 3성급 바위 속성 사역마, ‘이든’이었다.
[꾸웅─?]
고개 갸웃거리면서 귀여운 척하지 말라고. 안 어울리니까.
[ 이든 ]
Lv : 48
종족 : 마수
속성 : 바위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어 합니다. 뀨. ]
이틀 전, <메르헨의 마법 기사> 「3막 2장, 사역마」파트에 진입해 사역마를 소환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끼리 돌아가면서 사역마 소환진으로 소환하는 방식이었다.
대련 평가 때처럼 예상 밖의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무사히 끝났다.
사역마 소환진으로 소환 가능한 건 최대 4성급까지. 5성급 이상부터는 직접 만나서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이든 같은 3성급이면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녀석과 계약을 맺었다.
주인공, 이안 페어리테일은 본래 스토리대로 ‘렉스’라는 불 속성 사역마를 소환했다. 무려 4성급. 새끼 티라노 사우루스처럼 생긴 녀석이다. 사역마 파트 스토리대로라면, 이안과 렉스는 조만간 주종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대결을 펼칠 것이다.
그 결과, 렉스는 기절 전문가 주인공의 오른팔이 되겠지. 이번엔 마족이 상대가 아니니까 이기긴 할 거다.
‘그건 그거고.’
나는 내 사역마한테나 집중해야지.
타격을 받은 복부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위 고통쯤은 얼마든지…는 아니고 세네 번까진 버틸 수 있어.
이든에겐 명령 불복종의 페널티인 고통이 찾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명령 불복종의 판단 기준은 사역마의 인식. 자신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든은 자기가 내 명령을 잘 따랐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즉, 자기가 방금 쓴 마법이 4성급인 줄 모를 정도로 지능이 낮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뭐, 이건 잘 설명해서 가르치면 될 일이고.
“확실히 생각보다 덜 다치긴 하네.”
나는 이든과 함께 ‘원소 팔찌’를 시험하는 중이었다.
허상의 리파를 처치하면서 얻어낸 뜻밖의 수확이었다.
원소 팔찌가 있으면 특정 원소 저항력이 ‘40’만큼 올라간다. 일정 수준까지의 원소 마법은 내게 대미지를 줄 수 없게 된다.
효과 지속 시간은 24시간. 팔찌 효과 발동 후 24시간이 지나면 높여놨던 원소 저항력은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그때는 한 번 더 효과를 쓰면 된다.
현재 저항할 속성은 바위 속성으로 설정해 둔 상태였다. 팔찌에 달려 있는 고리를, 팔찌에 새겨져 있는 특정 원소 문양쪽으로 옮기면 간단하게 설정 완료다.
실험 결과, 효과는 생각보다 끝내줬다. 일단 강도 높은 마법에 당하지 않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밀려나는 것도 훨씬 덜했다.
4성급 마법을 맞아도 그냥 아프고 끝이었잖아. 아, 물론 더럽게 아팠지만. 원소 팔찌 없었으면 기절했겠지.
만약 대련 평가 때 내가 원소 팔찌를 끼고 있었다면?
트리스탄 험프레이가 [돌개바람]을 일으켰을 때, 나는 날아가지 않고 녀석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든! 3성급으로! 명심해, 3성급! 네가 방금 쓴 건 4성급이니까 더 이상 쓰면 안 돼!”
[알았따!]
이든은 오른팔을 번쩍 올리며 대답했다.
이든의 목소리는 중성 쪽에 가까웠다.
귀여운 척은 영 안 어울리지만, 내 사역마라 그런가. 가슴속에서 애정이 샘솟는 것 같….
「바위합장 (바위 속성, ★4)」
쿠두두두두두두두두───!!
“으악!!”
[꾸웅?]
이 돌대가리가!
* * *
메르헨 아카데미 부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꼽으라면 단연 ‘헤겔 마탑’이다. 다만, 아카데미 부지에 점유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 아카데미와 상관없는 일종의 사기업이라 봐도 무방했다.
헤겔 마탑에는 메르헨 아카데미 출신의 마법사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아카데미 부지 일부를 점유하는 조건으로, 메르헨 아카데미 졸업생이 입탑 테스트를 치르면 가산점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탑 자체의 입지도 상위권이니, 메르헨 아카데미 학생들의 진로로 자주 거론되곤 하는 곳이다.
그곳 꼭대기 층은 통째로 오로지 한 마법사를 위한 연구실로서만 쓰이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을 연 자들만 입장할 수 있는 그곳에,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가 들어섰다.
원형으로 이루어진 넓은 방. 허공에는 많은 책들이 둥실둥실 떠다녔고, 벽면에는 온통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곳곳엔 연금술의 흔적이 가득했으며, 높은 천장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어 청아한 하늘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연구실 한가운데서, 적갈색 머리칼의 한 여자 마법사가 바닥에 편하게 엎드려 있었다. 작은 신장, 왜소한 체격을 가진 그녀는 다리를 휘저으며 덤덤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페르난도의 스승 격 인물이자 헤겔 마탑의 마탑주, 아리아 릴리아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무감정한 얼굴로 페르난도를 훑어보더니, 다시 읽고 있던 책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
“여쭤볼 게 있습니다.”
“예의로라도 근황 같은 건 안 물어보고 바로 본론? 역시 내 제자, 버릇 상실.”
아리아 릴리아스는 단문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물어볼 건?”
“최근 아카데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마족과 검은 괴물에 관해서.”
“한번 씨부려 보길.”
“대련 평가 첫날, 저는 마족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제자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이 아리아의 눈길을 돌렸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헤겔 마탑은 메르헨 아카데미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아카데미 관련 소식은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가 없었으니.
“하지만 검은 괴물이 절 지켜줬습니다. 그는 무려 9성급 마법까지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십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그의 정체를.”
“…….”
검은 괴물.
마법학부 1학년 반 배정 평가 때 처음으로 나타나, 갑자기 출몰한 마족을 처치하고.
이번 대련 평가 땐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 강력한 마족을 압도하며 페르난도 교수를 지켜주었다.
“…학사는 어떻게 생각?”
“마족에게 반기를 든 마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네 생각은?”
“…….”
“너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본다만, 그 괴물은 아마도 네 제자.”
이미 페르난도도 짐작하고 있었던 사항이기에, 그는 반문하지 않았다.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그 괴물은 너희를 지키려고 한다는 것.”
페르난도의 모습이 아리아의 깊은 눈동자에 내비쳤다.
“내가 할 충고는, 그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 괜히 너희를 지키려는 사람의 비밀 파헤쳐 심기 건드리지 말고, 그저 마족이 출몰하는 원인을 분석해 해결하라는 것.”
“까닭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야.”
“……!”
눈 깜짝할 새에 아리아의 얼굴이 페르난도 코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염동 마법으로 자신의 몸체를 띄운 채였다.
얼굴이 맞닿을 법한 지근거리에서 무감정한 얼굴로, 그녀는 냉소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모르겠니? 그는, 나도 못 알아챈 이 아카데미의 특이점을 관측하고 찾아온 것. 그는, 이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 주려고 찾아온 것. 그런 그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 것.”
“…….”
알고 있었다. 그 검은 괴물은 아카데미 편에 서서 사람들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걸.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페르난도는 그 괴물이 적이 아님을 토로 했다. 수많은 토론이 오간 끝에 내려진 결론은 ‘검은 괴물은 마족을 배신한 마족일 가능성이 높다’ 따위였다. 안 그러면 마족이 언제 어디서 출현할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교수진 대부분은 그 괴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달랐다. 그는 그 괴물 아니, 그 학생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 학생이 자신을 지켜줬듯이.
“물론입니다, 선생님.”
페르난도는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한 때였다.
마법학부 1학년 수석, 루체 엘타니아는 오랜만에 훈련장에 가서 번개 마법을 연습하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의 관심이 모조리 그녀에게 쏠렸던 탓에, 부담스러워서 30분 만에 나와 버렸다.
나갈 때마저도 학생들이 ‘역시 수석! 저 정도만 연습하면 된다는 건가…!’ 따위의 감탄사들을 늘어놓았기에 부담감은 화룡정점을 찍었다.
“아, 진짜? 완전 웃겨!”
“히히히.”
문득 길을 지나고 있던 여학생들이 루체의 눈에 비쳤다. 그녀들은 즐거운 얼굴로 얘기를 나누면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잘 가, 내일 보자!”
“내일 봐!”
여학생들은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
평범한 광경이었다. 함께 밥 먹고, 함께 떠들고, 마지막엔 다음의 만남을 당연하다는 듯이 기약하는 것.
언제나 봐 왔던, 관심조차 생기지 않았던 다른 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오늘따라 그 광경은 루체의 가슴속을 어수선하게 했다.
돌연 한 남자가 떠올랐다. 루체의 발걸음이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기숙사로 곧장 가지 않고 빙 돌아서 가는 길. 그녀가 이른 곳은 나비 정원 구석의 인근이었다.
‘흠흠, 그냥 지나가는 길이야, 지나가는 길….’
이 길로 쭉 가도 기숙사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돌아가는 길은 맞았다. 기존 루트보다 5배 넘는 시간이 소요될 뿐이지.
인적이 드문 나비 정원 끝자락 길. 풀벌레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있다.’
루체는 시선을 사방으로 돌리며 좌우경계를 펼치다가 아주아주 우연히 정원 구석에 있는 아이작을 발견했다. 정말로 우연이었다.
대련 평가 첫날, 아이작은 트리스탄 험프레이의 마법 앞에서 끝내 굴복했다. 두 사람의 극명한 마력 차이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느꼈을 것이다.
그 벽을 느끼고서 아이작은 얼마나 낙담했을까.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해서 더욱 안타깝게 보였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러나 좌절감도 그를 꺾진 못했다. 이후 대련 평가 때 그는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였다.
‘기뻤어.’
그 모습을 보고 루체는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대련 평가를 머릿속으로 톺아보다 보니 문득 이번 마족 출현 사건이 떠올랐다.
‘그릉….’
그릉. 그가 나타났다. 그는 페르난도 교수를 지켜주고는 또다시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한다. 마나 감지에 집중했으면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는데. 못내 아쉬웠다.
그 괴인을 떠올릴 때마다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불편한 감정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호의’ 쪽에 가까웠다.
최근 들어 루체는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 감정이 바로 ‘친해지고 싶다’는 감정….
때문에 한동안 관련 서적들을 뒤져가면서 ‘친구’라는 개념에 대해 많이 고찰했다. 하지만 그럴 수록 친구란 게 무엇인지 더욱 어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 명확하지 않은 개념을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 당연하다는 듯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요새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고 있는 반곱슬 은발의 남학생이 바로 그 사람…인데.
‘지금 저거 뭐하는 거야?’
루체는 당황했다. 왠지 아이작이… 자기 사역마한테 마법으로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데?
아이작의 상태는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억지로 뜨고 있는 눈, 힘겹게 몰아쉬고 있는 숨.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상태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때였다. 돌연 루체 옆에 물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마나는 작은 범고래의 형태가 되더니, 몸에 물 마나를 옅게 씌운 채 허공을 바다처럼 유영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비상사태! 비상사태! 사역마가 주인을 줘패고 있는 상황 포착!]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순수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다.
작은 범고래 마수, ‘벨로’. 사역마 소환 시간 때 루체의 부름에 응한 4성급 사역마였다.
[벨로 긴급 출동! 폭력 반대! 폭력 반대!]
“돌아…, 어?”
루체가 ‘돌아가’라고 하면서 아이작을 향해 날아가려던 벨로를 역소환하려던 때였다.
갑자기 아이작은 눈이 핑그르르 돌아가고, 몸이 옆으로 고꾸라지며.
털썩─.
잔디밭에 나자빠지곤 정신을 잃어 버렸다.
“……!”
루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벨로를 역소환하지 않고 기절한 아이작을 향해 황급히 달려들었다.
[사건 발생! 사건 발생! 주인 줘팬 죄로 체포다, 짜샤!]
[꾸, 꾸웅…?!]
시끄러운 사역마들을 제치고, 루체는 기절한 아이작의 상체를 안아 들었다.
* * *
가끔 신림동 3평짜리 원룸의 풍경이 꿈속에 나오곤 한다.
안 그래도 좁은 방은 절반이 두꺼운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책상에 책을 세 권씩 펼쳐두고, 좁디좁은 세상에 나를 가두었다. 평범한 고시생의 모습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걸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
이 터널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간혹 그런 생각에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을 때면, 나는 내 허벅지를 사정 없이 두들겼다. 안 그러면 좁았던 내 세상이 더욱 좁아져,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고통은 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셈이었다.
‘근데 나 왜 그때를 회상하고 있냐.’
…기억났다. 원소 팔찌를 다방면에서 실험하려고 이든의 마법을 계속 받아 내고 있었지. 그 고통이 고시 생활을 떠올리게 했어.
그렇게 대미지가 축적되고, 그간 누적되었던 피로까지 한꺼번에 터지면서 그만 기절해 버렸던 모양이다.
그럼 나는 정원 구석에 그대로 쓰러져 있는 건가?
아니, 몸이 따뜻하고 포근한데. 이 감촉은 분명….
‘침대?’
나는 번뜩 눈을 떴다. 웬 침대냐?
그러자 낯익으면서도 낯선 천장이 내 눈에 비쳤다. 데자뷰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낯익은 천장이면서, 아이작인 내게는 낯선 천장인 것이다.
“뭐야?”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한눈에 봐도 호화로운 방안의 풍경. 내가 누워 있는 침대마저도 쓸데없이 넓었다. 흔히 부자들 침대 상상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크기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봤던 최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샤를관의 내부 풍경이 맞았다. 게다가 화장대나 인테리어를 보니 여성의 방인 듯했다.
어? 잠깐만.
‘여자 방?’
모든 기숙사는 남자, 여자 기숙사로 나뉘어 있다. 당연히 이성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엄금사항이다.
그런 금단의 영역에 내가 지금 왜 있는 거야?
곧 이마에 붙어 있던 축축한 수건이 떨어졌다. 곱게 접혀 있는 수건이었다.
‘나 간병 받고 있었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가 날 샤를관에 데려온 거야? 카야? 카야인가?
그때였다.
[피해자가 일어났다! 피해자가 일어났다!]
작은 범고래 마수 하나가 허공을 바다처럼 유영하며 내 앞으로 날아왔다.
생각해 보니 기절하기 직전에 이 사역마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역마의 주인이 누군지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질리도록 봐 왔기에 알고 있었다.
“깼어?”
“……!”
달빛처럼 고우면서도 잔잔한 음색이 귓가를 유혹하는 듯했다.
눈을 침대 머리맡 쪽으로 돌리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내 눈에 비쳤다.
양옆으로 몰포나비 색감의 머리 끈을 장식한, 단아한 미모의 공식 히로인 중 한 명.
그녀는 푸른 대양을 담은 듯한 눈동자로 나를 훑고 있었다.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1학년 수석, 루체 엘타니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