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합동 실습 평가 (5)
신분차별주의자.
자신이 그리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 멜트런은 신분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다는 자신의 입장을 꺾지 않는다.
평민이란 생활 수준, 지식 수준, 모든 게 열등하니까. 반면, 귀족은 철저한 교육을 받아 신분에 걸맞은 기품이 넘쳐흐른다.
학창 시절, 자신을 따돌리고 조롱하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던 자들.
조교수 시절, 자신의 논문을 훔쳐 달아났던 도둑놈도.
술집에서 자신의 연인에게 손찌검을 날렸던 비열한 자식도, 모두 평민이었으니.
이 나라에서 신분이 나뉘게 된 건 철저한 합리성 속에서 비롯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평민이란, 대부분 귀티와 기품이 넘치는 귀족과는 궤를 달리해도 한참 달리하는 놈들이다.
설령 소수의 예외가 있다고 해도, 원칙은 그토록 분명한 것이었다.
그런 신념을, 필립은 갖고 있었다.
「불 생성 (불 속성, ★1)」
화르르르르르르륵──!
필립 교수로부터 사나운 불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왔다.
지면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넓은 동굴을 장악하는 화염.
그러나.
「바람 생성 (바람 속성, ★1)」
휘우우우우우우──!!
카야의 바람이 더욱 격렬하게 휘몰아치며 필립 교수의 화염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어, 필립 교수가 치켜든 완드에서 연붉은빛 마법진이 구현되고.
카야의 바람과 대립하던 불길이 맹렬하게 일며 파도처럼 전장을 뒤덮으려 했다. 홍파의 화염이 들이닥친다.
「불바다 (불 속성, ★4)」
화아아아아아악────!!
카야의 바람이 삽시간에 밀려났다. 그러나 질 생각은 없었으니. 한껏 마력을 끌어올린다.
「돌풍 (바람 속성, ★4)」
휘우우우우우우우───!!
격한 바람이 불바다와 맞부딪치며 치열하게 힘을 겨루었다. 카야와 필립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열풍에 사납게 흔들렸다.
완드로 서로를 가리키며 마력을 쏟아 내는 두 사람. 불길은 넓게 퍼져나가며 서로의 시야를 차단했다.
“차석답게 실력은 봐줄 만하네만, 그뿐이라면 아쉬운 바네.”
느껴진다.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은 지금 최대 출력으로 마력을 쏟아부으며 대항해 오고 있다.
1학년이라고는 믿기 힘든 바람 마법의 위력. 훌륭한 재능이다. 훗날, 그녀는 필립 자신보다도 월등히 강해질 터.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강하다 한들, 한낱 1학년생에 불과할 뿐.
필립은 거세게 마력을 쏟아부었다.
카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완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바람은 애석하게도, 필립의 화염에 야금야금 잡아 먹혀갔다.
그때.
“……?”
아이작과 체고 2m 크기로 몸집을 키운 골렘 사역마, 이든이 카야의 오른편으로.
리제타와, 풍성한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는 바위 갑옷를 둘러싼 숫사자 사역마 제프가 카야의 왼편으로 흩어졌다.
필립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시선을 분산시킬 셈이구나.
“리제타!”
아이작의 외침과 함께, 그와 리제타 주위로 연갈빛 마법진이 새겨졌다.
「암석 붕괴 (바위 속성, ★4)」
쿠우우우우우───!!
양옆. 황색 바윗덩어리가 튀어나와 필립을 향해 줄기처럼 뻗어나간다. 사람 몸 따윈 가볍게 뭉개버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 속도.
알량한 노림수였다. 필립은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 정도론 무의미하네. 막게나, 스테고.”
필립 주변에 마나가 응집되더니, 그의 키 만한 회색빛 골렘의 형태로 변모했다.
스테고. 5성급 바위 속성 사역마. 바위로 이루어진 몸체는 인간의 형상과 비슷했고, 두 눈은 녹색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두루룩!!]
스테고는 굵직한 울음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팔을 뻗더니, 두꺼운 바위의 벽을 지면에서 끌어올렸다.
「암벽 (바위 속성, ★4)」
쿠웅───!!
아이작과 리제타의 바위가 스테고의 방어막과 격돌했다.
리제타 쪽의 [암석 붕괴]는 스테고의 [암벽]을 부숴냈으나, 동시에 그녀의 바위까지 조각조각 박살 나 허공에 비산하고.
흩어지는 바위 조각이 가볍게 화염 바람에 휩쓸린다.
「화염구 (불 속성, ★3)」
화르르륵! 콰앙! 콰앙! 콰앙!
필립의 반격. 직경 3m의 [화염구] 연발이 아이작과 리제타에게 속사포처럼 퍼부어졌다.
아이작은 이든이 펼쳐 낸 바위 방어막으로 막아냈고, 리제타는 숫사자 사역마 제프를 타고 내달리며 [화염구] 연발을 피해냈다.
부동. 필립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작과 카야, 리제타의 맹공은 가뿐히 막아 낼 수 있었으니.
휘우우우우우!!!
“흐음?”
카야의 바람이 거세졌다.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날다람쥐 사역마의 바람 마법이 가세한 까닭이었다. 방심할 수 없는 소녀다.
카야의 바람에 대항해, 필립은 화염의 기세를 드높였다.
“끄으!”
무겁다. 카야는 이를 악물었다. 필립의 화염과 힘겨루기를 하여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었다.
숨 막히는 열기가 동굴을 가득 메운다. 화염을 휘감은 연녹빛 바람이 사방에서 휘몰아친다.
시야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 거센 화염이 아이작 일행을 아슬아슬하게 몰아세웠다.
덜컥─! 쿠웅─!
구석에 숨어 있던 전달꾼에게까지 화염 돌풍이 짓쳐들었다. 동그란 마도구는 잿더미 고물단지가 되어 땅에 툭 떨어졌다.
필립은 눈을 지그시 깜박였다.
이토록 대규모로 몰아치는 화염의 바람을 뚫고 습격해 오리란 어려운 일일 터.
필립은 완드를 지휘봉처럼 가볍게 휘둘러 화염을 퍼뜨렸다. 목표는 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아이작과 리제타였다.
“…뭐?”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약한 자의 마력이 엉뚱한 위치에서 느껴졌다.
위쪽.
필립은 고개를 들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화염의 격풍 너머로, 천장에 한 남자가 발을 얼음으로 고정시킨 채 박쥐처럼 매달려 필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손에 압축된 얼음 마나와 그 앞에 구현된 복잡한 연푸른빛 술식.
어떻게 저 위에 이르렀는가? 해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골렘 사역마, 이든이 순수한 힘으로 그를 날려 보냈을 터.
아까까지 들고 있던 지팡이는 걸리적거렸는지 이든에게 맡겨둔 채다.
마법진의 형태를 보자니 아이작은 5성급 마법, [빙결 폭발]을 시전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아이작의 발을 고정시켰던 얼음이 풀린다. 그의 몸이, 서서히 필립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화염을 뚫을 셈인가?’
사방팔방으로 화염을 휘감은 돌풍이 거칠게 몰아치고 있다. 통구이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이 불바람을 뚫는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 없었다.
즉, 필립에게 [빙결 폭발]을 먹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이작의 목표는 필립이 아니었다.
“……!”
아이작은 화염의 돌풍을 향해 팔을 뻗었다.
오른손에 원형으로 응축되어 찬연한 연푸른빛을 발하고 있던 얼음 마나 덩어리가, 이내 터져 나왔다.
──────「빙결 폭발 (얼음 속성, ★5)」
콰아아아아아──────!
사나운 얼음 폭발과 맹진하는 거대 빙괴가, 고열의 화염과 격돌하며 화염 일부를 잠시간 몰아내었고.
대량의 수증기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폭발하듯 주위로 퍼져나갔다.
“으윽!”
수증기 폭발에 아이작의 몸이 뒤로 날아가자, 골렘 사역마 이든이 뛰어올라 그를 받아내었고.
“허?”
돌연, 힘겨루기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카야가 바람을 푼 것이었다.
힘이 실려있던 필립의 화염이 모조리 카야에게 쏟아졌으나, 그녀는 자신에게 강한 바람을 일으켜 몸을 날리듯 동굴 구석으로 도망쳤다.
담녹색 머리카락 끝이 살짝 타버렸다.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냉기 발산 (얼음 속성, ★2)」
부우우욱────!
그 틈에 아이작은 이든에게서 잔야의 지팡이를 돌려 받고, [냉기 발산]으로 하얀 냉기를 단번에 안개처럼 퍼뜨렸다.
[냉기 발산]. 얼음 속성 마법사들이 시야 차단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기초적인 원소 마법.
필립은 머리 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낀 것 같다고 느꼈다.
콰아아앙────!
화염에 채 녹지 못한 거대 빙괴는 지면에 추락해 와르르 부서진다.
‘뭔가….’
전투의 흐름이 필립에게 위화감을 전해주었다.
아이작이 일부러 시야를 가리려는 듯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카야가 힘겨루기를 포기했다는 건.
‘미리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쿠우우우우우우우!!
화염이 채 냉기를 몰아내기 전, 필립은 거대한 무언가를 눈에 담았다.
격한 파공음을 내지르며 위압적으로 공기를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한 얼음덩이.
그것은 카야의 세찬 바람 마나를 추진력 삼아, 희뿌연 냉기를 휘감은 채.
하얀 운석이 되어 무서운 속도로, 사선으로 필립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동굴 구석, 아이작은 잔야의 지팡이를 들고 얼음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수증기로 원소 시너지를 끌어내 삽시간에 거대 얼음덩이를 만들어 낸 것인가.
수증기를 일으킨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평민 치곤 칭찬해 줄 만하다.
냉기를 휘감은 건 열기 속에서도 거대한 얼음덩이가 녹지 않도록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겠지.
물론, 대단한 쪽은 카야였다. 저만한 얼음덩이를 컨트롤하며 추진력을 부여하는 데에는 마력 소모량이 어마어마한 건 물론이요, 뛰어난 마력 컨트롤이 필요하니까. 과연, 차석 다운 실력이었다.
전투로 돌아가서.
마력이 느껴지고 있는 쪽은 카야와 아이작뿐. 지금 이 순간, 리제타에게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틈을 노리고자 전황을 살피고 있다는 얘기다.
즉, 저 얼음덩이는 카야와 아이작 둘만의 합작이라는 뜻. 아이작의 얼음과 카야의 바람으로만 이루어진 합동 공격일 터였다.
필립은 여유롭게 조소를 띠며 마력을 쏟아냈다.
자신은 불 속성. 저런 공격은 쓸데없는 마력 소모에 불과하다.
어차피 저들이 자신을 이길 일은 없으리라, 그는 확신했다.
그는 합을 맞춰주면서 저들을 압박하고, 건방진 평민 놈한테 고통 좀 주다가.
전부 탈락시킬 작정이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
거의 코앞에 다다랐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적절한 때. 찰나의 순간이었다.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으나, 본능적인 판단이 있었다. 불은 얼음을 녹인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성 우위의 논리.
그 판단과 필립의 강한 승부욕이 일렁이며, 그의 다음 행동을 결정지었다.
필립은 완드로 희끄무레한 냉기를 휘감은 하얀 운석을 가리켰다. 그러자 완드 앞에 연붉은빛 마법진이 발현되었다.
───「폭굉 (불 속성, ★4)」
콰아아앙!!
마법진으로부터 화염을 머금은 충격파가 터져나와 얼음덩이를 한 차례 깨부수고.
───「화염 폭풍 (불 속성, ★4)」
화르르르르륵───!!
동시에 화염을 휘감은 폭풍이 터져 나온다.
화염이 맹렬한 기세로 쏟아져, 돌격해 오던 얼음덩이를 집어삼키고, 뜨거운 열풍을 주위로 퍼뜨렸다.
카야의 바람과 두 번째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얼음덩이를 밀어내며, 빠른 속도로 차츰 녹여간다.
‘가볍게 태워주겠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문득 시야에 내비친 아이작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흐르고 있음을, 필립은 알아챘다.
“······!!”
녹아가는 얼음덩이는 점차 크기가 작아져 카야가 좀 더 다루기 용이한 형태로 변모한다.
그것은 [화염 폭풍]을 뚫고, 그 화염을 휘감은 채 여전히 필립에게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 크기가, 기세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얼음덩이 안에 감춰져 있던 고체가 모습을 내보였다.
황색 바위였다.
“스테…!”
이미 늦었다.
1성급 얼음 속성 마법, [얼음 생성].
2성급 얼음 속성 마법, [냉기 발산].
4성급 바람 속성 마법, [돌풍].
그리고, 3성급 바위 속성 마법, [낙석].
온갖 마법의 결합체였던 운석은, 막아낼 틈조차 없이 필립을 덮쳤다.
────────────────「겨울 운석 (바위+얼음+바람 속성)」
콰아아아아아아앙────────!!!
화염과 얼음의 격돌로 격한 수증기가 일었고.
바위와 지면의 충돌로 굉음과 함께 화염과 먼지바람이 난잡하게 휘몰아쳤다.
거대한 얼음덩이에 냉기와 고도의 컨트롤이 요구되는 [돌풍]을 덧대어 완성되는 합동 공격, [겨울 운석].
그 안에 리제타의 고밀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바위가 숨겨져 있었다.
아이작, 카야, 리제타는 팔로 얼굴을 가리고 폭발의 여파를 견뎌냈다.
넓은 동굴은 순식간에 희뿌연 연기로 들어찼으나, 이윽고 연기는 사그라져갔다.
[겨울 운석]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는 것도 그 무렵이었다.
[두루룩, 두두룩···.]
짙은 고요 속에서, 골렘 스테고의 무미건조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녹색 안광이 사그라지고, 몸의 기능이 정지한다. 기절한 것이었다.
그 옆에 필립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피부에 덧대고 있는 [기초 보호 마법] 덕분에 충격이 완화되었으나, 이미 그의 몸 상태는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카야의 바람으로 가속도가 붙었던 리제타의 바위에 직격당했으니.
“끄허억….”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필립.
이미 당하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는 알아챘다.
[겨울 운석].
카야와 필립이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리제타는 [낙석]을 써서 마력 밀도가 높은 바위를 만들어 놨던 상태. 카야의 바람이 그것을 받치고 있었으리라.
아이작과 리제타의 바위 공격 연격은 마력 감지로 그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을 터.
아이작은 수증기가 터져나오는 틈에, 리제타가 만들어냈던 바위를 삽시간에 얼린다. 이때, [원소 시너지]가 발휘되어 평소보다 더욱 두꺼운 얼음이 씌워진다.
그리고 카야의 바람이 그리 만들어진 고체 덩어리에 추진력을 얹어 준 것이다.
[겨울 운석]에 [냉기 발산]을 지속해서 일으킨 목적도 명확했다. 새하얀 냉기를 덧대면 얼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우니까.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나···?’
필립은 입술을 짓씹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지면을 턱 짚었다. 이렇게도 처참하게, 단시간에 자신이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마치 처음부터,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턱─.
바로 앞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그림자가 드리웠다.
필립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모인 학생들을 눈에 담았다.
청은발의 평민, 아이작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웃고 있었지. 마치 처음부터 이리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전부, 네 계획대로란 거냐…?’
분노가 치밀었다.
학생, 그것도 평민인 놈의 같잖은 계획에 놀아났다는 사실이,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필립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심지 깊숙한 곳에서부터 격한 거부감이 용암처럼 분출한다.
“교수님.”
아이작은 쪼그려 앉고서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사실 아이작에게는 필립을 낚아내기 위한 여러 묘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단지 첫 번째 시도에서 필립이 걸려들었음을, 그 자신은 모르고 치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고작 그 뿐이었으니, 아이작은 안도할 마음조차 들지 않고 있었다.
‘왜 내가··· 이런 평민 놈과··· 이런 눈높이를···?’
치욕감과 분노가 한껏 뒤얽히고 있던 필립에게, 아이작은 말했다.
“저희가 이겼습니다.”
“…평민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있구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평민 놈. 이딴 놈한테 자신이 굴복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필립의 마음은, 터져 버렸다.
“감히!!”
필립과 아이작 사이로 연갈색 마법진이 구현되었다.
바위 속성 5성급 마법. 거대한 바위 송곳이 지면과 벽면에서 튀어나와 일제히 아이작을 노리자─.
“······!!”
필립 교수의 몸 아래서, 단검용 검은 검집 하나가 빛을 발했다.
콰아아아아아─────!!
검집은 폭발적으로 빙결을 토해냈다. 삽시간에 뾰족한 얼음덩이가 생겨나고, 넓은 동굴 안엔 잠깐의 한파가 들이닥쳤다.
차가운 폭발이 필립의 몸을 날리고, 허공에 붕 떠오른 그의 몸을 삽시간에 빙괴 속에 가둬버렸다. 놀란 얼굴로 혼자서만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
“정당방위로 치죠.”
아이작은 [빙결 폭발]의 여운처럼 희뿌연 냉기를 흘려보내는 재해의 검집을 주워 들며 말했다. 별 수 없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가 쪼그려 앉았던 건 재해의 검집을 몰래 필립 쪽에 두기 위함이었던 것. 고지식할 정도로 승부욕이 강한 필립이 돌발 행동을 벌일 것까지도 아이작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필립의 열기로 들어차 있던 동굴은 이제 아이작의 한기만이 가득했다.
아이작은 나지막한 한숨으로 새하얀 입김을 담배 연기처럼 흘려보냈다.
이내, 얼음 마법의 흔적을 풀었다. 빙괴는 쩍쩍 갈라지더니 푸른빛 가루가 되어 한풍에 흩날렸다.
“으억….”
털썩.
필립의 몸이 다시 지면에 떨어진다.
피투성이 몸으로, 그는 끝내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