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4 저기, 루체야? (2)
4성좌의 정예 멤버 자리는 우등생 중의 우등생만이 차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검은 호랑이 자리, 흑호의 정예 멤버인 베르가 레이펠트의 실력이 크게 찬사 받는 건 당연지사.
그의 실력을 모르는 이를 찾기가 드물 정도였으니, 그의 패배가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것도 누구든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크후후후….”
흑호의 본거지. 고풍스러운 쉼터에서 한 여학생의 고상한 비웃음소리가 울렸다.
널찍한 의자에 푹 파묻히도록 앉아 있던 남학생도 쿡쿡,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진녹색 머리칼의 근육질 거한, 베르가 레이펠트가 들어오고 나서부터다.
“웃지 마라.”
베르가의 낮게 깔린 목소리도 두 남녀학생의 웃음소리를 억누르진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정예 멤버란 사람이, 마법학부 1학년한테, 그것도 C 클래스 애한테 쳐발린답니까? 뭔 웃기지도 않는 룰을 만들고. 평소에 대련이 그렇게 지루하셨어?”
“다음엔 문제없다. 제대로 한판 겨룬다면 반드시 내가 이긴…!”
“우와! 쪼잔해! 우하하!”
베르가의 주먹이 올라가자, 남학생은 웃음을 뚝 멈추었다.
“언젠간 이런 일이 터질 줄 알았다.”
창가에 기대고 서있던 기사학부 2학년 남학생이 다그쳤다. 누가 보아도 무거워 보이는 아령을 들어 올렸다 내리길 반복하고 있었고, 그 동작을 따라 두꺼운 팔근육이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적당히 사려라, 베르가. 넌 심각한 수준의 대련 중독이다.”
“흥! 웃기는 소리. 네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힘으로 증명해라. 지금 바로 대련이다!”
창가에 있던 남학생은 아령 운동을 멈추지 않고 한숨을 푹푹 내뱉었다.
고지식한 대련 중독 베르가이니, 애당초 말이 통할 거라 기대조차 안 했다.
“이봐요, 선배님. 본인이 짠 규칙으로 털려놓곤 ‘이번엔 평범하게 대련하지 않을래?’라고 정중하게 제안하시게요? 그것도 흑호의 정예 멤버란 사람이 마법학부 1학년 C 클래스 애한테? 그림 참 웃기지 않나요?”
소파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차를 홀짝이며 지적한다.
“흑호의 명예 더러워집니다~.”
“건방지군. 혼나고 싶나, 제이니?”
“헤헹.”
차를 마시던 여학생, 제이니는 할 말 없을 때 줄곧 사용하는 애교로 위기를 무마했다.
“…그래도 확실히, 일리는 있는 말이다. 네 녀석의 선배에 대한 예절은 개판이지만.”
베르가는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다음에 놈과 다시 싸울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확실하게…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겠다.”
어젯밤 대련에서 받아낸 충격 탓에 지금까지도 복부가 아릿했다.
방심했다. 그 마법학부의 청은발 후배 놈에게서 느껴지던 마력량은 분명 보잘것없었건만.
설마 그 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힘이 센 마법사를 줄여서 힘법사라고 하던가. 필시 그런 부류의 인간인 게 틀림없었다.
다음에 아이작과 한 번 더 싸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그때는 어제처럼 방심하지 않으리라.
이 굴욕감을, 반드시 되갚아줄 것이었다.
“또 흑호에게 굴욕을 안겨 주시려구요?”
“제이니….”
“헤헹.”
“…….”
……
찬 바람이 밀려드는 계절이다. 이른 시간대에 하늘이 점차 어두워져 간다.
나비 정원 구석. 아이작과 루체는 대련하기 위해 거리를 꽤 벌리고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아이작은 이 단련 장소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따로따로 몰래 이곳까지 온 상황이었다.
“루체.”
아이작은 태평한 얼굴로 무릎을 꾹꾹 누르며 스트레칭하고 있었다. 지면엔 잔야의 지팡이를 내려놓은 채다.
“나 오늘 진짜로 하루 종일 신세질 생각이거든. 저번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괜찮겠냐?”
“응, 괜찮아.”
‘오히려 좋아’라는 말을 루체는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고맙다. 나중에 사례할게.”
“아냐, 진짜로 괜찮아.”
고개를 약하게 가로저으며 싱그럽게 미소 짓는 루체. 언제나처럼 아이작에 한정해선 순수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아이작과 루체의 마력량 사이에는 얕은 바다와 심해 수준의 격차가 있다.
사실상 루체가 아이작에게 어울려주는 건 시간 낭비나 다름없는 셈.
물론 루체는 온종일 아이작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아이작은 그녀의 심리 정도는 [심리 간파] 덕분에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작은 루체의 마음을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애정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따라서 루체가 자기 단련에 어울려 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줄 셈이었다.
스트레칭을 마친 뒤 잔야의 지팡이를 주워드는 아이작.
마치 창이나 봉처럼 가볍게 잔야의 지팡이를 한번 돌리고는 전투 태세를 갖춘다.
적당한 그립감. 마력이 원활하게 흐르고 있다. 마력기로 마력 운용력을 단련하던 게 큰 도움이 되어 주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올곧게 루체라는 목표만을 노렸다. ‘오늘은 기필코 루체에게 닿는다’라는 결연한 의지가 그의 표정에 한껏 드러나 있었다.
“오늘은 나한테 한 방 먹여줄 수 있겠어?”
“어떻게든.”
아이작에게 셀 수없이 많은 공격을 쏟아보았던 까닭에, 루체는 누구보다도 그의 집요한 집념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아이작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루체에게 덤벼들 셈이리라.
이내, 아이작이 달려든다.
푸아아아──!
쩌적─! 콰강!!
얼음 마법으로 루체의 물 마법을 얼리는 건 불가능했다.
작은 골렘 사역마, 이든을 소환해 함께 바위 마법을 사용하면 격류에 단번에 박살 났다.
고밀도의 마나가 뭉쳐 있는 물 마법은 격렬한 수류를 일으킨다. 아이작의 마법으론 조금도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고 운동 신경으로 어떻게든 피해 보려 해도, 공격 범위가 워낙 넓은 탓에 연이은 공격에 휩쓸리고 만다.
그러나 아이작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루체에게 도달하기 위해 이 악물고 죽어라 달려든다.
그렇다고 해도 막무가내는 아니다. 루체를 실험 삼아 독특한 방식을 시도하고, 또 안 되면 새로운 방식을 내보이기도 하니까.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곧바로 전술에 응용하는 학습력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
이 대련이, 남들이 보기엔 부질없는 짓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번 아이작과 합을 겨루고 있는 루체는, 대련을 거듭할 때마다 그가 착실히 강해져나가고 있다는 걸 여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마력량도, 마력 운용력도, 원소 저항력도, 반사신경도 눈에 띄게 늘었어.’
1학기 때와 비교해 보자면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였다.
‘굉장하네, 아이작….’
무심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작의 성장을 목전에서 지켜보는 건 루체에게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었다.
* * *
시야에 광활한 밤하늘이 새겨졌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잔디밭에 드러누워 있었다.
‘죽겠네….’
수 시간 동안 루체와 합을 겨루니 기진맥진한 상태.
몸도 제대로 안 움직인다. 체력 완전 방전됐구만.
‘하, 당연히 이러겠지….’
루체와의 대련은 실전 감각과 전투 능력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빠르게 지치고 다음날 컨디션에도 지장을 준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부유섬 파트까지 얼마 안 남았다. 지금은 이 악물고 버텨 내며 빠른 전투 능력 향상에 집중해야만 할 때.
그래서 루체에게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결과는 이 꼴.
그녀에게 단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먹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물며 그녀는 자기 전력의 극히 일부만 발휘했을 텐데도….
…지금은 스펙 업에 의의를 둬야지, 뭐.
“아이작, 괜찮아?”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온 루체가 나를 내려다보며 상체를 숙였다.
흘러내리는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귀 뒤로 슥 넘기는 동작 하나에도 아가씨 다운 기품이 넘쳐난다.
“구라 아니고 몸이 아예 안 움직여. 뒤질 것 같다….”
“음.”
‘일어날래?’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어 줄 줄 알았는데.
“아이작, 무방비해 보여. 이대로 납치해도 돼?”
개 뜬금없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진심?”
“농담.”
배시시 웃는 루체.
홍조 띄면서 그런 말을 하니 공포 영화가 따로 없다. 사람 식겁하게 하지 마라.
곧 루체는 불 마법 주문서를 펼쳐 내 옆에 내려놓았다. 모닥불처럼 피어오르는 불꽃이 적절한 온기를 제공해주었다.
내가 물 마법에 당해 축축하게 젖는 상황을 고려해 미리 챙겨 온 모양이었다.
이후, 루체는 내 복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마치 당연히 이랬어야 했다는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러더니 내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간단한 치유 마법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고통이 차츰 멎어간다.
“…이것저것 고맙긴 한데, 난 의자가 아니다.”
“아이작, 묻고 싶은 게 있어.”
내 말은 개무시하는군.
시간이 흐르면서, 루체도 이 정도 장난쯤은 허용된다고 판단할 수 있는 감 정도는 생긴 모양이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도 나오는 바, 원래 루체는 장난기가 다분한 성격이다. 점점 농담이나 장난의 빈도수가 늘어나고 있는 게 그 증거.
점점 밝아져서 보기 좋아.
어쨌든, 나는 루체가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아이작은 왜 그렇게 무리해? 평소에도 심했는데, 오늘은 특히 더 심한 느낌이었어.”
루체의 눈썰미는 비인간적인 수준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단번에 캐치했을 터.
날 깔고 앉은 사람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대충 간단히 대답하기로 했다.
“이래야 실력이 빠르게 늘잖아. 나도 너처럼 세져야 가오 좀 살 거 아니냐.”
실력이 빠르게 는다는 진심 반, 가오 좀 잡고 싶다는 구라 반으로 대답하자 푸후,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루체.
웃음소리마저도 고상하다. 어떻게 목소리가 이토록 고울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
“나처럼 되고 싶어?”
“네가 수석이잖아.”
“그러네. 넌 향상심이 높으니까, 당연한 얘기겠구나.”
루체는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는, 내 허벅지와 가슴팍을 짚고서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념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겠다. 무리해도 뭐라 못하겠네.”
딱히 할 말도 없어서 일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루체가 흘리던 치유 마력이 제 역할을 마치고.
그녀는 내 위에서 내려오곤 그대로 옆에 드러누웠다.
“어?”
대뜸, 루체는 내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
말도 안 되게 부드러운 촉감이 내 머리에 그득하게 번져나가고.
기분 좋은 향기가 콧속을 은은하게 향유했다.
입 밖으로 감탄사를 내뱉진 않았으나, 내 두 눈은 이미 휘둥그레진 상태였다.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저기, 루체야…?”
“그래도, 가끔은 나한테 기대도 좋아.”
루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내 귓가에 나직하게 스며들었다.
고막을 깃털로 간질이는 듯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마음껏 무리하다가, 힘들면 나한테 와줘. 그건 괜찮지?”
눈을 치켜뜨고 루체를 쳐다보았다.
반대편에 피어 있는 불 속성 주문서 덕분에, 그녀의 앳된 미소가 밝게, 내 눈에 환하게 내비쳤다.
생각해 보면, 루체는 내 걱정을 굉장히 많이 했다.
내가 위험해지면 어떻게든 나를 지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여 왔지.
이해한다. 나는 지금 루체에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나 다름없고.
내 안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건, 이전에 소중한 사람들을 참혹하게 잃었던 기억이 그녀를 옥죄어 오는 까닭이리라.
내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화를 내고, 슬퍼하고, 울어주는. 루체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특한 것.’
후우, 아빠 미소 튀어나오게 만드네.
“이러면 안 부끄러워?”
저번엔 ‘가슴 만질래?’하고 부끄럽다고 곧바로 철회하더니만, 포옹은 어째 허용 범위인 모양이었다.
“살짝. …읏, 아이작 숨 간지러워.”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야릇하게 울린다. 낯부끄럽게….
됐다,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일어나야지.
루체가 걸어뒀던 치유 마법이 온몸에 퍼졌는지 힘이 꽤 들어간다. 경험상 앞으로 몇 분 안에 단련을 재개할 수 있으리라.
“아이작?”
나는 루체에게서 벗어나 상체를 일으켰다.
체력이 돌아오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황홀경에 취할 수만은 없는 노릇.
루체도 뒤따라 상체를 일으켰다.
“자주 신세져도 되냐?”
장난식으로 그리 묻자, 루체는 능청맞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아주는 거까지만.”
“…그 이상은 생각 안 했어.”
“거짓말.”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절대기억력과 엄청난 눈썰미를 지닌 루체이니, 내가 그녀의 가슴을 부자연스럽게 쳐다본 횟수 정도야 기억하고 있을 터. 내 부정에 신빙성은 없겠지.
이런 화제는 대충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왜 더 부정 안 해?”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루체는 슬쩍 내 눈을 피하면서 그리 물었다. 두 뺨은 은근히 불그스름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뭐라 해도 안 믿을 거면서 뭘.
불 속성 주문서가 피워 올린 불꽃이 모닥불처럼 타닥댄다.
단련만 하던 장소였는데, 주문서로 불 하나 피웠다고 마치 캠핑장에라도 온 것처럼 분위기가 썩 괜찮았다.
나는 루체와 잠시 가볍게 수다를 떨다가, 몸이 다시 온전히 움직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시작하자.”
루체는 헤실거리며 “응.” 하고는, 내 손목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새벽까지 루체는 내 단련에 어울려주었다.
* * *
서쪽, 아킨스 해 방면.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첨벙대는 소리를 들으며,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밤바다를 보고 있으면 진득한 허무감이 밀려들곤 했다.
도로시 하트노바는 마녀 모자를 손으로 살며시 눌러 바닷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고정시킨 채.
절벽 끝에 앉아서 가만히, 수평선 너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가리고 있는 모자 그늘 아래, 건조하게 굳은 얼굴에는 일말의 웃음기조차 없었다.
낯익은 마력이 바닷바람을 타고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평범한 하늘에 무언가가 떠 있나 싶었지만, 확인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저 바다 위로, 도로시 자신도 막기 힘든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재앙이 도래할 것만 같아서.
자신은 저주로 죽는다.
그 전에, 반드시 저승길 동무로 삼아야 할 놈이 있었다.
바로 그놈이 튀어나오려는 건지도 몰랐다.
별의 요정 스텔라와 계약을 맺어 별빛이 내비치는 모든 세계를 관측할 수 있게 된 도로시다.
비록 아직 능력이 부족해 온전한 관측은 어렵고, 보이는 것조차도 흐릿하지만.
그러한 형이상학적이고도 초월적인 능력 덕분에, 도로시는 자신에게 저주를 건 거대한 존재가 얼마나 막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의 섭리가, 쓰러뜨려선 안 될 존재인 것처럼 가꾸어낸 듯한 강력함을 놈은 지니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도로시에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선배는 제가 구합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건 또 다른 세계에 있는 또 다른 자신과 공명하며, 그 세계를 관측했던 기억.
이 절벽 위에서 청은발 소년이 했던 단언이다.
흐리멍덩한 기억 속, 그가 했던 말 만큼은 또렷이 도로시의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가슴속이 뭉글거리며, 절로 입꼬리가 들썩이고 만다.
도로시는 숨을 죽인 채, 몰려오는 파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 뒤.
아킨스 해 상공에 거대한 섬 하나가 눈 깜짝할 새에, 보란 듯이 출현했다.
바다를 뒤덮을 듯한 그 크기는, 마치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