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사교회 - 막간
─ ‘선배, 괜찮아요?’
─ ‘허탈하네. 똥 밟은 기분이야.’
케이프숄을 싸매고 자투리 단련을 위해 오른손에 [서리불꽃]을 피어 올렸다. 햇볕이 만연한데도 은근히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점심시간, 나비 정원 구석.
나는 지면에 앉아서 도로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도로시는 징계위원회 결정에 따라 14일 근신 처분을 받았다. 놀라울 정도의 경징계다.
그게 가능했던 건 메르헨 아카데미의 어느 징계 제도 때문이다.
사안에 따라 일정량의 벌금을 지불하면 징계 수위를 낮출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도로시에게 그 기회가 부여되었다. 나를 지켜준 행위가 정당했다는 게 그 근거다.
상당히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으나, 겔이 남아도는 그녀에게는 껌값에 불과했으리라.
‘그럴 줄 알았다.’
징계위원회의 결정 뒷면에는 자본주의 논리가 작용했으리라.
도로시와 학사 간에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희대의 천재가 재학 중이라는 사실을 사업 카드로 내놓으면 돈이 복사가 되는데, 그 애가 중징계를 받는다? 메르헨 아카데미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타격이 가겠지.
안 그래도 마족 출현 건 때문에 투자자들이 떠나고 있고, 교장 엘레나가 무릎이 닳도록 사정사정 빌고 다니고 있는 실정인데.
이러한 상황적 특수성까지 고려한다면, 아카데미 처지에선 도로시에게 중징계를 내리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도로시에게 답이 정해져 있는 선택지를 내놓은 것이다.
‘나로선 다행인 일이지.’
끝내 도로시는 “다음에 보자. 완전 즐거웠어!”라고 애써 기운찬 인사를 건네며, 학사 인력을 대동한 채 기숙사로 향했다. 애처로운 광경이었다.
경징계에 불과하다고 해도 징계는 징계다. 집게가 가슴속을 꼬집는 듯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가만히 은혜만 받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 도로시의 근신이 끝나면 감사의 의미로 그녀에게 선물을 주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도로시가 공식 히로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히로인 전용 아이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근신이 풀리기 전까지 무슨 선물을 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나저나….
‘진짜 허탈하긴 하다.’
도로시와 내내 놀기로 한 계획이 처참히 무너지다니…. 아쉬워 죽겠다.
물론 상황 자체가 싫었던 건 아니다. 예쁜 여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만을 원해? 분에 겨운 행복이지.
다만, 어제는 도로시랑 밤이 깊어지도록 놀고 싶었단 말이다….
‘됐다, 그냥.’
지나간 일을 한탄해서 뭐 하겠나. 다들 나를 좋아해서 벌인 일이니 어느 쪽을 미워하기도 힘들고. 그냥 도로시 선물이나 고민해봐야지.
그리고 불행 중 다행으로, 앨리스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내게서 관심을 껐다고 확정 짓는 건 확대해석이겠지만, 일단 나를 방해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나라도 그렇게 생각 못 하겠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나는 여자애들에게 마구잡이로 끌려다녔던 약골이나 다름없었으니.
방해꾼 치고는 심히 모자란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어쨌건 앨리스하고는 안면을 틔운 상황. 사려서 나쁠 건 없으리라.
‘나머지 상황은 잘 정리된 것 같고.’
아침에 마테오 조르다나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나리오 점검을 위해서였다.
정신을 차린 이안은 케루빔의 목걸이가 왜 자기 목에 걸려 있었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으나, 일단 4성좌에게 돌려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끝에 4성좌는 ‘보물이 제 주인을 찾아간 것뿐이고, 어차피 보물을 나눠줄 생각이었으니 돌려줄 필요가 없다’라고 했단다.
아직도 이안은 왜 케루빔의 목걸이가 자기에게로 온 건지 의문을 품고 있다는데, 마테오에게는 대충 얼버무려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으로, 내 정보를 팔았던 에바 하일로버를 찾아갔다.
4성좌 중 적상 멤버들은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는 말록의 환각 마법에 당해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즉, 말록이 처치된 이상 적상 멤버들의 기억 또한 가공됐을 터. 어떻게 기억이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히익!!’
나를 보자마자 에바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자빠지더니, 엉덩방아를 찧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 돌고래 초음파 같은 비명소리가 여전히 내 고막을 울리는 듯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두려움을 사본 적이 있었나? 웬만해선 나처럼 선량한 모범시민 같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을 터다. 나름 색다른 기분이었다.
어쨌든 에바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적상 멤버들은 말록이 수장이 되었던 기억 자체를 잃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단지 말록의 필체로 ‘수장 자리를 내려놓는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양피지만이 아지트에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양피지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스칼렛 아틀라스도 잘 돌아왔고.’
스칼렛 아틀라스는 적상의 이전 수장이다. 그 선배가 돌아와 수장 자리를 재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는 본래 <메르헨의 마법 기사> 「5막 3장, 청랑 V.S. 적상」 파트의 중간 보스 격인 비중 있는 선배다.
뭐랄까, 가끔 주인공이랑 싸우는 와중에 갑자기 사연 나오는 엑스트라들 있잖은가. 그런 유형이다. 조만간 이안과 맞붙게 되겠지.
‘소문도 잘 퍼졌어.’
내가 원하던 대로의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도로시가 나를 위해 레이젤을 찍어 눌러 주고, 나를 자기 파트너라고 선언해준 일 덕분이다.
이는 ‘도로시는 아이작 편이며, 아이작을 건드린 자는 쥐포 꼴을 면치 못하리라’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으리라.
‘내 최애캐,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게다가 ‘아이작은 지켜줘야 할 만큼 나약하다’라는 인식도 동시에 퍼졌기에, 내가 그 강인한 검은 괴물이라는 사실과는 동떨어져 보이게 된다.
나에 관한 소문이 걱정된다면 내가 원하는 소문을 퍼뜨리면 되는 일인 것. 도로시는 내 목적을 이루는 데 큰 힘을 실어 준 것이다. 그렇다. 도로시는 신이고, 나는 무적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아무 여자에게나 들이대고 다니는 성욕의 화신이라는 이상한 소문도 나돌기 시작했다. 가공된 기억 탓이다. 어차피 단발성 화젯거리에 불과한 것이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다. 나는 하렘을 좋아한다. 성욕의 화신이라고 한다면 나름 맞는 말이라, 내게 악영향만 안 준다면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단지 악신을 처치할 때까지만 욕구 따위를 억누를 작정일 뿐.
‘아무튼, 나머지 일이라도 잘 풀려서 다행이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건.
‘이건 언제 써먹냐.’
왼손에 쥐여 있던 낡은 은색 열쇠 하나를 위로 던졌다가, 떨어지는 그것을 휙 낚아챘다.
질투의 말록을 쓰러뜨리고 획득한 전리품, ‘의문의 지하실 열쇠’였다.
[의문의 지하실 열쇠]
: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이 스며 있는 열쇠. 어느 지하실의 문을 여는 데 쓰인다.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다.
등급 : 1티어
[※ 주의 : 사용할 시 수많은 죽음의 위협이 당신을 노려올 것입니다.]
‘지하실’이란 명칭이 쓰였지만, 흔히 연상되는 평범한 지하실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지하실이 명계니까.’
‘명계’. 이름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지만, 조오오올라 위험한 곳이다.
대신 잘만 하면 엄청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이안은 이 열쇠를 써서 명계로 떨어진 뒤, 자기 목숨을 노려오는 많은 적을 해치우며 경험치 파티를 벌였다.
그 전에 플레이어 자의대로 가버리면 게임 오버 당하기 십상이었고, 잘 버텨내도 성장 효율이 별로 안 났었지.
이동되는 곳은 명계 끄트머리. 가장 보잘것없는 구석이다.
여담이지만, 맵이고 상황이고 전부 굉장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난다. 진짜 재밌게 플레이했었지.
그리고 이 열쇠는 사용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 사라지고 마는데.
그 전에 마임맨 연기하듯 이 열쇠를 허공에 대고 열쇠 구멍에 꽂은 것처럼 돌리면, 열쇠의 힘으로 명계로 갔던 대상은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리하면 열쇠는 단번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린다.
사실상 열쇠의 형태만 갖추고 있는 소모성 공간 이동 주문서인 셈.
참고로 전술했듯 명계 구석으로 이동하는 지라, 웬만해선 ‘명왕’이나 이승과 저승에 구애 받지 않는 ‘원옥마수’들처럼 지랄 맞게 센 놈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마주치면 뒤지는데.’
당연히 마주쳐선 안 되지.
‘아무튼, 지금 이걸 써봤자 개죽음만 당할 뿐이지.’
좀 더 성장한 뒤에 나도 경험치 파티나 벌이러 가야지. 아직은 필요 없겠다.
생각 정리는 이쯤에서 끝내자. 이제 점심시간 단련에 돌입해야 한다.
[ 상 태 ]
이름 : 아이작
Lv : 76
성별 : 남
학년 : 1
칭호 : 학사 생활에 적응한 1학년
마력량 : 9000 / 9000
- 마력 회복 속도(B)
- 체력(B+)
- 근력(B+)
- 지력(B-)
- 정신력(A+)
[ 잠재력 ]
보유 스탯 : 0
◆ 성장 속도
- 신체 단련 효율(A-) : 70/100
- 마법 단련 효율(S) : 100/100
- 학습 효율(B+) : 60/100
보유 스킬 <<상세>>
[ 고유 특성 ]
- 멸악자
- 무기술사
어젯밤, 질투의 말록을 처치하면서 얻어낸 18 스탯 중 9 스탯은 [마법 단련 효율]에 투자했다. 덕분에 [마법 단련 효율]은 최고 수치를 찍었고, 고유 특성 [무기술사]가 생겨났다.
[무기술사]는 마도무기 숙련도를 수월하게 높이는 데 도움을 주며, 마도무기의 위력까지도 높여주는 고유 특성이다.
서리낫 같은 전설 무기엔 아무 효과가 없다는 제약이 있지만, 잔야의 지팡이에는 효과가 매우 뛰어날 터.
나머지 9 스탯은 [신체 단련 효율]에 투자했다.
예전에도 언급했듯, 강한 신체는 서리낫 같은 전설 무기를 다루는 데에도 큰 영향을 준다. 일단 전설 무기를 다루려면 몸이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 단련 효율]과 [신체 단련 효율] 둘 다 최고치까지 찍으면, 어느 고유 특성을 얻을 수 있다. 그 고유 특성의 효과 중 하나가 [무기술사]의 효과를 전설 무기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시나리오상 좋은 신체 능력이 필요한 순간들이 올 터. 미리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주먹을 쥐어 [서리불꽃]을 사그라뜨리고, 옆에 내려 두었던 잔야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새벽녘의 어스름과 노을빛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마석, 현자의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 역시 때깔 하나는 죽여주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잔야의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역시….”
어젯밤에도, 오늘 오전에도 느꼈지만.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잔야의 지팡이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마력 흐름이 눈에 띄게 온화해졌다.
이것이 고유 특성, [무기술사]의 효과. 실감이 팍 난다.
자, 이제 원소 마법을 퍼부어볼 때.
잔야의 지팡이 머리 부분을 앞으로 슬쩍 내밀고서 [서리불꽃]의 술식을 구현했다.
그리고, 차가운 불길을 발사했다.
────「서리불꽃 (얼음 속성, ★4)」
화아아악────!
제법 그럴싸한 냉기 화염이 터져 나왔다. 크흐, 볼 수록 감탄만 나오네.
언제쯤 다룰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 마도무기였는데….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나는 잔야의 지팡이로 원소 마법을 마구 써 보기 시작했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원소 화력], [원소 효율]이 향상된 감각이 무척이나 또렷하다!
“와아….”
한동안 나는 잔야의 지팡이가 가져다준 여운에 젖어 들었다.
이게 야쓰지.
* * *
만조다. 드넓은 하늘과 바다는 몹시 청아하다.
제르베르 황국 서해 위, 물고기잡이를 하던 건장한 어부들은 돌연 그림자가 길어지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음, 뭐여? 갑자기 그림자가…?”
“이봐, 저거 뭐야?”
“뭔데, 형씨. 왜 갑자기 표정이 굳…었….”
이내, 어부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제 눈에 담긴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대로 정지한 채 들고 있던 그물과 작살을 떨어뜨렸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수평선 위, 상공에 떠있는 신비로운 섬 하나.
너른 하늘이다. 그곳에,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무언가가 아로새겨진 듯 가만히 떠있었다.
“저게… 대체 뭐시여…?”
그건 요새였다.
섬이었다.
멸망의 전조였다.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먼 옛적부터 어느 날 갑자기 상공에 나타나 나라를, 대지를 파괴하고 금세 어디론가 사라지곤 하는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서 황국 역사에 제 자취를 남겨두었고.
다시금 나타나 이 드넓은 천공에 제 존재를 각인시키며, 광활한 바다를 관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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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관악기에 긴 숨을 불어넣듯, 기이한 울림이 천지에 퍼져나간다. 마치 제 존재를 알리는 울음소리 같다.
부유섬.
그것이 다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