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2 자리 싸움 (2)
“딱히 시비 걸 생각은 없었는데요.”
베르가 레이펠트의 이마에 십자핏줄이 돋아났다.
내 쪽으로 손수건 하나를 날리는 베르가.
메르헨 아카데미의 상징인 마도서와 검이 새겨진 손수건이다.
그것을 던지는 의미는 명확하다. ‘나랑 맞짱 뜨자’.
나는 펄럭이며 날아온 손수건을 받아들였다.
“대련을 신청한다. 남자답게 나와 겨뤄라, 애송아.”
아카데미 내에서 그냥 치고 박고 싸우면 징계사유지만.
대련장에서 대련하는 건 합법.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이기까지 하다.
이유야 뻔하다.
‘전투 능력 향상에 도움 되니까.’
여느 아카데미물이 그러하듯 이곳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베르가의 목소리는 마치 야생 호랑이가 그르릉, 거리는 듯하다. 그 풍채까지 영락없는 야생의 짐승처럼 보였다.
만약 한국에서 독서실 자리를 두고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여기가 왜 니 자리입니까?’하고 다퉜을지도 모르겠으나.
여기서 내 목적은 서브 이벤트이니 굳이 말다툼할 필요는 없으리라.
“제가 이기면 군말 안 하실 겁니까?”
‘어어?!’하고 당황하는 학생들. 리액션이 혜자다.
“흥! 기개는 마음에 드는구나, 애송아. 나는 너 같은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를 참교육하는 걸 좋아한다.”
무서운 표정으로 목소리를 내리까는 베르가.
“어이.”
“허억!”
베르가의 시선이 옆 공간에 있던 남학생 쪽으로 돌아갔다.
넥타이에 달려 있는 붉은 브로치를 보니 내 동기다. 화들짝 놀라는 녀석.
“심판 해라.”
“아, 네, 네!”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눈빛.
내 동기 남학생은 겁에 질린 얼굴로 마지못해 수락했다.
대련을 하려면 최소 3명이 필요하다.
대련할 두 사람. 이를 중재할 심판 한 사람.
“따라와라.”
그렇게 나와 베르가는 대련장으로 향했고.
어째… 여러 학생이 우르르 우리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무슨 피리 부는 소년도 아니고….’
이윽고, 우리는 대련장에 도착했다. 훈련장 근처라 도착하는 데는 금방이었다.
대련장은 총 세 곳이 있다. 우리는 그중 마법학부 1학년 전용 경기장이 있는 듀크관에 도착했다.
4등분으로 나뉘어 있는 웅장한 건물 내부. 나와 베르가는 경기장 위에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그랬지만, 역시나 2층 관중석엔 베르가 서브 이벤트 구경꾼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30명쯤.
관중석 전부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지만, 평소 대련장에 사람이 얼마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많은 편이었다.
필시 상대가 4성좌 중 한 곳의 정예 멤버이기 때문이겠지.
안 그래도 남의 싸움 구경은 꿀잼인데, 그중 한 명이 실력 있는 유명인이기까지 하니 더욱 꿀잼일 것이었다.
‘트리스탄이랑 누나도 있었네.’
트리스탄 험프레이 일행과 이브 로펜하임이 눈에 띄었다.
훈련장에 있었나? …딱히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그건 됐고…. 소문 좀 나겠는데.’
이기든 지든 베르가와의 승부는 학생들 입담에 오르내릴 것이다.
뭐, 고작 그 정도로 앨리스의 의심을 살 일은 없으리라.
“이름은?”
“아이작입니다. 성은 따로 없습니다.”
“나는 베르가 레이펠트다. 번거로우니 남자다운 방식으로 가지.”
“남자다운 방식?”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의아해하는 척 물었다.
“순서대로, 서로 한 대씩 주고받는 거다. 먼저 기절한 쪽이 패배하는 방식이지. 평범한 대련도 상관없다만, 그래서야 아무것도 못 하고 기절할 네놈만 불쌍하지 않겠나?”
당연히 그래야죠.
나로선 순수 대련으로 베르가를 이기기 어려우니까.
‘기왕 싸우라면 잔머리라도 굴려서 대항해볼 순 있겠지만.’
베르가는 거구에 걸맞은 힘과,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내가 패배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한 대씩 주고받는 베르가 전용 상남자 룰은, 내 일격을 저놈에게 정직하게 꽂아 넣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지금의 나라면 해볼 만 해.’
오른쪽 손가락에 힘을 주고, 꼼지락거리며 굳어 있던 근육을 풀었다.
시험해볼 것도 있었다. 베르가는 좋은 샌드백이 되어 줄 터.
“좋습니다. 순서는?”
“선공은 넘긴다. 만약 일격에 날 쓰러뜨리지 못하면, 무조건 후회하게 될 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양호실이었다, 라는 결말은 어떻게든 피하자.
“대련 개시를 선언해라, 심판!”
“허억! 네, 네에! 베, 베르가 레이펠트 대 아이작! 대련 개시!”
동기 남학생이 오른팔을 위로 뻗으며 대련 시작을 선언한다.
엄청난 대흉근을 들썩이며 나를 노려보는 베르가. 자세를 고쳐잡아 내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한다.
농도 짙은 기초 보호 마법과 높은 원소 저항력, 튼튼한 맷집이 시너지를 이루는 높은 방어력이 그의 강점.
그걸 뚫고 저놈을 쓰러뜨릴 수 있는 일격을 날려야만 이번 서브 이벤트를 클리어할 수 있으리라.
‘사타구니나 명치 같은 급소는 안 돼.’
급소야말로 함정.
베르가의 기초 보호 마법이 가장 강력하게 감싸여 있는 부위다.
처음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했을 땐 당연히 남자의 약점인 사타구니를 노렸지만, 놈의 강철 사타구니에 대미지를 주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그만큼 다른 부위는 기초 보호 마법이 상대적으로 덜 덧대어 있는 상태.
그중 어느 부위는 베르가의 약점이기까지 했다.
‘대미지가 다른 부위보다 잘 들어간다는 것뿐이지만.’
물론 일정 수준의 스펙이 되지 못하면 약점을 때려도 아무 소용 없다.
그리고 베르가는 원소 저항력마저 높은 편이니, 고작 내 수준에서 최대 위력의 원소 마법을 날리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공 이안 페어리테일은 저놈을 어떻게 쓰러뜨렸는가.
그에게는 마법학부 학생들 중 유별나게 뛰어난 능력이 있다. 그것으로 베르가를 무너뜨린다.
바로, 마법학부가 기사학부 상대로 절대로 승부를 봐선 안 되는 것.
‘무력.’
베르가의 약점을 강하게 타격하는 것이 이번 서브 이벤트의 공략법이다.
즉, 베르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려면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뒤엎을 필요가 있었다.
급소를 노리지 않는다.
마법학부 학생이지만 기사학부 상대로 무력으로 승부한다.
그리고 내 무력에 힘을 실어 줄 마법도 준비되어 있었다. 베르가의 원소 저항력 탓에 위력이 줄어들더라도, 그냥 때리는 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나는 잔야의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든, 부탁한다.”
* * *
“미천한 평민 놈이, 흑호의 정예 멤버와 자웅을 겨룬단 말인가. 하! 웃기는 일이로다!”
허영심 많은 금발 귀족, 트리스탄 험프레이는 다리를 꼰 채 관중석에 앉아서 아이작과 베르가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주위로 앉아 있는 부하 학생들이 트리스탄의 말에 호응했다.
“보나 마나 아이작이 털리지 않겠습니까?”
“4성좌 흑호의 베르가 레이펠트 선배…. 저분과 대련했던 마법학부 학생은 전부 패배했다고 들었어요. 타고난 원소 저항력이 높아서, 저분 앞에서 웬만한 원소 마법은 무의미하다고…. 그래서 하도 마법학부와의 대련이 시시하다 보니 한 대씩 주고받는 규칙을 만들었다고 해요. 베르가 선배님이 직접.”
“그런 분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란…. 한심하네요, 아이작.”
부하 학생들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 대자, 트리스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군. 어서 처참한 꼴이 되어 내게 유희를 선사해 봐라, 평민.”
거만한 목소리. 큭큭, 하고 웃는 트리스탄.
그간 아이작에게 당해온 수모를 되짚어본다면, 그가 베르가 선배에게 당하는 모습은 퍽 보기 유쾌한 광경일 것이었다.
‘아이작….’
그 주위 관중석에 앉아 있는 이브 로펜하임은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설마 아이작이 베르가의 대련 신청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으니.
거부하면 됐을 텐데, 그냥 자리 좀 내주면 될 일이었을 텐데….
‘괜한 자존심이나 부리고…. 그 사람은 너무, 격이 다르잖아.’
엄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다. 이브는 제발 아이작이 무사하길 바랐다.
이윽고, 심판이 대련 개시를 선언하고.
어째선지 아이작은 잔야의 지팡이를 경기장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기를 버리다니? 지금이라도 투항하려는 건가?
‘아니, 눈빛이…?’
아니다. 아이작의 순한 눈빛이 놀라울 정도로 냉철하게 뒤바뀌었으니.
일순.
슈욱──!
“……!”
엄청난 속도로, 아이작이 용수철처럼 도약했다.
마법학부 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움직임.
예상을 훨씬 웃도는 뛰어난 운동신경이 베르가를 당황시켰다.
엄청난 속도로 베르가에게로 달려든다.
이어, 아이작의 등 뒤로 아직 온전한 형태로 구현되지 못한 원형 바위 고리의 일부가 떠다니기 시작하고.
───「바위 갑주 (바위 속성, ★4)」
허공에 구현된 바위 피부가 그의 오른팔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이든과의 [융화력]은 최대치. 이로써 그는 이든의 특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부분 소환.
아이작의 오른팔에 바위로 이루어진 연갈빛 건틀릿이 착용된다.
바위 건틀릿엔 황빛으로 빛나는 바위 마력이 핏줄 형태로 떠올라 있었다.
[바위 갑주].
부분 소환된 이든의 힘은 아이작의 힘과 일맥상통한다. 즉, 본인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장비이기에 그는 그 무게감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아이작이 쏘아낼 주먹에 묵직함과 위력을 더해줄 것이었다.
‘마법학부면서, 힘으로 승부를 볼 셈인가…? 제정신이냐?’
본디 마법사라면 최대한 적과 거리를 벌리고 마법을 쏟아붓는 전술을 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적과의 거리가 좁혀질 수록 마법사가 패배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토록 접근전에 취약한 부류인 것이다.
그렇기에, 보통 마법학부 학생과 대련하면 언제나 원거리 마법이 베르가를 덮쳐오기 마련이었다.
아예 최대 전력의 마법을 쏟아부어보라는 의미에서 기껏 선공을 허용해줬건만.
아이작은 마법학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기사학부 학생인 베르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른팔에 [바위 갑주]를 씌운 것은 필시 육체적 힘으로 승부를 볼 셈인 것.
상상도 못 했으나….
‘어리석군.’
결국, 아이작은 마법학부.
마법을 쏟아붓지 않고 힘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은, 쇠방망이를 버리고 솜방망이로 싸우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멍청한 놈, 와봐라!”
베르가의 기초 보호 마법과 맷집은 수준급. 그의 근육이 꿈틀대고.
그의 상체를 향해 아이작의 바위 주먹이 힘껏 내질러진다.
퍼엉──!!!
“커헉…!”
퍼져나가는 풍압. 대포 소리에 버금가는 타격음.
주먹은 베르가의 왼쪽 늑골에 직격으로 꽂혔다.
베르가의 무거운 몸체가 잠시 허공에 붕 떠오른다.
식도를 타고 핏물이 역류하여 입 밖으로 튀겨나갔다.
투석기로 쏘아낸 무거운 돌을 정통으로 맞아도 지금의 아이작 주먹에 비한다면 작은 돌멩이가 날아온 수준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만한 충격이었다.
“크어억….”
베르가는 고통에 신음하며 양팔로 복부를 끌어안은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가만히 서서 베르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작.
적안이 고통에 잠겨 있는 베르가를 싸늘하게 훑고 있었다.
누구나 똑같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베르가가 멀쩡히 서 있는 채로, 무의미한 공격을 퍼부은 아이작을 무섭게 내려다보는 광경을.
그러나 지금 대련장에 펼쳐진 광경은 학생들의 상상과는 완전히 상반되고 있었다.
대련장엔 고요만이 감돌고.
학생들은 놀란 표정으로 숨을 죽였다.
털썩─.
베르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애써 의식을 유지하려 했으나, 끝내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야 아이작은 눈을 감고 이든 부분 소환을 풀었다. [바위 갑주]와 등 뒤로 일부 부위만 떠올라 있던 바위 고리가 사라졌다.
‘어떻게…?’
이브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트리스탄도,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은 심판을 쳐다보았고.
기절한 베르가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심판은 그제야 ‘헉!’하고 놀라더니 왼팔을 위로 쭉 뻗었다.
“대, 대련 종료! 아이작 승!”
호응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대련장을 맴돌고 있었다.
이내, 오로지 아이작의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 창이 허공에 떠오른다.
[Level Up!! Lv이 83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탯 2를 획득합니다!]
[업적 [원 펀치 맨!]을 달성했습니다! 보너스 스탯 2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아이작은 손을 가볍게 휙 저어 시스템 창을 날려 보낸 뒤.
다시 순해진 눈으로 베르가를 내려다보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
말머리에는 ‘경험치’라는 말이 쏙 빠져 있었다.
곧, 아이작은 고요 속에서 대련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승부 결과.
4성좌 중 흑호의 정예 멤버가 A 클래스도 아닌 마법학부 1학년생에게 패배해 버렸다는 사실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