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54화 (54/334)

EP.54 Prologue (4)

영원의 세계엔 시간을 관장하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고 한다.

이따금 파랑새가 날아와 비석에 부리를 갈고 나면, 모래알 수준으로 비석이 깎여나간다고 한다.

그렇게 무한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비석이 깎여나가, 끝내 제 형상을 잃게 되면.

그때 비로소 영원의 1초가 흘렀다고 표현된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 나오는 신화 속 이야기다. 시간 가속화 마법, [영원의 비석]은 그 신화에서 파생된 마법이라는 설정이었다.

[영원의 비석]은 흑막인 앨리스 캐럴의 염원이었다. 바르토스관 옥상에서 그 마법을 발동하면 악신의 부활 시기를 앞당길 수 있으니.

단, 발동 조건은 ‘환상 시계’를 촉매제로 쓰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앨리스가 하수인을 부려 그 시계를 찾으러 다녔다는 게임 속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러나 서리의 시련은 앨리스에게 환상 시계를 냅다 줘버린 모양이었다.

그 결과, 앨리스는 [영원의 비석]을 발동해서 악신이 부활할 때까지만 시간을 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리라.

환상 시계는 바르토스관 옥상에서 촉매제로 쓰이는 중일 테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간단하지.’

환상 시계의 시곗바늘을 역방향으로 돌리면 된다. 스톱 워치처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리하면 [영원의 비석]이 발동됐던 곳에서, 시간은 가속돼서 흘렀던 만큼 역행하기 시작한다. 악신이 부활했다가 다시 심연에 처박히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3D 안경과 팝콘이 절실할 듯했다.

단, 그 공간 안에 있는 것들도 전부 가속화돼서 흘렀던 시간 만큼 과거로 돌아간다는 부작용이 있다. 물론 이 세계에선 뒷일 생각 안 해도 되니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내 계획은.’

앨리스를 뚫어내고.

바르토스관 옥상에 가서 환상 시계 버튼 한번 누르는 것.

그럼 세계 멸망 저지. 시련 뚝딱 클리어. 참 쉽죠?

‘문제는 그걸 가능케 해주는 사람이 도로시뿐이란 건데….’

나는 방학식이 진행되고 있는 광장에서 벗어나 아카데미 부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로시를 찾아야 하니까.

아마도 이 시련은 도로시를 포섭해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구조일 터다. 그것 말곤 방법이 없잖아. 앨리스를 어떻게 상대하라고.

‘하필 이날 못 보다니.’

어디 있냐, 도로시.

또 자연경관이나 구경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떼우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방학이라 늦잠 자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문득 강한 위화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상해.’

떠오른 의문이 내 발을 멈추게 했다.

도로시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자. 그렇기에 아카데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도 가볍게 내던질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런 애가 악신이 부활했는데 안 나타난다고?’

상대가 아무리 악신이라고 해도 그럴 리 없었다. 도로시는 제 목숨 바쳐서라도 악신에게 덤벼들 녀석이니. 애당초 자기 목숨을 소모품 취급할 애다.

낮잠 자는 중에 악신이 나타나서 못 막았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통하지 않는다. 도로시의 마나 감지력은 수준급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 무조건 악신의 막대한 마력을 느끼고 깨어났을 터.

‘도로시가 나서지 않았던 이유가 있는 건가…?’

일단, 도로시가 이 섬 안에 있는 건 분명했다. 그녀는 아카데미 부지 밖으로 나가 봤자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도로시 선배!!! 어디 있어요?!!!”

만약 근처에 도로시가 있다면 내 부름에 응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르짖어도 도로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숙사에 있는 걸까.

나는 아카데미 생활동으로 달려가서 최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인 샤를관으로 향했다.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생활동은 몹시 한산했다.

마법학부 1학년은 뒤늦은 방학식을 진행하는 중이고, 나머지 학생들은 이미 한창 방학 도중이었으니.

샤를관에 침입하기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든!”

[꾸웅─!]

허공에 연갈빛 마나가 뭉치고, 작은 골렘 사역마 이든의 형태가 되었다. 이 녀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제는 지금 중요하게 따질 사항이 아니었다.

도로시의 방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정보니까.

“이든, 계단 좀 만들어 줘!”

[꾸웅!]

「바위 생성 (바위 속성, ★1)」

「얼음 생성 (얼음 속성, ★1)」

이든은 샤를관 여자동 외벽에 주먹구구식 바위 계단을 만들었고.

나는 그 위로 얼음 사다리를 만들었다. 예전보다 [원소 효율]이 올라간 덕분에 나름 정교한 형태의 사다리가 만들어졌다.

도로시의 방은 3층. 샤를관은 모든 층의 천장이 높은 탓에 3층이라 해도 높은 곳에 있었다.

여자 방을 몰래 살피러 간다는 사실에 죄책감 따위를 느낄 겨를은 없었다. 나는 바위 계단을 뛰어오른 뒤, 얼음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3층 어느 방. 창문 너머, 도로시의 방 풍경이 내 눈에 비쳤다.

마치, 회색.

필수적인 가구나 간단한 용품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겉보기엔 무척이나 조용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살 법한 공간.

원래 도로시 방은 그랬다. 그나마 있는 예쁜 곰 인형도 장롱에 처박힌 채 솜털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는 팔만 슬쩍 내밀고 있을 뿐이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도로시의 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도로시가 시간을 들여 삶에 미련을 갖게 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고 있었다는 건.

맵을 돌아다니면서 도로시의 흔적을 찾다 보면 간접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없어….’

아무튼, 도로시는 방안에 없었다. 나는 얼른 지면으로 내려가 이든을 역소환하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도로시가 있을 법한 곳들을 뒤져 봤으나 헛수고였다.

끝내 종언의 시간이 이르러 악신 네피드가 부활하고.

검은 화염구가 지면에 내려앉으며.

세상은, 멸망했다.

● ● ● ● ● ●

“지금부터 마법학부 1학년 여름방학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드넓은 아카데미 부지에서 도로시가 어디 있는지 찾는 건 몹시 어려운 일.

반면에 내겐 제한 시간이 있었다. 서리낫의 냉기가 현실에 있는 내 몸을 온전히 잠식하면 나는 죽는다.

‘어쩐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노동력. 도로시의 행방 찾기를 도와줄 사람이 최대한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할 때, 정해진 시련 클리어 루트가 아닌 것들은 죄다 지뢰인 경향이 있었다.

이안이 시련에서 절망감을 느꼈던 연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근데 이 시련은 이안이 겪었던 거랑 다른 거잖아.’

애초에 사람을 모아서 도로시를 찾는 일이 시련 클리어 루트 중 하나일 수도 있는 거고.

‘시도는 해 봐야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내 쪽을 쳐다보기 시작한 방학식 진행자와 마법학부 학생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카야! 마테오! 루체! 에이미! 날 따…!!”

순간, 나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방학식 진행자, 학생들의 얼굴이 사라졌기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달걀귀신처럼 눈, 코, 입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살구색만이 가득할 뿐.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미동조차 없이, 오로지 나만을, 똑바로.

“이런 씹…!”

전신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마치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기괴한 광경.

이윽고.

키우우우우욱───!

학사진, 학생들의 머리가 죄다 반으로 갈라지며.

달팽이처럼 수많은 이빨이 달린 붉은빛 신체의 단면이 내 눈에 담겼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저마다 갈라진 머리에서 길쭉한 혀가 아나콘다처럼 솟아올랐다.

의자가 내 다리에 부딪혀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땐, 나는 이미 전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아으, 씨! 못 볼 걸 봤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본 대로였다.

아마 방학식이 끝나고 카야를 만났을 때도, 저번과 같은 내용의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코앞에서 그녀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게임 지식이 없었으면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을지 감도 안 잡힌다. 진짜… 저 지뢰들은 실제로 보니 더욱 엿 같았다.

시련 이 새끼. 개 치사하네. 됐다, 그냥 내가 찾고 말지.

전술했듯 아카데미 부지는 지랄 맞게 넓은 편.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도로시가 있을 만한 곳들을 특정 짓는 게 중요했다.

“도로시가 있을 만한 곳…! 어디냐고오!!”

여태까지 도로시와 지내오면서 했던 얘기들을 머릿속에서 전부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시답잖은 얘기, 쓸데없는 농담, 뭐든 좋다. 단서를 찾아내라.

지금쯤 도로시가 있을 만한 곳. 그곳은 어디인가.

어디인가.

어디인가.

─ ‘회장, 여기서 뭐하고 있어?’

─ ‘□□, □□□□□. □□ □□ □□□ □□ □ □□□□? □□, □□□ □□ □ □□ □□ □ □□□□ □□□□…. □□ □□□□□□, □.’

─ ‘그러기엔 너무 안심한 표정 아니야?’

─ ‘□□ □□ □□□.’

─ ‘니히히, 역시 내 팬 답군!’

● ● ● ● ●

─ ‘내가 돼서 좋아?’

─ ‘□, □ □□ □□□□, □□□□.’

─ ‘흐응, 회장은 내가 좋구나?’

● ● ● ●

─ ‘느흐흐흐흐···! 아, 반응 뭐야아. 회장 귀여워.’

─ ‘□□ □□□□? □□ □□□.’

─ ‘오늘은 별이 너무 예뻐서 말이지, 구경하다가 갑자기 네 생각나서 보러 왔어! 지금도 단련하고 있나, 하고.’

● ● ●

─ ‘니히히, 만나서 기쁘다.’

─ ‘□□ □□□□ □□ □□□□.’

─ ‘말하는 거 봐~. 귀여워! 냐하하!’

● ●

─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어!’

─ ‘□□□ □ □□□□ □□□□□□?’

─ ‘비구름이 뭉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거든. 이제 더 볼 게 없어서 떨어진 거야. 특히 비구름 만들어지는 순간이 제일 좋아. 심미감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날면서 구경하다가 ‘이제 됐다’하고 떨어진 거지.’

─ ‘…….’

─ ‘니히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뭉게구름이라 생각했던 적란운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저 구름 무리는 오후에 비를 쏟아내리겠지.

서쪽, 멀리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아킨스 해(海) 방면.

수차례의 죽음을 거치면서 이 반경을 죄다 뒤지고 다녔다. 마침내 내가 이른 곳은 해안가 근처에 우뚝 튀어나와 있는 절벽이었다.

마녀 모자를 쓴 연보랏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학생이 두 무릎을 안은 채 절벽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먼 바다 위 하늘을 메우고 있는 먹구름이었다.

“허억, 허억….”

죽을힘을 다해 뛰어왔다. 나는 겨우겨우 숨을 고르면서, 도로시 하트노바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흠칫 떠는 그녀. 내 갑작스러운 발소리에 놀란 듯 보였다.

“선배.”

“뭐야, 회장? 여긴 웬일이야?”

도로시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마녀 모자를 눌러쓴 채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번 코를 훌쩍이고 나서야 모자를 들어 올려 어여쁜 미소를 보여주는 그녀.

평소에 도로시가 수업을 빼먹으면서까지 하늘을 감상하며 살았던 건.

죽기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마음속에 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미소로 자기 심정을 감추고,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자신을 연기하며.

언제나 빛나고자, 그녀는 노력해왔다.

그런 도로시를 나는 알고 있었다.

“회장…?”

나는 도로시 옆에 나란히 앉았다.

비구름이 뭉치는 광경…. 처음 들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저런 게 뭐가 예쁘다고.’

그냥 우중충할 뿐이었다.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도로시는 칙칙한 비구름에서 자기 자신을 비쳐보고 있었던 걸까.

“선배.”

“으, 응?”

어차피 여기 있는 도로시는 사라질 잔향.

방학식 때 바다 먼 곳에서 비구름이 뭉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인 도로시의, 복제본일 뿐.

단지 시련을 클리어하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도로시에 관해 많이 생각하다 보니, 나는 그녀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야 말았다.

당장 현실의 도로시한테는 하기 힘든 말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말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열고 그동안 품어왔던 속마음을 털어내기로 했다.

“저, 선배가 정말 멋있어 보였던 거 알아요?”

“으흠, 그래서 내 팬 된 거 아냐?”

“맞아요. 어떤 상황에서건 빛나려고 했던 선배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야, 이거 팬이 될 수밖에 없겠다~, 했었죠.”

“니히히, 그래?”

“근데 선배는 무리하고 계시죠.”

“…어?”

“억지로 웃고, 억지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으려 하잖아요. 조금이라도 선배의 삶을 의미 있게,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솔직히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죠?”

“…….”

도로시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러나 곧바로 평소처럼 웃는 얼굴을 가면처럼 써버리는 그녀.

“웬 뜬금없는 얘기야, 회장? 나 조금 재미없어지려 하는데.”

도로시의 미소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말 실수 한번이라도 했다간 나한테 마법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어차피 여기서 많이 죽었다. 오히려 도로시한테 죽는다면 내 인생 최고의 죽음으로 손꼽을 수 있겠다. 묘비엔 ‘사인 : 씹덕사’라고 적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장난스럽게 죽음을 언급하기엔, 내 몸은 현재 진짜로 위험한 상태였다.

아까 옷을 들어 복부를 확인해 보니 까무잡잡하게 얼어 있었다. 이제 회귀가 가능한 횟수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앞으로… 한두 번일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꼭 도로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도로시와 있었던 일들을 되짚다 보니, 내가 단순히 그녀를 살리겠다고 품은 각오가 잘못된 것인지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도로시가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면? 내가 구해주는 일 따윈 조금도 바라지 않고 있다면?

그렇기에, 도로시의 반응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선배는 제가 구합니다.”

내가 널 구해도 되는지, 아닌지. 도로시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니까 시한부 인생인 것처럼 굴지 말고 졸업 후 어떻게 살지나 고민하라고요.”

도로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선배는 저한테 너무 빛나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도로시를 최고로 애정했던 건, 바로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도로시는 몸을 움찔 떨었다.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파도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일렁였다.

“…진짜 재미없네, 회장.”

이윽고, 도로시는 다시 비구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난 강제로 구해지는 걸 선호하는데. 그 편이 재밌잖아.”

비구름은 조금도 예쁘지 않다. 그러니 더는 눈에 담을 필요도 없었다.

도로시는 내가 두서없이 내뱉은 말을 온전히 이해했다. 내 진심도 전해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바다가 전해 오는 습기를 피부로 온전히 느꼈다.

도로시는 살려고 한다. 그거면 됐다.

다시 눈을 뜨고서 도로시 쪽을 쳐다보았다. 이제 본론이었다.

“선배. 지금부터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요.”

“여기서 나갈 셈이지?”

“……?”

…응?

“이 세계가 가짜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거든. 난 모든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구?”

“그럼 선배, 처음부터 전부 다 알고 계셨…?”

“그건 아니야.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 근데 나나 이 세상은 가짜잖아.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굳이 내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고.”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로시가 악신에게 대항하지 않았던 건, 이 세상과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굳이 저항할 이유가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도로시는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뽀얀 손을 내밀었다.

“니히히. 도와줄게, 회장! 같이 이 세상을 부수러 가자.”

정말이지, 상큼한 과일처럼 해맑은 미소다. 너무 귀여워서 웃음만 나오네.

“네.”

나는 도로시의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이제부터, 이 시련을 깨부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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