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6 사교회 (2)
“아이작…, 그 남자를 반드시 포섭해야 합니다.”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학생 세력은 총 다섯 곳이 있다. 학생회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은 별자리의 이름을 따 ‘4성좌(星座)’라고 일컫는다.
검은 호랑이 자리, ‘흑호’.
푸른 이리 자리, ‘청랑’.
황금 독수리 자리, ‘금취’.
붉은 코끼리 자리, ‘적상’.
4성좌는 매해 말미에 열리는 학생회장 선거를 통해 세력의 균형이 뒤바뀐다. 어느 성좌 집단에서 학생회장이 나오느냐에 따라 그 성좌의 입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학생회장 앨리스 캐럴은 4성좌 중 금취 소속이다. 따라서 현 4성좌 중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세력은 금취. 그 성좌 멤버 중 일부가 현 학생회이다.
학생회로 집권한 성좌는 권력을 독식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학생회가 아닌 성좌들에게도 학사 측에서 일정 수준의 참정권을 내준다. 덕분에 학생회가 못 된 성좌는 학생회를 견제할 수 있다.
학생회가 되면 메르헨 아카데미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게다가 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누구나 인정해주는 엄청난 스펙이 된다는 점도 큰 메리트다.
아이작에게 4성좌의 초대장이 오게 된 배경을 알아내자면, ‘수렵 평가가 끝나고 며칠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르헨 아카데미 부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엘레파스관’. 앞마당에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는 호수와 붉은 꽃잎이 만연한 나무는 잘 어우러져 동방국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그곳에 자리 잡은 높다란 목재 건물이 4성좌 중 붉은 코끼리 자리, ‘적상’의 본거지였다.
그 안, 집무실. 벽에는 붉은 코끼리 자리를 상징하는 별자리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등지고, 양옆에 생기 없는 눈동자를 지닌 여학생 비서들을 끼고 있는 거구의 사내.
책상에 앉아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는 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우락부락한 근육질 거구와 사나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짙은 붉은색 머리칼은 짧은 스포츠형이었다.
붉은 코끼리 자리, 적상의 수장, ‘말록’이었다.
그 남자와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안경잡이 여학생은 쭈뼛대며 말을 이어갔다.
“무, 무조건 다른 성좌들보다 빨리, 선제적으로 포섭해야만 할 인물입니다…!”
적상의 정보 수집꾼으로 포섭되었던 안경잡이 여학생, 에바 하일로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상의 수장, 말록의 눈빛이 전해주는 압박감과 더불어 1학기 때의 기억이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었으니.
곧 있으면 4성좌는 일부 1학년 학생들을 자기 세력의 멤버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된다. 인재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1학기 때도 에바는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인재를 추천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인물의 이름은 언급할 수 없었다.
─ ‘웬만하면 네가 알게 된 건 비밀로 하렴. 안 그러면 도로시가 어떻게 해코지할지 모르니까.’
1학기 때 도로시 하트노바의 사역마, 하얀 고양이 엘라가 했던 말이 뇌리에 새겨졌다. 마치 마지막 경고라고 그녀의 직감이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방학 동안 에바는 이미 굳게 결심한 상태였다.
“아이작? 그게 누구냐?”
말록이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 처리와 턱을 괴고 있는 행동거지에선 거만한 성품이 엿보였다.
아이작이라는 이름을 말록이 처음 들어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1학년 사이에서만 여러 구설수에 올랐을 뿐, 2학년과 3학년 중에서 그 이름을 들어 본 자는 손에 꼽았으니까.
“그는…, 이레귤러 같은 존재입니다.”
성씨조차 없는 평민. 그 누구보다도 뒤처졌던 최하위, 최약체로 유명했던 남자. 아이작.
하지만 그는 단순한 열등생이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든지 냉대하던 압도적인 수석, 루체 엘타니아는 유일하게 아이작에게만 호의를 내보이고 있었고.
1학기 학기말 평가 때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과 삼석 시엘 카르네다스 또한 아이작의 편을 들었으며.
가장 놀라운 건, 메르헨 아카데미의 최대 전력인 도로시 하트노바도 아이작과 긴밀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
하물며 성장 속도는 어떠한가. 반 년 만에 마력량 E급에서 무려 C+급으로까지 오르지 않았는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경이로운 속도였다.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한 성장을 이루어낼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에바는 자신이 보고 알게 된 모든 것들을 말록에게 털어놓았다.
“…….”
말록은 에바의 설명을 듣고서, 굵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흥미롭다는 반응이었다.
* * *
“에바네.”
[뭐가 말이냐?]
<메르헨의 마법 기사> 「5막 1장, 4성좌」 .
이 파트는 이안 페어리테일이 4성좌의 초대장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5막 1장에선 사교회를 즐기고.
5막 2장에선 인간으로 위장한 허상의 리파와 친구가 되며.
5막 3장에선 4성좌 중 청랑의 일원으로서 적상과 대립하며.
5막 4장에선 독식의 하인켈이 난입해 이안과 결투를 벌인다.
지금은 5막 1장을 앞둔 상황이었다.
이안은 플레이어가 고른 히로인과 함께 사교회에 참석해 알콩달콩한 이벤트를 즐기고.
그곳에서 4성좌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4성좌는 빛 속성이라는 희귀 체질인 이안을 차지하고자 갖은 심리전을 벌이게 될 터.
‘이안은 이미 갈 데가 정해져 있지만.’
시나리오상 이안은 푸른 이리 자리, ‘청랑’을 선택하리라.
청랑의 수장, ‘레이 라스모르간’이 검술과 마법 실력을 두루 갖춘 올라운더이기 때문이다. 이안의 이상향이지.
아무튼.
사교회 때 파티장 중심부에서 4성좌는, 초대장을 받고 찾아온 학생들을 상대로 이벤트를 연다.
시간이 될 때마다 보물이 담겨 있는 공을 굴리는 식이다. 학생들이 마력을 흘려보내고 있으면, 보물은 끌리는 쪽을 선택해 알아서 궤도를 틀어가며 굴러간다.
보물에게 의지가 있다는 얘긴 아니다. 보물과 마력이 잘 공명되는 학생 쪽으로 공이 자연스레 이동하는 것이다.
이안 또한 보물을 얻게 된다. ‘케루빔의 목걸이’. 놈의 빛 속성 마법 위력을 증폭시켜 주는 액세서리다.
그런 아이템이 고작 학생들 간 이벤트 보상으로 주어지는 까닭은 간단했다.
그냥 남들 보기에 값 좀 나가는 예쁜 장신구일 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보물이었던 것.
여태 아카데미에 빛 속성이 나타나질 않았었으니, 그 보물 또한 진정한 빛을 발하지 못했던 것뿐.
마족이 착용하면 ‘타락 천사의 목걸이’로 변모해 마족이 가진 힘을 증폭시켜준다. 이를 알아챈 일부 지능 있는 마족들은 2학년 파트에서 이안의 ‘케루빔의 목걸이’를 뺏으려 든다.
뭐, 어찌 됐건 케루빔의 목걸이는 나한테는 쓸모없지만 이안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즉, 그 목걸이가 녀석 손에 잘 넘어갈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으리라.
밤. 중하위권 기숙사, 브릭스관.
나는 책상에 앉은 채 적상의 초대장 내용을 읽고 있었다. 편지지조차도 아름답게 치장된 채였다.
내가 ‘에바네’라고 독백하자, 빙설룡-힐드가 그게 뭐냐고 물어왔다.
녀석은 작고 얌전했던 새하얀 구체형 빛에서 화염처럼 일렁이는 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형체에는 연푸른색 눈이 내비치고 있었다.
내 마력량이 올라간 덕분에 형태도 변화한 것이었다.
“에바 하일로버. 적상의 정보 수집꾼. 걔가 내 정보 판 것 같다.”
[저번에 말했던 4성좌 이야기구나.]
편지지 내용에는 ‘아이작’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반 년 만에 마력량이 E급에서 C+급으로 급증한 유망주. 1학년임에도 5성급 마법을 성공시킨 재능꾼. 그런 당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적상은 결과물을 추구한다. 내가 아무리 다른 학생들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고 한들, 마력량은 C+급에 불과하다. 적상이 내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날 포섭하려고 적상 설득한 건 에바일 게 뻔하고.’
4성좌의 1학년 정보 수집꾼이 각각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적상의 정보 수집꾼은 에바 하일로버. 안경잡이 여학생이었다.
‘날 초대한 건 루체 때문이겠지.’
나와 루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야기가 간혹 구설수로 떠돌고 있긴 하나, 결국 1학년 사이에서만 나도는 헛소문에 불과했다.
아마도 적상은, 나를 끌어들이면 루체도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올 줄 안 모양이었다. 에바의 설득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
‘…진짜로 그럴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루체가 날 따라오는 그림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참고로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루체는 그 어떤 4성좌에도 들어가지 않았었다. 4성좌에 들어가면 행동의 자유를 제약 받을 테니까.
그야말로 고고한 수석이었다.
“…….”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곰곰이 생각했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단련에 매진하려고 사교회에 불참석하려 했다. 단지 이안이 케루빔의 목걸이를 잘 얻었는지만 [천리안]으로만 확인해 볼 계획이었다.
이 파트에서 마족이 끼어 든다거나, 특별히 위기가 조성될 일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시나리오가 안정적으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생각이 안일했어.’
내 목표는 모든 배드 엔딩을 막아내는 것. 언제나 주요 시나리오 진행에는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어야 했다.
게임 지식을 기반으로 지금부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생각해 본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최악의 최악까지 상정하자.
그렇게 행동 방침을 머릿속으로 정립했을 때, 빙설룡이 질문을 던져 왔다.
[앞으로 어쩔 셈이냐? 4성좌 눈에 띄는 건 원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더냐?]
빙설룡하고는 학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악신을 쓰러뜨린다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직 말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건 많이 알고 있는 상태였다.
“우선 조사부터 할 거야. 내가 염려했던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같은. [천리안]이 있으니까 본거지 같은 거 훑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겠지.”
단순히 에바 하일로버가 내 정보를 판 데서 그쳤는지.
1학년 2학기 빌런인 독식의 하인켈, 허상의 리파가 사라지고 어떤 위험한 변수가 창출되지는 않았는지.
사교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조사해볼 필요가 있었다.
“먼저 예복부터 빌려야겠다. 사교회 다가오면 재고 다 털릴 테니까 미리 빌려야 해.”
[이 시대의 예복…! 흠흠, 나도 입어보고 싶다만.]
“…미안한데, 형태 갖춰지면 그때 한 벌 맞춰줄게.”
[……!]
[ 빙설룡-힐드 ]
심리 : [ 예쁜 드레스를 입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
빙설룡은 불꽃 형태임에도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차피 형태가 갖춰져도 용일 텐데, 드레스에 뭘 그리 욕심을 내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녀석도 성별은 암컷이니 이해해주기로 했다. 나중에 아기용 형태라도 되면 개량형이라도 맞춰줘야겠다.
그리고 사교회가 시작되기 전, 4성좌를 조사한 끝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시나리오가 크게 뒤틀려 버렸음을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