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3 아이작 쟁탈전 (1)
“조금 분위기 흐렸네, 미안해.”
나와 도로시는 팔라스관 밖으로 나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밤공기는 서늘한 편이었다.
팔라스관 주위론 발광 램프로 이루어진 가로등이 은은한 불빛을 비추고 있었고.
주위를 둘러싼 화단이 다채로운 마나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크흑! 끄흐흐흐….”
어색한 헛웃음을 흘리며 침울해져 있는 도로시에게 미안하게도, 이제 더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레이젤이 털리는 모습이 너무 통쾌하고 웃겼으니까.
“회장? 왜 웃어?”
“그놈, 아주 제대로 내다 꽂혔잖아요. 와, 진짜 선배 최고…!”
흠칫 어깨를 떠는 도로시.
그녀는 내게 눈길을 돌리고서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능청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흐. 사람이 내다 꽂혔는데 웃기야? 너무하네~.”
장난스러운 투.
도로시는 내 반응 탓인지 기분이 풀어진 듯했다.
‘오오.’
아까도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니 도로시는 오늘따라 꾸미기에 유달리 힘을 주고 온 티가 났다.
내 최애캐 미모가 빛을 발한다. 누나, 나 죽어.
아무튼, 도로시가 나 때문에 화내준 상황이었지.
학기말 평가 때의 루체처럼 내 애정캐가 나를 위해 화내줬다는 사실 자체가 전해주는 뿌듯함이 있었다.
기분이 무척 들뜨고 만다. 그만큼 도로시에게 나는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도로시 씹덕 인생,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음?’
미소 짓는 도로시. 뺨이 꽤 빨갛다. 은근한 술 냄새도 풍겨 왔다.
“근데 선배, 술 많이 마셨어요?”
“많이는 아니구, 회장 기다리는 동안 쪼금? 누나 살짝 취했어!”
“그러고 보니 혀 조금 꼬이셨네요.”
자세히 들어 보니 그랬다. 술 취한 여성 특유의 애교가 느껴지는 어투였다.
“그럼 뭐, 이제 어쩌실 거예요? 3관에 다시 가는 건 분위기상 어렵겠고. 1관은…, 음. 2관이 더 예쁜 것 같으니까 2관으로 갈까요?”
1관은 이따가 학생회장 앨리스가 나타나 파티를 즐길 장소다.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좋긴 한데….”
도로시는 고개를 들어 팔라스관 첨탑 쪽을 가리켰다.
“저기는 어때?”
“저긴 파티장이 아닌데요?”
“괜찮잖아, 바람도 선선한 편이고.”
“……!”
이럴 수가.
조용히 둘이서만 놀자는 건가?
“당장 갑시다.”
“니히히, 좋아!”
차라랑──.
내 주위로 별무리가 일었다. 온화한 별 마나가 신체를 감싸돈다.
차츰 몸이 가벼워진다.
무중력 상태라도 된 것처럼 나와 도로시의 몸은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고.
주위로는 형형하게 빛나는 별무리가 아름답게 일어났다.
“선배.”
다채로운 별무리 속에서 나는 도로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에스코트해줄 요량이었다. 이미 내 쪽이 지켜지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구실을 갖출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멀뚱히 내 손을 쳐다보는 도로시. 이내, 그녀는 내가 손을 내민 연유를 이해했다는 듯 환하게 미소지었다.
도로시는 내 손에 슬며시 자기 손을 올렸다.
낭창낭창하고 여리여리한 고운 손. 굳이 맞잡지 않고, 손만 올린 채 실실 웃고 있는 도로시.
그대로 우리는 별 마나의 힘으로 팔라스관 첨탑을 향해 올라갔다.
첨탑 위. 생각보다 걸을 곳이 많아서 놀랐다.
게다가 마석이 박혀 있는 구조물들이 아름다운 빛깔까지 뽐내고 있었으며.
주위로는 형형한 빛깔의 메르헨 아카데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답지만 떨어지면 뒤지겠군.
팔라스관 내부 음악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와 또렷하게 들려왔다. 분위기 꽤 괜찮네.
“이런 덴 새롭지?”
나와 도로시는 난간에 걸터앉은 채 아카데미 전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혹여나 누가 부주의하게 떨어지더라도 그녀의 별빛 마법이 있으니 안전했다.
“네, 처음 와봐요. 분위기 괜찮네요.”
“여기, 꽤 낭만 있다구? 작년엔 혼자 왔었는데 오늘은 둘이네.”
“영광입니다.”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 내 표정은 꽤 풀어져 있겠지.
“회장.”
“네.”
“회장은 항상 힘들게 무리하잖아. 오늘은 처음으로 쉬는 날이지? 평소의 단련충 마인드도 내려놓고.”
“네, 제 의지로 쉬는 건요.”
“니히히, 오늘 누나가 해 줄 수 있는 건 웬만한 건 다 해 줄게! 회장 힘낼 수 있도록!”
이미 존재 자체로 힘이 됐지만.
그런 말까지 하면 너무 나대는 듯하여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말았다.
“우선, 누나가 뭐 해줬으면 좋겠어?”
때마침 팔라스관 내부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감미로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히로인과 춤추던 때였다.
파티장 내부에선 무도가 시작됐으리라.
“춤이라도 출까요?”
“좋아! 추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기 적당한 자리에 서서 마주보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막상 달밤에 단둘이서 야외 무도회를 벌이려니 약간 오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로시의 얇은 허리를 감싸고, 한 손을 슬며시 맞잡은 채 설렁설렁 춤을 추기 시작하니 느낌이 썩 괜찮았다.
음악 볼륨도 상당히 높아서 그리 어색하지도 않고.
달밤도, 주위의 풍경도 심미감이 넘쳐난다. 어째 분위기에 심취해가는 기분이었다.
“나, 기분이 좀 들뜨는 것 같은데.”
도로시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나비처럼 살랑살랑 흐르는 선율에 맞추어 조금씩 스텝을 밟아나가고.
도로시는 배시시 웃으면서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회장, 나 해 보고 싶은 거 생겼어.”
“…뭔데요?”
“회장이 이제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단련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쯤 말이야.”
“네.”
“그, 레겔이 크로와상 그렇게 맛있다고 유명하더라구. 누나랑 같이 가서 먹어보자.”
“좋죠. 완전 맛있겠네.”
“아, 그리고 그거 알아? 아스트레앙 공작령에 있는 프레이 호수 엄청 예쁜 거? 책에서 봤거든. 거기도 같이 가 보자.”
“얼마든지요. 요깃거리는 제가 챙겨 갈게요.”
“메델누크의 반투스 숲 안에 있는 이끼 숲이 그렇게 예쁘대.”
“같이 가요, 나중에.”
“니히히, 그리고 또….”
한동안 도로시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처럼 보였다.
서서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걸 정리해나가던 도로시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즐겁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미래 계획이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지녔는지를 내심 느끼고 만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도로시의 본심일까.
술에 취해서, 그나마 마음을 열어 준 상대가 그녀 앞에 있어서 이리도 솔직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도로시는 공식 히로인이 아니었던 탓에 비중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나로선 도로시의 본심을 명확히 알 방도가 없었으니.
그저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의 말에 맞장구쳐주며,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머릿속에 새겨두는 것뿐이었다.
“그니까 누나 먼저 졸업해도 계속 봤으면 좋겠다, 회장.”
춤을 멈추고 지근거리에서 나를 쳐다보는 도로시에게, 나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전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그러네. 회장은 내 팬이니까.”
도로시는 배시시 웃었다.
“괜한 걱정 했네.”
도로시는 다시 내 품에 들어와 나와 발을 맞추었다.
* * *
기이한 현상이었다.
수시로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아이작을 향한 마음을 한껏 표현해온 카야다. 그럴 때면 마치 누군가에게 몸을 맡긴 것 같은 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더는 몽유병처럼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고.
카야의 머릿속엔 애교 섞인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아이작 님, 멋있어.’
─ [아이작 님, 멋있어.]
─ ‘…응?’
환청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다.
카야의 또 다른 인격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고서 카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자아가 생긴 것이다.
아마도 이제까지는 적응기였는지도 몰랐다.
두 인격의 기억은 공유된다. 마음도 공유된다. 감각도 공유된다. 그저 인격 자체가 둘로 나뉜 것뿐.
남 같으면서도 자기 자신이나 다름없기에 오묘한 일체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엔 무서웠으나, 금세 익숙해졌다.
오히려 감사마저도 느껴졌다.
또 다른 인격은 자기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철철 넘쳐났고, 아이작에게는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카야는 또 다른 인격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흐아아….”
팔라스관 중심부, 아틀라홀. 4성좌 이벤트가 불의의 사고로 중단되며 파티장은 다시 밝아진 채였다.
게다가 4성좌 수장 중 한 사람, 말록 브라이어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오늘밤 4성좌 이벤트는 완전히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아틀라홀엔 상위권 학생들이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친목을 다지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파티의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학생들의 대화 주제가 주로 특정한 남자라는 사실.
“진짜 어떻게…. 아이작 제정신이냐? 갑자기 카야 님 뺨에 키스하다니…. 카야 님 당황한 거 봐봐…!”
“진짜?! 난 못 봤는데? 모,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건가…?”
“잠깐만, 뭔 말이냐 너희? 난 그놈이 리제타 님과 손잡는 거 봤는데, 웬 카야 님?”
“뭐, 뭐라고…?”
“니들 다 뭐라는 거냐? 그놈, 우리 케리드나 여신님께 찝쩍대지 않았어?”
“넌 또 뭔 개소리야?”
어째… 학생들의 기억이 영 맞물리지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 파티장 한가운데, 카야에게는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 악단의 음악 소리 따위는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까부터 쭉 양손으로 뺨을 가린 채 탄식만 줄줄 흘리고 있었을 뿐.
달아오른 체온이 가라앉을 기미를 안 보였다. 게다가 눈동자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비취색 눈동자. 본래의 카야였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기쁘지?]
바로 뒤에서 또 다른 인격이 어깨를 껴안으면서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악식의 인격이었다.
[설마, 아이작 님이 ‘네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제일 예뻐’라고 할 줄은 몰랐는데. 아흣, 나 어떡해. 좋아아.]
‘그, 그만해. 나, 죽겠어….’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아틀라홀 파티가 시작되고 주위가 어두워진 틈을 타.
아이작이 다가와 귓가에 대고 그리 달콤한 말을 속삭일 줄은 몰랐으니까.
정말로 갑작스러웠다. 악식의 카야는 한동안 아이작의 애틋한 눈과 마주하다가, 음흉하게 웃고는 평소의 카야를 불러왔다.
눈동자 또한 비취색으로 돌아왔던 카야. 그녀는 헛숨을 집어삼키고 양손으로 입을 확 틀어막았다.
그대로 아이작은 볼일이 있다며 출입문 쪽으로 떠나갔고.
카야는 기절할 것처럼 휘청거리고 말았다. 그렇게, 한동안 몸에 열이 올라 그 상태로 가만히 서 있던 것이었다.
사실은 질투의 말록이 처치되면서 환각에 빠졌던 기억이 가공된 것뿐이었으나.
카야에게는… 무척이나 생생한 기억처럼 머릿속에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이히, 아이작 님도 우리한테 호감이 있으셨던 거지. 열심히 꾸민 보람이 있네.]
‘후와아아아….’
[아이작 님께 키스하러 가자.]
‘어어?!’
입맛을 다시는 악식.
[우리는 지금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야. 이때 아이작 님 입술에 도장 찍어야지.]
‘그거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이작 님께?’
[하고 싶지 않아?]
마치 악마의 속삭임.
[난 미치도록 하고 싶은데.]
생각도, 행동도 과감하다. 어떻게 자신에게서 이런 인격이 만들어진 건지, 카야로서는 의문이었다.
‘…….’
첫사랑인 아이작이다. 그와 입을 맞추는 상상은 수도 없이 해 왔다.
아무리 부끄럽더라도, 카야는 악식의 물음에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카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단숨에 눈동자는 영롱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정말 솔직하지 못해.”
악식의 카야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면서 파티장을 떠나갔다.
한편. 팔라스관 벽면에 기대고 서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아름다운 파란색 드레스 차림. 예쁘게 땋아낸 로즈골드색 머리칼엔 몰포나비 머리띠와, 보석 같은 푸른 꽃 모양 머리핀이 아름답게 치장된 채였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이 죄다 그쪽으로 돌아갔다.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뽐내는 미모는 누구라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
마법학부 1학년 수석, 루체 엘타니아였다.
엘도르크 마탑과의 면담은 상당한 실익이 있었다. 당장에 아카데미에서 알아낼 수 없었던 실무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으니.
면담을 마치고서, 루체는 최상위권 기숙사인 샤를관에 돌아와 메이드의 손길로 치장한 뒤 팔라스관에 이르렀다.
예정대로였다면, 엘도르크 마탑과의 면담은 더 긴 시간 이어져야 했다.
하지만 루체는, 파티장에 참석해 아이작과 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엘도르크 마탑과의 면담에서 핵심 정보만 쏙쏙 빼먹고, 면담을 빠르게 끝낸 것이었다.
[돌아왔다, 루체.]
[벨로, 바람 같은 귀환!]
까마귀처럼 작은 검은 뇌조와 몸에 물 마나를 휘감은 작은 범고래 마수가 루체에게로 날아왔다. 뇌신조-갈리아와 벨로였다.
뇌신조는 루체가 내민 손목에 안착했고, 벨로는 그녀 주위를 떠다녔다.
그들은 아이작을 찾아달라는 루체의 명령에 파티장을 쏘다니고 돌아온 것이었다.
[아이작은 3관에 다녀간 모양이더구나. 얼핏 학생들이 하는 얘기를 듣기론, 파트너가 생긴 듯하더군. 같이 밖에 나갔다고 들었다.]
아이작에게 파트너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애당초 루체는 마탑과의 면담 탓에 아이작에게 파트너가 있는지조차 물어보지도 못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신적 타격은 피해갈 수 없었다.
“파트너…. 역시 있었구나. 아이작은 나 말고도 친구가 많으니까….”
루체의 은은한 목소리가 밤 공기를 울렸다.
그녀에게 친구는 아이작 한 사람뿐이지만, 아이작에게는 친구가 많다.
새삼 그 거슬리는 사실이 떠올라, 루체는 나지막이 혀를 차며 눈을 내리깔았다.
만약 아이작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면.
루체에게 아이작만이 있듯이, 아이작 곁에도 오로지 그녀 혼자밖에 없었다면.
그의 시간을, 마음을 독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루체의 속내에서 불현듯 커져 나갔다.
[그런데, 아이작이 밖에 나가기 전에 레이젤이라는 남자한테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뇌신조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헛숨을 집어삼켰다.
루체의 무감정한 눈빛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했기에.
“뭐라고 했어?”
나지막하고도 절제된 어조. 그러나 그 음성엔 얼음장 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루체에게 아이작이란 역린 그 자체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 수 없었던 소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게 된 사내니까.
그러니 누군가 아이작을 건드렸다면, 루체는 천불이 나 견딜 수 없게 돼버린다.
아이작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건 뇌신조도 마찬가지였으나, 루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말을 잘못 꺼낸 것일까. 뇌신조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벨로는 아이작의 난봉꾼 소식을 들고 왔다!]
“……?”
때마침 벨로가 끼어들었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뇌신조 처지에선 고마울 만한 일이었으나, 벨로가 꺼내든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루체는, 이번엔 당황한 얼굴로 벨로를 쳐다보았다.
[학생들 얘기를 듣기로! 카야 뺨에 키스하고, 리제타 손을 잡고, 케리드나에게 찝쩍댔다고 한다! 물론 다 누군지 모르겠다!]
“…….”
[그러고 바로 파티장 탈출! 제법이군, 아이작! 이 용맹한 범고래 벨로, 네 녀석을 다시 봤다! 우하하!]
벨로는 어린 남자아이 같은 쾌활한 목소리로 자기가 들은 바를 설명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들뜬 기색만 내보이고 있는 눈치 없는 범고래 마수.
루체에게서 거무스름하고도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벨로가 말을 이어갈 때마다 그 살기는 더욱 농도가 짙어져 갔다.
뇌신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루체의 눈가에… 짙은 그늘이 졌다.
괜히 학생들이 아이작을 주제로 그따위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을 터.
루체가 생각하기에 아이작이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꼬시고 다닐 위인은 아니지만.
필시 그렇게 보일 만한 일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리라.
[어쩔 셈이냐, 루체?]
뇌신조는 불안해하며 물었다.
“아이작, 찾아내야지.”
루체의 눈이 팔라스관을 훑었다.
자기가 없었던 사이에, 이 파티장에서 아이작은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녔고, 또 무슨 짓을 당했단 말인가.
레이젤에게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난봉꾼 이야기…. 루체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이는 기폭제가 되어 결국, 루체가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게 만들었다.
스윽.
미리 준비해 놨던 마도구가 루체의 소매 안쪽에서 튀어나온다.
작은 막대기. 발동되면 단숨에 마나가 흘러나와 상대를 포박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엘타니아 가문 차원에서 준비한, 루체의 마나로 이루어진 강력한 구속구였다.
“지금 아이작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아이작의 건전한 인간관계에 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다. 법과 도덕에 어긋나기 때문.
하지만 그가 뇌신조의 말처럼 얻어맞았고, 벨로의 말처럼 아무 여자한테나 들이대고 다녔다면.
조금 강제력을 동원하더라도 아이작이 제 곁에만 붙어있을 수 있도록 루체는 만들고 싶었다.
보호 본능, 독점욕, 친구를 향한 애정…. 그 모든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이고 꼬여있다. 그토록 루체가 아이작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아이작에겐 지금 파트너가 있을 텐데…. 무시하고 데려올 셈이냐?]
“응.”
루체의 단호한 대답에 뇌신조는 고개를 흠칫 떨었다.
“아이작도, 그 파트너란 사람도 다들 서로의 대체제가 있을 거잖아. 한 사람쯤 사라지든 말든 상관없는. 그런데 난 아니야.”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루체는 아이작이 너무도 보고 싶었고, 함께 있고 싶었다.
“나한텐 아이작뿐이야.”
루체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발을 옮겨 갔다.
우선, 한 놈부터 처리하고 아이작을 보러 가기로 그녀는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