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 합동 실습 평가 (7)
동굴은 서리와 냉기로 뒤덮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2학년 청은발의 여학생, 이브 로펜하임은 방금 전까지 보았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브 자신보다 훨씬 강한 여학생들과 능숙하게 합을 맞추며 필립 교수를 상대하던 아이작.
5성급 마법도 거뜬히 사용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서 네 번째 관문을 유유히 통과했다.
이제는… 저게 정녕 제 동생인가, 하고 의심마저 들 정도.
이브는 아이작 일행을 몰래 뒤쫓았다.
전달꾼이 망가져 버린 탓에 학사 인력이 오고 있겠지만, 당장에 그녀를 감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콰앙!
멀리서 지면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흠칫 놀랐으나.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천천히 동굴을 걸어 나갔다.
“……!”
이브는 멈칫했다.
오싹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바람처럼 피부를 쓰다듬고 지나갔으니.
더 나아가자 지면에 뚫려 있는 구멍이 보였다.
그 아래쪽을 살피기 전.
“헉…!”
꾸물꾸물, 거리며 무언가가 구멍 안쪽을 뒤덮는 광경을 이브는 목격했다.
콰르르르륵──!
레드와인처럼 진하기도, 루비처럼 아름답기도 한 섬뜩한 마력.
이브로선, 몹시도 공포스러운 미지의 무언가처럼 보였다.
“끄흡!”
이브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참아냈다.
대체… 아래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잠잠해졌다.
이브는 조심스레 구멍을 살폈다. 밑을 내려다 보니 그저 평범한 동굴의 전경만이 시야에 내비치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이브는 마른침을 삼켰다.
구멍 아래, 고요한 공간에… 위험한 무언가가 있었다.
* * *
고유 특성 [멸악자]가 풀리자 몸이 다시 무거워지고 마력이 확 줄어들었다.
뭐랄까, 건장한 청년이었다가 폭삭 늙어 버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띠링─♪
‘레벨 업’ 시스템 창이 나타나자 손으로 휙 저어 날려 보냈다. 개구리 마족을 쓰러뜨리는 데 내가 가장 크게 활약했으니 경험치는 온전히 들어왔을 터.
그리고, 아이작의 친누나는 여기까지 미행하진 못했으리라. 네 번째 관문 통과자가 아닌 이상 전달꾼이 막아섰을 테니까.
즉, 이제 신경 쓸 건 하나뿐.
‘얘가 문제네.’
악식의 포식 행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카야는 악식의 그녀다. 어째서 악식이 카야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버렸던 것인지,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본편에서 악식의 카야는 마족을 맛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악식의 습성이 대놓고 드러나지 않았어도.
카야가 마왕이 되는 배드 엔딩 「마왕」을 보면 악식의 습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악식, 그 이름대로 악식의 카야는 뭐든지 잡아먹고 힘을 키워내는 최악의 마족이었지.
‘지금의 카야는 무상의 엘페르트를 잡아먹은 상태고.’
반려동물이었던 선량한 강아지가 피 맛을 봐버리면 야생동물로서의 본성이 꿈틀대듯.
카야 또한 마족을 맛보고, 마족에게 식욕을 느끼는 악식으로서의 본성이 드러난 것임이 틀림없었다.
즉.
‘악식이 카야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버렸던 게, 식욕을 느껴서?’
악식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던 것.
요새 카야가 식욕은 느끼면서 포만감은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카야.”
“말씀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이작 님.”
비릿한 표정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는데…,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전 이런 몸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야 좀, 만족스럽네요.”
마족을 뚝딱 먹어치워 버린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겠지.
심란해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가.
“…그러냐.”
“응? 그게 끝…?”
내가 덤덤히 반응하니 카야는 놀란 듯했다.
“끝났으니까 돌아가자.”
“아이작 님. 저, 마족을 먹었….”
“알아.”
“어? 에?”
나는 등을 돌리고 발을 옮겼다. 그녀는 잠시 멍을 때리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뒤따랐다.
별달리 할 말은 없었다. 이미 생각은 정리됐으니까.
‘마족 먹고 파워 업? 개이득이지.’
마족 먹는 게 뭐. 어차피 마법으로 먹었으면서 혐오스럽기라도 하겠냐.
어찌 됐든 카야가 더욱 강해져 최종 보스 전에서 내 전력이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면 악신 네피드를 쓰러뜨린 이후가 문제인가. 딱히 그렇지도 않다.
마력이 강한 고기를 먹으면 끝날 일이니까. 그런 걸 조달하는 건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이니 쉬울 테고.
더군다나 낯부끄러운 얘기지만, 마력이 강한 남성에게서 배출되는 성적인 액체도 마시거나 몸에 담으면 악식에게 포만감을 안겨줄 수 있다고 알고 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설정에선 에둘러서 표현됐었지.’
따라서 악식의 식탐으로 비극이 초래되는 걸 염려할 필요는 없으리라.
“저, 기분 안 나쁘십니까?”
“왜 나빠?”
“저 방금, 마족을….”
“그런 생각 안 드니까 걱정 마.”
“…….”
카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헤헤, 하고 웃었다.
걱정했던 게 곧바로 풀렸는지, 속시원해 보이는 미소였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카야는 음흉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아이작 님, 마족 쓸어 버렸는데 상 주시면 안 됩니까?”
“무슨 상?”
“손을 잡아 주신다거나, 제 뺨에 키스해 주신다거나, 품에 꼭 껴안아 주신다거나…! 더한 것도, 얼마든지 상관없구.”
장난스러운 어조. 카야는 얄찍한 검지로 자기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특유의 애교스러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자중해.”
“…목석.”
내 단호한 반응이 실망스러운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댄다.
그렇게 카야는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너무 좋아.”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카야 상대로 [심리 간파]를 쓸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된다.
이토록 애정캐가 마음속 깊이 나를 좋아해주니, 미운 감정이 들 수가 있나.
‘조오오올라 귀엽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슬쩍 가리고.
속으로 애국가를 제창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이작 님!”
그때.
별안간 공격적인 마력이 느껴졌다.
「얼음 창 (얼음 속성, ★4)」
푸슈욱──!
“……!”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위쪽에서 카야에게로 날아들었다!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바람 생성 (바람 속성, ★1)」
휘우웅──!
몸에 바람을 일으켜 재빠르게 뒤로 피하는 카야.
[얼음 창]이 지면에 콕 박혔다. 궤도를 보니, 카야가 있던 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그녀를 꿰뚫을 목적은 아니었던 모양.
“아이작!”
그 틈에 청은발을 휘날리며.
천장에서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자기 몸에 바람을 휘감고 내려와 나와 카야 사이를 가로막았다.
옆으로 묶인 청은발. 적색 눈동자.
‘누나?’
뜬금없게도 아이작의 누나가 튀어나왔다.
[ 이브 로펜하임 ]
Lv : 87
종족 : 인간
속성 : 얼음, 바람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카야 아스트레앙에게서 지켜내려 합니다. ]
이브는 나를 등진 채 카야를 노려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이작, 괜찮아?!”
괜찮고 자시고 넌 뭔데…?
‘전달꾼은? 얘 어떻게 여기까지 쫓아왔어?’
시간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이브는 네 번째 관문을 뚫지 않고 이곳에 온 게 틀림없었다.
전달꾼이 막아섰을 테니 그런 건 불가능했을 텐데?
‘…설마 필립 교수랑 싸울 때 망가졌나?’
카야와 필립 교수의 힘 겨루기가 광범위했으니,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뭐 이리 허술해?
“저런 섬뜩한 마력을 가진 존재가… 아카데미에 숨어 있었다니.”
“뭐죠, 당신은?”
“너, 너야말로…!”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날 몰래 미행하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 이리도 급발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카야의 눈빛에 살기가 돋아났다. 그러나 이브는 공포심을 억누르고 애써 카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너, 너 까짓거 하나도 안 무섭거든?! 쌍두견 헬가라고 알아? 그 흉폭한 마수가 내 사역마야! 게다가 나, 나한테 무려 7성급 보호 마법이 걸려 있거든? 날 건드리면 그, 아카데미에 숨어 있는 내 부하한테 네 정보가 알려진단 말이지! 반사 마법도 걸려 있어! 위험하다고, 나?! 날 공격하면 넌 끝장이야!”
말하는 게 유치하다…!
그렇게 얘기해봤자 거짓말인 게 다 티가 난다.
안쓰럽게도 이브는 목소리조차 제 후들거리는 다리 만큼 덜덜 떨고 있었다.
휘우우우우우──.
카야의 연녹빛 바람이 주위를 살벌하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피부를 짓누르는 듯한 막대한 마력. 이브는 공포심을 느꼈는지 몸의 떨림이 더욱 강해졌다.
“…제가 꼭 나쁜 사람인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후, 후하! 후, 후배 주제에! 그 기이한 마력부터 숨기지 그래? 아까 어마어마한 마력을 느꼈어. 마족의 기척도 느꼈고, 딱 봐도 마족이 쓸 법한 마법도 확인했어. 너, 마족이지? 그래, 검은 괴물도 마족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검은 괴물이지, 너?!”
호들갑스럽게 북 치고 장구 치는 이브. 내 이마에 절로 손이 턱 짚어졌다.
이브 로펜하임.
옆으로 묶은 청은발과 적안. 내 기억 속 그녀는 중증인 허언증과 망상장애를 앓고 있던, 누가 들어도 거짓말인 대사만을 입에 담던 기분 나쁜 NPC였다.
두 눈엔 생기가 없었고, 정신은 조금도 멀쩡해 보이지 않았지.
하물며 쌍두견 헬가가 자기 사역마라며, 머리 두 개 달린 인형을 보여주더니 혼자 “크르릉.”하고 포효하는 건 무척 소름끼쳤던 기억이 난다.
당연하게도, 그녀 주위에 머무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그녀는 외톨이였다.
‘상태가, 게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나은데?’
지금 그녀가 내뱉는 허언은 무척 귀여운 편에 속했다. 게임에서 보았던, 이미 정신이 망가져 있던 애처로운 여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지팡이로 카야를 가리켰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탓에 양손으로 지팡이를 거머쥔다.
몸은 공포로 뒤덮여 있음에도, 두 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한껏 담겨 있었다.
“내가 마족을 믿을 줄 알고?!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진 몰라도, 내 동생을 건드리면… 용서 못 해.”
‘…어?’
뭐야?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날 건드리는 걸 용서 못 한다? 저거, 명백히 내 편으로서 하는 말이잖아.
‘나랑 안 좋은 사이 아니었나?’
아이작은 친누나를 싫어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 감정만은 서리의 시련 때 분명히 느꼈었는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건가?
우선, 사태 파악은 됐다.
상황부터 수습해야겠다.
“당신이 누군진 몰라도… 다짜고짜 절 공격하고 아이작 님을 뺏으려 드는 건 용납 못합니다. 무슨 이유를 갖다 대든, 이건 선을 세게 넘은….”
“이 사람, 내 누나야.”
나는 이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헉?” 하고 이브는 당혹감을 한껏 드러내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내가 어깨에 손을 올려서 놀란 듯했다.
“…네?”
카야는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한동안 그녀는 나와 이브를 번갈아 보다가, 비슷한 외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서 입을 떡 벌리더니.
곧,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큰 실수를 한 사람처럼, 상당히 좋지 않은 낯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