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 학기말 평가 (6)
루체 엘타니아에게 타인이란 몸체에 뾰족한 가시가 잔뜩 돋아 있는 고슴도치였다.
조금만 거리가 가까워져도 가시에 쿡쿡 찔려 따끔거리고 마니까.
과자집 마녀는 죽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갈 곳 없는 루체를 거두어 주었던 사람. 루체에게 몹시도 소중했던 사람이, 눈앞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과자집 마녀는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목숨을 바쳤고, 천앙의 대마녀라는 악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사람들한테서 폄훼를 당해 오고 있었다.
역사란 오롯이 과거의 전유물이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손에 의해 주물러지는 공예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루체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지독한 결말이 되어버렸다.
진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인간을 향한 혐오감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고작 10살 때의 일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기억해 버리고 마는 루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그때의 고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말았다.
그래서 벙어리처럼 살면서, 타인을 피해 다니면서.
결국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머릿속 깊이 감출 수 있는 재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아린 고통만은 잔향처럼 남아 있어서, 누군가의 접근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속을 바늘로 깊이 찌르는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절로 혐오감을 느끼고 마는 루체에겐 몹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단둘이서 식사하거나, 별거 아닌 일상 얘기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거나, 함께 공부하거나, 어려워하는 건 가르쳐 주거나, 훈련하는 걸 도와주거나, 격려해주거나….
아직 친구가 된지 한 달도 채 안 된 사이인데, 그 친구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루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을 안겨 주었다.
유일하게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10살 때 과자집 마녀가 죽는 모습을 지켜본 후로 쭉 타인에게서 마음을 닫고 살아왔던 루체에게.
그 친구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처럼, 마치 어둠을 밝히는 새벽녘의 일출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아이작의 모습이 루체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을린 교복. 화염 마법에 당한 흔적. 게다가 어디서 그리 굴렀는지 흙먼지를 온통 뒤집어썼다.
군데군데 찢어진 교복 틈새로 굳은 혈흔이 보인다. 누구 때문에 그리 생채기가 난 걸까.
소매를 걷어 올려 보이는 팔뚝에 피멍이 커다랗게 나 있다. 누구한테 그리 거칠게 얻어맞은 걸까.
잔잔한 물가에는 물방울 하나만 떨어져도 원형의 파문이 수 회나 퍼져나가는 법이다.
그러나 아이작의 모습은 잔잔한 물가에 바윗덩어리를 떨어뜨린 것처럼, 루체의 속내에 격류가 흐르게 했다.
“…루체?”
기분 좋은 울림이다. 그래서 그 이름을 불러 주는 네가 다치는 게 무척이나 싫다.
지금, 이 상황이 시험이라는 사실을 안다. 다칠 수 있다는 건 아주 당연하다. 루체는 머리로는 납득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아이작을 수 명, 수십 명의 적들이 노리고 있고, 전부 그를 다치게 하려는 거라면.
루체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 없게 돼버린다.
푸아아아아아아───!!
삽시간에 그녀의 물 마나가 청아한 푸른빛을 흩뿌리는 물 원소가 되어 머리 위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일대를 에워쌀 만큼 웅대한 규모였다.
주위에 물 한 방울도 튀기지 않을 만큼 마력 제어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이는 물 한 방울조차도 공격에 사용하겠다는 뜻과 별 다름이 없음이라.
동시에 직경 2m 정도의 푸른빛 마법진 다섯 개가 그 주위에 새겨졌다. 전부 5성급 이상의 마법진. 언제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꺼번에 발동 준비를 마친 것이다.
아이작과 시엘을 노리고 있던 적들은 죄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루체를 경계했다.
그들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곳에 있는 전원, 루체의 마법 범위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녀는 언제든 이곳에 있는 누구든지 해치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 도망쳐라…! 수석은 절대로 못 이긴…!”
“도망치면 내가 널 죽인다.”
트리스탄이 다급히 부하들에게 명령하던 중, 리제타의 살벌한 음성이 그 말을 잘랐다.
“싸우기도 전에 꽁무니 빼고 도망치려는 남정네라니, 난 그런 꼴 못 본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 하지 않겠냐?”
트리스탄과 그의 부하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리제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펠 카드를 빼앗으면 네놈들은 전~부 다 내 적이 된다! 한 놈이라도 더 많아야 내가 재미 좀 볼 거 아니냐, 아앙?!”
리제타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 트리스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씨익 웃으면서 수석을 노려보는 리제타. 그녀는 처음부터 이 시험에 빠르게 통과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상황이 좀 무르익었을 때 펠 카드를 얻으면, 많은 적과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을 뿐.
이 일촉즉발의 상황…! 치열한 전투를 원하는 전투광인 그녀에게는 흥분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신이 오싹거린다. 그 냉철하던 수석이 격분하고 있다니. 무려 자신이 긴장하고 말았다니!
리제타는 깔깔 웃으면서 방망이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이내, 그녀 앞에 연갈빛 마법진이 구현되었다.
“…….”
도망칠 생각이 없는 건 건물 옥상에 앉아 있는 케리드나 화이트클락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수석이 짜증 나서였다.
A 클래스에 들어온 이후, 케리드나는 A 클래스의 동기들에게 살갑게 대했다. 어중이떠중이하고는 다른 존재들임이 명백하니,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견고히 다지기 위한 인맥으로 삼을 셈이었다.
그러나 루체는 단 한 번도 케리드나의 인사를 받아 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고, 음식물쓰레기라도 보는 양 자신을 쳐다봤던 루체 엘타니아. 말 한마디조차 섞어 주지 않고, 그저 기분 나쁘다는 태도만 일관해 왔다.
수석이라 함부로 못 대했으나, 지금은 그 잘난 머리통에 자기 화염을 갈겨줄 수 있는 기회였다.
잠깐 수석의 등장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긴 했지만, 이제는 딱 정리가 된 느낌이다.
케리드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피식 웃으면서 연붉은빛 마법진을 전개했다.
“…아이작.”
루체는 아이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온화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걸렸다.
머리 위로 생성된 섬뜩한 소용돌이와 마법진들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어서 가.”
아이작이 어서 시험에 통과하고 안전해질 수 있도록.
루체는 그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 셈이었다.
“고맙다, 루체.”
상황을 판단한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제타가 있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E급 평민 따위가 어딜!”
곧이어 트리스탄이 아이작을 향해 연녹빛 회오리바람을 날리고.
루체가 물 보호막 [수벽]으로 아이작을 지키려는 순간.
「화염 폭풍 (불 속성, ★5)」 + 「돌개바람 (바람 속성, ★4)」 =
───────── 「염룡(炎龍) (불+바람 속성)」
화르르르르르르륵──────!
몰아치는 회오리가 아이작을 향하다 말고 화염을 휘감은 채, 동양용처럼 천공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트리스탄이 날린 [돌개바람]을 향해 케리드나가 거센 화염을 날려 합동 공격을 만든 것이었다.
미리 작전을 짜둔 것도 아니고, 케리드나는 트리스탄이 어떤 마법을 쓸지 예상해 그 마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화염 마법을 구사했다. 쉽사리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케리드나는 들고 있던 완드를 지휘봉처럼 휘젓기 시작했다. 화염을 나선형으로 휘감은 회오리바람은 그 지휘를 따르며 천공을 떠돌아다녔고, 시간이 갈수록 케리드나의 마력을 갉아먹으며 더욱 장대해져 갔다.
이어, 리제타가 소리쳤다.
“가즈아아아아아!!”
──────「암석 붕괴 (바위 속성, ★4)」
드드드드드득───!!
쿠우우우우우───!!
리제타가 마법진을 향해 방망이를 횡 방향으로 휘두르고, 이를 방아쇠 삼아 황옥빛을 뽐내는 바위덩이들이 사납게 공기를 가로질렀다.
마도 둔기, ‘록타’. 바위 속성 마법의 위력을 증대시켜 주는 그 방망이는 [암석 붕괴]의 위력을 터무니없이 높여 주었다. 그 만큼 마력 운용이 복잡해지는 무기이나, 이미 수 년간 록타에 손을 익혀온 리제타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바위 마나가 고밀도로 뭉쳐 있는 마법의 바위가 아이작을 향했다.
이미 아이작은 새끼손가락과 약지로 단검과 재해의 검집을 잡은 채, 남은 양손가락을 맞대고 얼음 마나를 응집시키고 있었다. 재해의 검집까지 써서 두 방의 [빙결 폭발]을 날려 리제타의 마법에 대항할 셈이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그 틈에 케리드나가 완드를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자 기세를 타고 커져 버린 [염룡]이 아이작과 루체, 시엘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화염의 격류가 나선형으로 흐르고 있는 기다란 회오리바람이 일대를 뒤덮으려 했다.
트리스탄의 부하들도, B 클래스 우등생들도 여러 원소 마법으로 요격해 왔다.
「수류 차단막 (물 속성, ★6)」
그 순간, 아이작 주위로 창궁처럼 맑고 푸르른 물 보호막이 씌워졌다. 루체의 물 마법을 무효화해주는 보호막이었다.
동시에 지면에 웅장한 푸른빛 마법진이 단숨에 궤적을 그려 나가고.
이후, 그 마법진에서 혹등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 「고래 비상 (물 속성, ★6)」
푸우우우우우우우 ──────!!!!!
쿠와아아아아아 ──────!!!
적들의 모든 마법이 거대한 고래에게 잡아 먹혔다. 정확하게는, 고래와 엇비슷한 형태로 응축된 해류가 무서운 기세로 솟구치고 있는 광경이었다.
격류가 흐르고 있는 그 몸체에 휩쓸리고 만다면, 누구나 격한 수압에 찌그러지면서 수류에 따라 그 고래의 몸체 안을 엄청난 속도로 떠돌게 될 것이었다.
[고래 비상]은 아이작의 발밑에서 발동됐으나.
그는 시전자의 물 마법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수류 차단막] 덕분에 루체의 공격 자체로부터 무시 받고 있었다.
물로 이루어진 고래는 제 몸체에 맞닿은 건물을 반파시켰고.
그 건물 잔해들은 고래의 격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트리스탄과 그의 부하들이 있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물로 이루어진 고래는 그들마저도 집어삼키고, 비명 소리조차도 잡아먹은 듯했다.
곧이어 [고래 비상]과 [염룡]이 격돌했다. 그러나 [염룡]은 고래의 몸체에 허무하게 잡아먹히며 후텁지근한 수증기만 폭발적으로 내뿜을 뿐이었다.
리제타의 [암석 붕괴]는 고래의 몸체 안에서 이리저리 부서지며 격류에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반파된 건물들의 최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 루체 앞에서 1학년 학생들의 마법 따윈 무의미했다.
“무섭네, 진짜….”
아이작은 감탄하면서 [빙결 폭발]의 술식을 풀고 계속 내달렸다.
그리고 [고래 비상]이 푸른빛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
아이작은 자신을 노리고 마법진을 전개하고 있던 리제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안 놓친다!!”
리제타는 위로 치켜든 방망이로 마법진을 내려쳤다.
──── 「낙석 (바위 속성, ★4)」
아이작은 자기 주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단 사실을 알아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허공에 새겨진 연갈빛 마법진으로부터 위압적으로 커다란 황옥빛 바위가 떨어지고 있는 광경이 눈에 비쳤다.
시엘과 루체는 [수벽]을 전개해 그 공격을 막아 내려 했으나.
뜻밖의 바람이 [낙석]을 덮쳐들었다.
──────── 「돌개바람 (바람 속성, ★4)」
트리스탄의 마법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강력한 위력의 연녹빛 회오리바람이 공기를 가로지르고.
아이작을 향해 떨어지던 [낙석]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 [돌개바람]은 리제타의 [낙석]을 멀리 날려 보내는 게 가능할 정도로 높은 마나 밀도를 자랑했다.
「바람 생성 (바람 속성, ★1)」
부자연스러운 바람이 주위에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은 삽시간에 기세를 더해가 근방에 있던 학생들의 머리칼과 교복 자락을 사납게 뒤흔들었다.
그리고 한 소녀가 담녹색 양갈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늘에서 떨어졌다.
휘우우우우우──.
발에 바람을 휘감으며 가볍게 지면에 착지하는 그녀.
카야 아스트레앙이 아이작과 리제타 사이를 가로막았다.
“카야…?”
* * *
[ 카야 아스트레앙 ]
Lv : 96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얼음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
나는 카야의 뒷모습을 본 순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갈비뼈 부위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보인 까닭이었다.
“크하하하! 차석까지 참전이냐!! 대체 그 엑스트라 같은 새끼가 뭐길래 네 년들이 그렇게 난리냐, 앙?!!”
리제타는 흥분한 얼굴로 수석과 차석, 삼석을 번갈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카야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서 가세요, 아이작 님. 이번엔 무슨 뜻을 품으셨는진 몰라도…, 저는 무조건 아이작 님 편입니다.”
카야의 나지막한 목소리엔 은근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울다 온 사람처럼.
신경 쓰였지만 깊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부족하니까.
나는 고맙다고 한 후 다시 제출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넌…?”
“루체 엘타니아!”
돌연 카야는 목청이 터져라 크게 소리쳤다. 상대는 자신을 향해 반응한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수석이었다.
카야의 시선이 루체 쪽으로 돌아갔다. 화가 난 옆얼굴이 내 눈에 얼핏 보였다.
루체는 무감정한 얼굴로 카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지켜 준 까닭에 적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루체 엘타니아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카야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단연 루체밖에 없다. 아슬아슬하게 탈락은 면한 듯했으나, 루체와의 승부가 카야를 크게 자극한 듯했다.
리제타와 케리드나는 그 성실하던 카야가 언성을 높이는 모습도 처음 본 것인지,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카야 아스트레앙! 제 이름은 카야 아스트레앙입니다!! 당신 바로 뒤에서, 당신을 죽어라 쫓고 있는 게 바로 저란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절 기억 못 한다고…!”
울먹임이 담겨 있는 목소리. 카야의 진심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짜증납니다, 당신!”
완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차석이 수석을 향해 품고 있던 열등감이 쌓이고 쌓이다, 끝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루체와의 싸움이 카야를 몰아넣은 게 분명했다.
저 열등감이 앞으로 나아질 일은 없다. 루체와 카야 사이의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지기만 할 테니. 카야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진득한 회의감뿐일 터다.
“저는, 당신한테, 그런 취급밖에 못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제 자신이 한심해져서…!! 제가…, 제가…! 그렇게… 당신이 보기에, 약한…!”
「빙벽 (얼음 속성, ★4)」
나는 카야 주위로 얼음벽을 만들어냈다. 학생들 시야에 그녀가 우는 모습이 담기지 않도록.
이성을 되찾았을 땐, 내 발은 이미 카야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카야를 뒤에서 껴안듯이 가까이 밀착한 채로, 품 안에 있던 마법 주머니에서 완드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대수림을 지키던 8성급 거대수(巨大樹) 마수, ‘아르마나’를 소재로 제작된 완드.
유일하게 식물 속성 마나에 공명하는 완드이자, 카야의 능력치를 한껏 끌어 올려줄 그녀의 최종 무기.
그리고, 내 선물이었다.
“전에 말했을 텐데.”
흐르는 눈물을 제외하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카야의 떨림은 멎어 있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수도 없이 플레이해 오면서 나는 캐릭터들에게 정이 가버릴 대로 가버린 상태였다.
특히나 카야 아스트레앙은 공식 히로인 중 한 사람이다. 그녀에게 품고 있는 내 애정이 얼마나 큰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일까. 카야가 슬퍼하는 모습은 내 속까지도 북받치게 해서.
나는 도저히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미래에 네 진가가 발휘될 거라고.”
“아이작… 님…?”
카야는 나를 엄청난 강자라고 오해하고 있다. 거기다 나를 동경하고 있기까지 하다.
실제로 나는 약한 놈일 뿐이나, 지금의 거짓된 나는 카야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터다.
그걸 이용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그녀가 힘을 내주길 바랐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잊지 마라. 너는, 내가 인정한 사람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카야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빙벽]을 풀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카야 아스트레앙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빙벽] 안에서 어떤 내용의 짧은 대화가 오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가장 얼떨떨해하는 건 당사자인 카야 쪽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어느새 멎어 있었고, 그녀의 눈길은 내가 건네준 아르마나의 완드 쪽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내, 카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더니 머리 위로 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카야가 남자에게 면역이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또 도망치기냐, 이 겁쟁이 자식이!!”
리제타의 바위가 한 번 더 내 쪽으로 날아들려 했으나.
──── 「풍검 (바람 속성, ★3)」
한층 더 강력해진 카야의 바람이 날카로운 검기처럼 수십 발 튀어 나가 리제타의 바위를 가볍게 절삭해 버렸다.
리제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록타의 힘까지 머금은 바위다. 그런 마법이 바람 마법에 간단히 잘려 나가는 광경은 리제타에게 가히 큰 충격을 줄 법했다.
“……?”
마법을 쓴 카야 자신도 놀란 눈치였다. 그럴 만했다. 아르마나의 완드를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원소 마법 전투력은 격상했을 테니.
이걸로 날 도와 줬던 빚은 청산한 거다, 카야.
나는 온갖 원소 마법과 비명 소리가 판치는 격전지를 등지고, 제출처만을 향해 내달렸다.
뇌신조 토벌전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