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3 선물
바람이 점차 서늘해져 간다. 걸음마다 길에 색채를 덧입힌 낙엽이 밟힌다.
교복에 케이프 숄을 걸친 학생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나도 요새는 그리 입고 다녔다.
엘트섬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역시나 마족에 관한 이야기는 학생들 입에서 연거푸 오르내렸다.
─ ‘우리 중에 마족 다루는 놈 있는 거 아니야? 이 세계의 흑막 같은 거지.’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 ‘응, 음모론 기각.’
─ ‘그런 괴물이 있었어 봐라. 마력량이 대놓고 눈에 띄지 않았겠냐?’
─ ‘수석 아니야? 걔 마력량 S급 넘잖아.’
─ ‘아니지. 맞다면 저번 학기 때 마족한테 털렸을 리가.’
─ ‘별의 마녀도 아니겠지? 마족한테 대항하기도 했고.’
─ ‘그러면, 마족이 노리는 놈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게 맞나?’
─ ‘아마도 그렇겠지.’
이쯤 되니 학생들은 대부분 눈치챈 분위기였다. 마족이 메르헨 아카데미에 자주 출몰하는 원인은 학생 중에 있다고.
아니라면 왜 방학 동안 잠잠했던 마족이 학기 중에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겠는가.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애당초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카데미에 마족 같은 위험 요소가 밥 먹듯이 출현하는 건 상식이었다. 아카데미물 국룰이니까.
저녁놀이 스산하게 져간다.
아카데미 교문 인근에 위치한 조세나 숲속엔 물 마나가 밀도 높게 흐르는 호숫가가 있다. 밤이 되면 그 색채가 더욱 또렷해지리라.
나는 그 근처에 자리 잡은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전말을 얘기하자면.
낮에 오르핀관을 걷던 중, 대뜸 카야가 내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평소의 카야였다.
쪽지엔 오늘 수업 끝나고 ‘여기’로 와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서.
귀여운 그림으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이곳, ‘노르한 호수’가 목적지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보답을 바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그녀와 할 얘기가 많았던 참이었지.
오늘은 카야와 적당히 회포를 풀 작정이었다.
‘너무 일찍 왔나.’
수업이 끝나자마자 잰걸음으로 왔는데, 좀 더 여유를 가졌어도 괜찮았을 것 같았다.
악력기처럼 생긴 마력기를 손에 쥐고 마력을 흘려보내길 반복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원소 효율]을 단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바람 생성 (바람 속성, ★1)」
휘우우우─.
돌연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마력의 감각. 바람 마법이었다.
깜짝 놀라 뒤쪽을 돌아보자,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여학생이 눈에 비쳤다.
담녹색 양갈래 머리칼, 신비로운 적빛 눈동자, 태연한 미소.
‘그새 또 인격 바뀌었네.’
악식의 카야였다.
[ 카야 아스트레앙 ]
Lv : (140)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얼음, 식물, 피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벌써 와 계셨네요. 저도 나름 빨리 온 편이라 생각했는데, 늦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아. 근데 그건 뭐야?”
카야는 제 신장만큼 길쭉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보따리에 둘러싸인 채라 무슨 물건인지 정확히 분간하기 어려웠다.
“후훗, 비밀입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선물을 줬을 때 당신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나한테 제대로 감사 인사하겠다고 했었지. 보답용 선물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냐.”하고 대충 넘어가고 호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야는 내 옆에 있는 그루터기에 앉았다.
내게 줄 선물을 끌어안는 그녀.
“진상규명위원회에선 아이작 님 지령대로 진술했습니다. 별다른 일도 없었고요.”
카야의 진술을 꾸며내기는 아주 쉬웠다. 그녀 또한 기절했던 사정은 이안과 마찬가지였으니.
마족에게 방심해서 당했다. 정신을 잃었다. 리제타가 구해줬다. 회복 마법으로 치유해줬다. 사실관계는 그렇게 정리해주었다.
그렇기에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 주제로 이야기를 길게 이어갈 필요는 없으리라.
“다행이네.”
“아이작 님은 별일 없으셨습니까? 절 구해주시고, 학사 측에서도 이런저런 추궁을 받으셨을 텐데.”
“나도 별일 없었어. 표면상 나도 피해자니까 뭐. 근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카야는 눈을 위로 치켜 뜨고 기억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마족에게 끌려갔을 때… 몸 안에서 피 흐르는 게 굉장히 빨라졌던 것 같은 기억이 납니다. 몸이 정말 뜨거웠습니다. 강한 압력이 느껴져서 핏줄이 터질 것 같았고….”
카야는 앞으로 한쪽 팔을 쭉 뻗고는 그 손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뭐랄까요, 마치 피로 이루어진 바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어떤 상태였는진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요.”
나와 싸우고 있을 때, 즉 카야가 혈법사이자 마족으로 각성한 때의 이야기인 듯했다. 그때의 기억은 인간이 되면서 사라졌겠지.
“그리고 아주 잠깐 정신을 되찾았습니다. 아이작 님 등에 업혀 있었죠.”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묘사됐던 이야기라서 알고 있었다. 금방 다시 기절했겠고.
“그때… 정말로 기뻤습니다. 아이작 님께서 절 구하러 와주셨구나, 하고.”
카야는 내게 화사한 미소를 건넸다.
“다음으로 정신을 되찾았을 땐 침대 위였습니다. 그때 아이작 님께서 야한 손길로 제 뺨을 어루만지고 계셨고요. 제가 자는 틈을 노리시다니, 아이작 님도 은근히 응큼한 구석이 있으셨네요~.”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었어.”
“‘그런 의도’가 뭡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좋겠는데.”
카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능청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도로시 같은 장난기가 엿보인다. 다만, 카야의 장난은 좀 더 성적인 쪽에 치우쳐져 있었다.
‘사람 참 뻘쭘하게 하네….’
어서 다른 화제로 넘어가야겠다.
“네가 달라진 건 알고 있어?”
“네. 좀 많이…. 가끔, 기분이 많이 들뜹니다. 지금처럼. 마족한테 지배 당했던 영향이겠죠?”
카야는 악식의 인격이 되면 고양감을 느낀다.
이유 모를 자신감이 샘솟을 테고, 평소와는 다르게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겠지.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서 고동이 일고.
그럴 때마다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몽롱한 감각이 이어지리라.
그때부터 카야는 이제까지의 기억이나 상식 따윈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또 다른 자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자기감정에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만다. 나에게 호감을 마구잡이로 표현했듯이.
“뭐, 나쁘진 않습니다. 새로운 마법도 다룰 수 있게 됐고. 아이작 님이 한층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니까.”
카야는 두 뺨을 붉히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쳐다볼 때나 나올 법한 부담스럽고 촉촉한 눈빛이었다.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묵묵히 호수만 바라보았다. 호수의 물 마나가 흩뿌리는 영롱한 푸른빛이 더욱 선명해져 갔다. 숲이 어두워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오늘, 솔직히 까고 얘기할 게 있어.”
“까고…?”
평소의 내 말투대로 가볍게 말하니 그녀는 위화감을 느낀 눈치였다. 아까부터 그러고 있긴 했지만.
카야를 서글서글한 말투로 대하는 건 지양해 왔다.
내 밑천이 드러나 어떤 후폭풍이 들이닥칠지 모르겠다는 판단 탓에.
강한 척, 본색을 드러낸 척, 중2병 같은 냉소적인 태도로 그녀와 거리를 두려 했던 것이었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카야의 연심을 뻔히 알고 있고, 악식의 인격은 그 호감을 망설임 없이 표현하고 있는 상황.
이런 와중에도 카야의 마음에서 애써 시선을 피하려 한다면, 그녀의 마음을 짓밟는 행위나 다름없으리라.
그러니 기왕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됐으니,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고 확실히 못박고 가고 싶었다.
“너 대할 때 조금 힘줘왔는데, 사실 꽤 불편했거든. 안 이상했냐?”
난 심하게 오글거렸는데.
“……??”
카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미안한데, 조금 경계하느라 그랬어. 이제부턴 편하게 대할 거야. 이해해 줘라.”
꽉 조인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 정도는 괜찮겠지.
‘아이작은 강하다’라는 카야의 오해를 무너뜨릴 작정은 아니었다. 그 명제가 무너지면 내가 카야를 격려 했던 행위가 물거품이 될 테니까. 애당초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난 목표가 있어. 3학년 때 그 목표를 달성해야 하니까, 적어도 그때까진 다른 데 신경 쓸 틈은 없어.”
설령 내 최애캐인 도로시가 사랑을 고백해 오더라도, 지금은 받아줄 수 없는 처지였다.
고시생 시절을 떠올려 본다. 당연한 얘기지만, 연애 문제는 고시 생활의 명백한 적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격렬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으니.
특히 마법 단련은 지식과의 연계가 상당한 편. 집중력이 크게 요구된다. 여기에 연애 문제는 큰 지장을 초래할 터였다.
따라서 악신을 쓰러뜨릴 때까지 연애 고민은 미리 차단하고 미뤄두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내 비밀을 조금만 드러내고, 에둘러서 카야의 호감을 향한 거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카야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예쁘다. 하지만 지금 내 사정이 여의치 않다’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을 셈으로.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 점도 이해해줬으면 좋겠….”
돌연 카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쪽─.
“……!”
별안간 내 뺨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앙증맞은 소리가 가까이서 울렸다.
방학식 때의 기억이 겹쳐진다. 나는 카야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서, 상체를 숙인 채 태연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카야.
호숫가의 영롱한 푸른빛도 그녀의 눈동자가 내비치고 있는 신비로운 붉은빛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카야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그루터기에 한쪽 무릎을 올리면서 내게 가까이 밀착해 왔다.
그대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 도망칠 수 없었다.
“아이작 님처럼 강하신 분이, 이 아카데미에 찾아온 이유가 뭘까.”
허브향처럼 은은하면서도 야릇한 체취가 후각을 간질이고.
따뜻한 숨결이 이마를 훑고 지나간다.
“분명 마족 때문이겠죠. 그런데 아이작 님 같은 분이 ‘목표’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심지어 그 목표가 ‘다른 데 신경 쓸 틈조차 없을 만큼’ 드높은 목표다?”
카야는 피식 웃었다.
“혹시 아이작 님, 저희가 3학년이 되면 강대한 마족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단 겁니까? 그 마족을 쓰러뜨리기 위한 퍼즐 따위를, 아이작 님께서 맞추고 계신단 소리입니까? 그래서 그 마족을 쓰러뜨리기 위해 아카데미에 잠입했다…. 뭐, 그런 얘기입니까?”
카야의 추궁이 허를 찔러왔다.
“…상상력 끝내주네.”
그러나 당황하지 않고 명배우 아이작을 불러와 담담하게 대답했다.
방금 내 반응에 빈틈이라곤 눈곱 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이유겠냐. 3학년 때 강대한 마족 같은 게 튀어나올 줄 알았다면 미리 다른 데에 알렸겠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걸 아셨으니까. 아이작 님만이 알아차리신 거 아닙니까. 저로선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량으로.”
악신의 부활.
그 정보를 나만 알고 있다는 결론만 놓고 보자면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다만, <메르헨의 마법 기사>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뿐이지.
나 같은 쩌리한테 악신의 부활을 알아차릴 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을 리가.
뭐라 변명하려는 때, 카야는 ‘후훗’하고 웃고는 내 대답을 가로막았다.
“결국엔, ‘그 목표’란 걸 달성하기 전까지 아무하고도 ‘연애’할 생각이 없다?”
감각에 날이 선다. 어째 음산한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루체에게서 수상쩍은 낌새가 보일 때마다 느껴졌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얼른 [심리 간파]로 카야의 심리를 읽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을 사정 없이 유혹하려 합니다. ]
‘예…?’
내 예상과는 많이 다른 심리인데…?
적어도 ‘3학년 때도 제가 아이작 님을 좋아하고 있다면, 제 마음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따위의 청춘 드라마 한 장면이 연출되든가.
아니면 ‘그냥 저한테 마음 없으신 거 아닙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싫다고…!’ 따위의 말로 구슬프게 따지고 드는 상황까진 예상했었는데.
‘나 지금, 카야의 고삐를 풀게 한 건가…?’
어차피 아이작은 그 누구하고도 연애할 상황이 아니다.
즉, 자길 좋아하게 될 때까지 실컷 유혹하면 된다.
결과적으로 그가 연애할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자기를 선택하게 만들면 된다.
카야는 이런 사고과정을 거친 게 틀림없었다.
“…내 말 이상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지?”
“걱정하지 마세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카야는 배시시 웃으면서 내게서 떨어지고는.
옆 그루터기에 놔두었던 길쭉한 물건을 집어 들었다.
“아이작 님, 그거 알고 계십니까?”
보따리에 둘러싸인 물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카야.
“마솝 숲에 서식하는 롬파 족은 특별한 날 동족에게 선물을 줄 때 선택지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더 마음에 들어하는 쪽을 선물로 고르게 하는 전통이죠. 이 예쁜 돌멩이가 더 좋은지, 이 동물 가죽이 더 좋은지….”
카야는 내 쪽을 돌아보고는 방긋 웃었다.
“절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이작 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쯤 전 이 자리에 없었겠죠. 후훗, 보답으로 두 가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만 골라주세요.”
카야는 들고 있던 물건의 보따리를 풀었다.
나무 지팡이, 스태프.
새벽녘의 어스름을 담은 듯한 군청빛과 노을빛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석이 머리 부분에 달려 있었다.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자태였다.
카야는 그것을 양손으로 든 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잔야의 지팡이’. 저희 가문 보물고에 있던 마도무기입니다. 제 소유품이라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지팡이도 한번 다뤄볼까, 해서 가져온 거였는데…. 아이작 님께 더 잘 어울릴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군침이 흘러나왔으나 얼른 쓰읍, 하고 집어삼켰다.
마도무기. 무척 탐났다.
적당히 쓸 만한 마도무기를 구하려면 겔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서리낫은 지금의 나로선 다룰 수도 없으니…. 마도무기란 그림의 떡 같은 느낌이었지.
하물며 잔야의 지팡이…! 2티어였는지 3티어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레어 아이템이란 사실은 분명했다. 충분히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의 보물고에 있었을 만한 아이템이었다!
‘보답을 바랬던 건 아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는데 인간적으로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지. 그 지팡이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다.
어느 순간, 내 손은 자연스레 카야가 내밀고 있는 잔야의 지팡이 쪽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대뜸 휙, 하고 지팡이를 허리 뒤로 빼는 카야.
“두 번째 선택지는.”
카야는 한 손으로만 지팡이를 집은 채, 남은 손을 아래로 내리고서 치맛자락을 슬쩍 들어 올렸다.
뽀얀 살결. 각선미를 한껏 뽐내며 음흉한 미소를 흘리는 그녀.
“바로 저인데.”
나는 흠칫 정지했다.
“뭘 더 갖고 싶습니까, 아이작 님?”
카야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이 자신에게 연심을 품길 바라고 있습니다. ]
노르한 호수의 습한 공기가 폐부를 적시고, 서늘한 밤공기가 슬금슬금 옷 속을 파고든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적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카야에게 다가갔고.
그녀에게 안길 듯이 밀착했다가.
“앗?!”
팔을 뻗어 잔야의 지팡이를 뺏어 들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잘 쓸게. 고맙다.”
“…….”
카야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오늘 처음으로 도끼눈을 뜨고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그녀.
아쉽게도, 카야의 잔망스러운 유혹에 넘어갈 만큼 나는 연애가 고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