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35화 (35/334)

EP.35 루체 (3)

무척 상쾌한 아침이었다.

은둔의 가르지아를 처치했던 날 이후로 이렇게 푹 잔 건 오랜만이었다.

열은 금세 내려앉았다. 루체가 치유 마법을 걸어줬던 영향이 컸던 모양이었다.

나는 몸이 가벼워서 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로 열등생 기숙사, 도리스관을 나섰다.

도리스관은 다른 기숙사들에 비해 내부 시설이 낙후된 곳이라 해도, 주위에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나 코린트식 기둥과 디자인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취를 느끼게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숙사 대문으로 향했다. 문득 대문을 나서는 남학생들의 묘한 낌새가 엿보였다. 나처럼 등교하고 있는 도리스관 소속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대문 바깥쪽 구석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뭐가 있길래 다들 얼굴 붉히고 있냐.’

도로시 하트노바면 인정. 그렇게 장난식으로 생각하며 대문을 나섰다.

나도 남학생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잠깐, 눈이 부셨다. 잘 생기거나 예쁜 연예인을 보면 후광이 비친다고 하던가.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한 여학생이 가방을 양손으로 든 채 다소곳이 서 있었다. 머리 양옆에 몰포나비 색감의 머리끈을 장식한 로즈골드색 긴 생머리. 귀티 나는 귀족 아가씨의 전형적인 모범상. 내리쬐는 밝은 햇볕은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그녀의 푸른 대양을 담은 듯한 눈동자가 나를 향한 순간, 나는 헛숨을 삼켜 버렸다.

“안녕, 아이작.”

루체 엘타니아. 그녀였다.

나를 향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오른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그녀.

지나가던 남학생들의 시선이 이번엔 내 쪽을 향했다.

…엿 됐다.

“오늘 날씨 좋다, 그치?”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은 식상한 멘트를 꺼내는 루체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최대한 사려야 하는 처지인데, 뜬금없이 광역 어그로를 시전한 꼴이 돼 버리다니. 방심했다.

“표정 왜 그래? 날씨 안 좋아?”

내 마음의 날씨가 안 좋다, 이 녀석아….

……

내가 카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명료했다.

아직 나는 D 클래스의 평민.

카야 같은 A 클래스의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 귀인이 나 같은 사람이랑 같이 밥을 먹거나,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인다면 당연히 학생들 눈에 띄어 버린다. 이는 1학년 학생들의 입소문 거리로 아주 적절하다.

그리고 그런 입소문은 앨리스 캐럴의 귀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단순히 앨리스가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엿듣게 되는 경우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학생회장 일로 바쁜 데다가, 학생식당에 가는 일도 없고, 휴식도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취하니까.

내가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동기 중에 있는 앨리스의 부하였다. 그 부하는 학생회에서 포섭한 예비 학생회 멤버이자, 자기가 알게 된 1학년 학생들의 동향을 앨리스에게 낱낱이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비단 학생회만 그런 게 아니다. 메르헨 아카데미에는 학생회 외에도 ‘4성좌(星座)’라고 불리는 학생 세력이 있다.

우리나라 정치 체계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학생회가 된 4성좌는 여당, 나머지 4성좌는 야당 혹은 그 외의 정당인 느낌이다. 물론 세부적인 부분은 다르지만.

4성좌에도 미리 포섭한 1학년 예비 멤버들이 있다. 그 1학년생들 또한 정보들을 수집해 자기 세력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일종의 스파이인 셈이다.

그들이 그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학생에 대한 정보 수집. 둘째, 그 외의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법한 후보 선정.

그들의 목적은 자기 세력 중에서 학생회장을 배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아카데미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니.

앨리스는 그 명분을 이용해 방해꾼, 바로 나를 찾고 있는 중일 터다.

아마 내가 대련 평가 때 5성급 마법을 사용했다는 정보도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대단한 녀석들이 차고 넘치는 지라 아마 그 정보는 묻혔겠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밥 같이 먹자, 아이작.”

마법학부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돌연 루체가 다가오더니 내 맞은편 자리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전부 놀란 얼굴. 누구는 입에서 오렌지 주스를 줄줄 흘리고 있을 정도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루체 엘타니아가 아이작이랑 밥을…?”

“말도 안 돼….”

“수석이 웃는 거 처음 봤어.”

“나도….”

“저거 대체 무슨 조합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가끔 에이미나 마테오 패거리와 밥을 먹을 땐 이렇게 관심을 받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루체는 명문 메르헨 아카데미의 마법학부 1학년 수석. 수많은 학생의 선망의 대상이다.

하물며 언제나 무뚝뚝하기로 유명했던 그녀이니.

내게만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극적인 분위기 반전은 결국 학생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연예인이랑 밥 먹는 기분이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은 이때 쓰는 걸까. 진짜 딱 그런 기분이었다.

“수업 잘 들었어?”

또 식상한 멘트를 날리며 싱긋 미소를 흘리는 루체.

“나 할 거 떠올랐다. 먼저 가 볼게.”

“아앗…!”

나는 다급히 식판을 들고 일어나 잰걸음으로 달아났다.

루체가 가지 말라는 듯 나를 향해 팔을 뻗었는데, 차마 반응해 줄 수가 없었다.

……

오르핀관, D 클래스 강의실.

학생들은 일제히 내 쪽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제 자기 사역마 렉스와 싸웠는지 뺨에 반창고를 붙인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옆에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수석 한 명이 앉아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짱을 책상에 올리고 뺨을 기댄 모습. 본래 자리의 주인은 뒤에 서서 말도 못 걸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루체, 곧 수업 시작인데 안 돌아가냐…?”

“수업 시작할 때 갈게.”

여기는 D 클래스 강의실. 루체는 최상위권 학생 5명만 들어갈 수 있는 A 클래스 소속. 심지어 그중 수석이다.

그런 그녀가 이 강의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는 지극히 무거워진다.

“수석이랑 아이작 무슨 사이야?”

“딱 그 느낌이잖아. 좋아하는 사람 옆에 붙어 있고 싶어 하는….”

“수석이?”

“이게 나라냐?”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진짜로…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단 한 번, 내가 그릉이란 걸 안 들켰다는 사실에 안도해서 저지른 선택이 이런 뼈아픈 결과를 초래했단 말인가.

“루체, 너 눈에 많이 띄니까 이러지 말라고 내가 그랬잖아….”

“그래도, 너랑 더 붙어있고 싶어서….”

나지막이 얘기했는데, 귀 좋은 녀석들이 내 말을 알아 쳐들었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었어? 아이작 녀석이 수석을 다그쳤어…!”

“오히려 수석이 애원한다고?”

“말세냐?”

여기선 뭔 말을 못 꺼내겠다.

때마침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부터 수업을 시작하겠…, 흠?”

교탁 앞에 서서 말을 꺼내려고 했던 페르난도 교수는 나와 루체 쪽을 보고는 멈칫했다.

“넌 A 클래스의 루체 엘타니아인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

고오오오─.

루체의 눈길이 페르난도 교수 쪽으로 돌아갔다. 마치 살벌한 경고와도 같은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묵직하게 흐른 마나의 기운을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느꼈을 것이다. 모두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심리 간파]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오금이 저릴 만큼 오싹했는 걸….

루체는 타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면 이런 식으로 반사적인 경계 태세를 취하고 만다. 설령 상대가 교수라고 해도.

마법학부 1학년 수행평가나 시험 성적을 매기는 역할인 페르난도 교수라면 그런 루체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을 터다. 그래선지 그는 눈만 살짝 좁혔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 갈게. 이따 보자, 아이작.”

그런 태도라서 너한테 친구가 없는 거다, 이 바보야.

물론 나는 그 말을 꺼내지 않고 손만 흔들어 주면서 그녀를 떠나보냈다. 무서우니까.

루체가 앉아 있었던 자리의 주인은 드디어 자기 자리를 되찾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나한테 뭐라고 따지려는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날 건드리는 게 곧 루체를 건드리는 일이라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이후.

페르난도 교수는 흠흠, 하고 헛기침하고서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수행평가를 공지하겠다.”

학기말 평가 전 마지막 수행평가구나.

“너희들의 마도공예 실력을 평가할 예정이다. 저번 수업 때 얘기했듯, 마도공예는 마력 운용력 단련법으로 아주 높은 효율을 자랑하지.”

마도공예란, 마력으로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공예라지만 물품으로서의 효용성이 아닌 ‘찰나의 미(美)’를 추구하는 예술이라 보면 된다. 디자인에 따라서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며, 공연 같은 곳에서 주로 쓰인다.

그리고 원소 마나를 원하는 형태로 조형하는 데에는 마력 효율과 컨트롤 능력이 크게 개입된다. 그 두 가지 능력을 합쳐서 마력 운용력이라고 한다.

참고로 마력 효율이 높아지면 마법 한 번 쓰는데 들이는 마력 소모량이 줄어들고.

마력 컨트롤 능력이 높아지면 마법의 형태를 의지대로 조형하는 걸 더욱 정교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샤를관에서 도망쳐 나올 때 만들었던 형편없는 얼음 사다리 같은 걸 훨씬 보기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외에도 마법 시전 속도가 빨라진다는 장점도 있다. 내 경우엔 [빙결 폭발] 발동에 걸리는 준비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터다.

‘게임에선 그냥 대화문으로 지나가는 거였는데, 여기선 생으로 하네.’

뭐, 다 단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거지.

“주제는 ‘원소 꽃’. 레벨은 얼음이나 바위 속성 체질이면 3단계, 그 외의 나머지 속성 체질이면 2단계 중에서 출제하겠다.”

당연한 이야기다.

얼음이나 바위 속성은 원소 꽃을 한 번 만들어내면 더 볼 것도 없이 조각 끝이지만.

불이나 물, 번개, 바람 따위의 속성이면 원소 꽃의 형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해서 한 차원 높은 마력 운용력이 요구된다.

“예시문은 교재를 참고하도록. 원소 꽃은 2명이서 서로를 도와주며 연습하는 편이 효과적일 거다. 수행평가는 3일 뒤, 이 시간에 하겠다. 철저히 연습하도록. 이상. 수업 시작하겠다.”

어느 학생이 “교수님,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죠?!” 라고 묻자, 페르난도 교수는 “그럼 혼자 알아서 해라.” 라는 냉혹한 답변을 내놓았다.

나는 아직 마력 운용력이 미숙한 편이다. 이 기회에 3일간 마력 운용력을 집중적으로 기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

“수업 끝났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루체가 기다렸다는 듯이 강의실 출입구에서 나를 맞이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으나, 심호흡하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내가 알기로 루체는 이번에 친구를 처음 사귄 것이다. 항상 타인에게 마음을 닫은 채 살아와서 심리적 거리감을 잴 줄 모르기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치근대는 것이다. 그녀의 상식 결여도 한몫하고 있고.

‘진짜 어떡하냐.’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루체는 친구 자체를 사귀지 않는다. 그나마 아웃사이더 벗어나는 것도 주인공과의 로맨스 덕분이었지.

그래서 루체와의 친구 생활은 내 게임 지식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전술했듯, 나는 당연히 에이미나 마테오 패거리와 같은 부담 없는 친분 관계가 될 거라 여겼는데. 실책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나는 루체와 함께 하교해 버렸고.

아카데미 부지를 걷는 동안 마법학부 학생들의 시선을 독차지해야만 했다.

선망과 부러움, 의구심이 담겨 있는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몇 번이나 얘기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루체는 무려 마법학부 1학년 수석이자, 학부 내에서 미모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식 히로인. 그런 그녀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미소를 나에게만 보여 주며, 나만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으니.

이 자식들아. 내 마음은 타들어가고 있다고….

평범한 상황이었으면 우쭐댔을 것 같은데, 내 처지를 생각하니 그저 막막한 기분만 들고 만다.

‘이거 어쩐다.’

루체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껌딱지처럼 내게 붙어 다니는 상황이 반복되는 건 곤란했다.

“루체, 나 갈 데가 있어서….”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루체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네가 단련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조금, 나 오늘 많이 즐거워서….”

아오, 감성 자극하지 마라. 가슴 먹먹해지니까.

일단 루체의 반응을 보건대, 지금 바로 그녀와 헤어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겠다.

친구랑 더 놀고 싶다는 감정이 그녀를 부추길 테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녀가 자기 감정 따라서 주인공을 납치, 감금하는 게 엑스트라 배드 엔딩 N.13이지 않는가.

긴급 미션이다. 루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딱 지금의 내 친구들 수준만큼만.

그렇다면, 오늘은 루체의 바람대로 함께 시간을 보내주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겠다.

마침 딱 좋은 명분이 있었다. 나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고, 나와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루체의 마음에도 쏙 들 만한 일이었다.

“나 지금부터 원소 꽃 공예 연습하러 갈 거거든. A 클래스도 수행평가 내용 같지?”

“응, 도와줄까?”

먼저 나온 대답이 ‘같이 할래?’도 아니고 ‘도와줄까?’라니. 루체에게 원소 꽃 공예 따윈 누워서 떡 먹기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루체 같은 마력 컨트롤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 도와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

“그럼 고맙지.”

루체의 만면에 온화한 미소가 흘렀다.

나와 루체는 오르핀관으로 돌아와 빈 강의실을 찾았다.

간이용 작은 강의실 문이 열려 있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하나를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외투는 벗어서 옆 호두나무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채였다.

저녁. 노을빛이 창문을 뚫고 강의실에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발광 램프가 필요한 시각은 아니었다.

“일단 원소 꽃은 레벨 3단계 중에서 출제한다고 했지? 너는 물 속성이니까 2단계 중에서 나올 거고.”

“아이작, 할 줄 알아?”

“2단계까지는 그럭저럭 할 수 있는데, 3단계부턴 좀 벅찬 느낌이 있지.”

나는 교재를 꺼내고 마도공예 파트를 펼쳐 원소 꽃 3단계 예시를 살폈다.

수국 모형 그림이 있었는데, 딱 봐도 조오오올라 어려워 보였다.

“일단 몸풀기부터 해볼까.”

나는 셔츠 소매를 걷어낸 뒤, 책상 위에서 양손으로 마나를 흘려보내 얼음 공예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음 생성 (얼음 속성, ★1)」

일단 만들기 쉬운 아기 하마와 대포 모형부터 만들어 봤다.

“이거 뭐야? 귀엽게 생겼다.”

“아기 하마. 누구든 건들면 엿 돼.”

“그런 게 있구나…. 그럼 이건? 처음 보는데.”

“네오 암스트롱 싸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포다.”

“뭔진 모르겠지만 완성도가 높아 보여.”

좋아, 할 수 있겠군.

다음으로 1단계, 꽃잎이 몇 개 없는 간단한 형태의 원소 꽃과 살짝 더 어려운 2단계 원소 꽃까지 무난하게 만들어냈다. 루체는 ‘오오’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조용히 손뼉을 쳤다.

“좋았어.”

의기양양해진 나는 이어서 3단계, 얼음 수국에 도전했다.

“나도 해볼게.”

루체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리에서 물 마나를 흘려보내 원소 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 생성 (물 속성, ★1)」

꽃잎 하나하나의 디자인을 신경 쓰려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마력을 세세하게 운용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끝내 완성된 건 그냥 군데군데 구멍 뚫려 있는 화강암처럼 생긴 얼음덩이였다. 3단계는 무리였나….

반면에 루체 쪽에 생겨난 건 무척이나 정교하고도 깔끔한 형태의 수국 모형이었다. 물 원소는 몹시 빠르고 복잡한 수류를 뽐내며 수국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 꽃 안에서만 새로운 물리법칙이라도 정립된 것처럼.

“…….”

“…….”

최상의 결과물과 최악의 결과물을 앞에 두고, 나와 루체는 침묵을 지켰다.

“제, 제법이네.”

먼저 침묵을 깨뜨린 건 내 칭찬이었다. 진짜 감탄스러울 정도의 완성도네….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잘하는 루체의 도움을 받는다면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마도공예 실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도와줄게, 아이작.”

“부탁한…, 헙?”

돌연 루체가 내 양쪽 손등에 자기 양손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당황했으나.

이내 루체가 마나를 내보내 물로 이루어진 틀을 만들자, 나는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얼음 마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마나를 원소화하지 말고 일단 편하게 흘려보내 봐. 그리고 그 감각을 기억해.”

루체의 나긋나긋한 말투가 고막을 간질였다.

그녀의 뽀얗고 가녀린 손의 감촉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의 물 마나도 내 손등을 타고 온화한 기운을 전해주고 있었다.

아직 원소화하지 않은 연푸른빛 얼음 마나는 정교한 수국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루체가 물 마나로 만들어 낸 틀에 내 마나가 끼워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음료를 특정한 틀에 들이붓고 냉동실에 넣어 두면 그 모양에 맞는 얼음과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심지어 루체가 만들어낸 물은 몹시 빠르게 흐르고 있어서, 내 얼음 마나의 영향을 받아 얼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오, 대박.’

그 어려운 게 이렇게 쉽게 되다니. 내 마나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한 수국 모형이 완성되려 하고 있….

“이제 풀어볼게.”

“아직!”

“앗!”

돌연 루체가 자기 마나를 풀어 버리려 하자 나는 다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좀 더 완성도 높은 얼음 수국을 만들고 싶어서 아직 내 마나를 얼음으로 만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미 말하기 전부터 루체는 수국 틀을 없애고 있었고.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풀려가던 마나를 다시 원소화하려 했으나, 이미 늦어 버렸다.

끝내 원소 상태가 아닌 내 마나와 루체의 마나가 격돌하며 반발을 일으켰다.

마나 역장 탓이었다. 마나끼리 서로를 밀어내는 힘이다. 아직 원소화하기 전의 마나끼리 부딪쳤을 때 일어난다. 생명체들의 마나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얼음 생성]을 적의 몸 안에서 발동시키는 꼼수를 쓸 수 없었던 까닭이 그것이다.

결국 불안정해진 물 원소와 내 얼음 마나는 물뿌리개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차아아악─.

연푸른빛 얼음 마나가 공기 중에 흩어지고.

루체의 마나로 이루어진 물이 우리 몸체에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우리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버렸다.

축축한 머리칼에서 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루체도 젖은 얼굴로 물을 흘리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우리는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푸훕.”

루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

…뭐 이리 웃어, 얘는.

루체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 가면서까지 깔깔대고 웃었다. 마치 개그 프로그램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개그를 보고 박장대소할 때의 모습이었다.

솔직히 나도 이 상황 자체가 웃기긴 했다.

생각할 수록 웃기다 보니, 점점 입가에 웃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루체가 웃고 있는 영향도 클 것이다.

“아, 너무 웃겨…! 배 아파….”

그러고 보니 루체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그녀는 항상 무덤덤한 얼굴이거나, 아주 가끔 온화한 미소만 흘릴 뿐이었는데.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난 완전 직격탄 맞았거든.”

“푸학!”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루체는 한 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다시금 웃음이 튀어나와서, 우리는 한참 동안 기분 좋게 웃어댔다.

“아, 닦아줄게.”

이윽고, 루체는 옆 의자에 걸어 둔 교복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짚고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는 그녀.

“‘발원 해제’하면 되잖아.”

“물 마법은 옷에 스며든 건 못 없애.”

루체는 손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면서 대답했다.

‘발원 해제’란 내 빙결 해제랑 비슷한 것이다. 자기 물 마법 쓴 거 없애는 거다.

생각해 보니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물 마법 쓰고 발원 해제를 해도 축축하게 젖은 옷은 마르지 않았었다. 옷뿐만 아니라 흙을 적셨을 때도 그랬다. 고여 있는 물만 없앨 수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들었다가, 시야에 펼쳐진 황홀경에 그만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루체의 자기주장이 강한 흉부가 코앞에 있었으니.

물에 젖은 하얀 셔츠엔 검은 속옷이 내비치고 있었다. 내 눈은 옆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그 매혹적인 풍채를 쳐다 봤다가, 다시 옆으로 돌아가길 연신 반복했다.

“어딜 보고 있어?”

“……!”

스릴러물의 한 장면처럼, 내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루체의 얼굴이 눈에 담겼다.

즐거운지 뺨에 홍조를 띤 얼굴.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려 있는 그녀의 얼굴은 축축하게 젖은 까닭에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작, 변태.”

루체의 내밀한 음색이 깃털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그 잠깐의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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