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9 부유섬 토벌전 (5)
도로시 게일은 걷는 것보단 뛰는 걸 좋아했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그녀는 천진난만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였다.
어디서든 장난을 치다가 작은 사고에 휘말려 마을 주민들을 곤란하게 할 때도 많았으나.
진흙으로 더러워진 소녀가 밝게 웃어 보이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마을 주민들은 마음이 풀리곤 했었다.
“…아.”
눈을 감았다 뜨자, 황폐한 땅이 도로시의 시야에 내비쳤다.
도로시가 있었던 마을의 풍경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러했다는 듯,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살았던 외숙모도, 외삼촌도, 강아지 토토도.
시작은 어느 날 들이닥친 회오리바람이었다.
도로시가 있던 판잣집은 회오리바람에 뜯겨나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그 집은 뭉크킨의 나라라는 곳에 떨어졌다.
무척 낯선 환상의 나라에서, 도로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준다는 대마법사 오즈를 찾아 나섰다.
노란 벽돌 길을 따라 쭉 나아가며.
뇌가 갖고 싶다던 허수아비, 심장이 갖고 싶다던 양철 나무꾼, 용기가 갖고 싶다던 겁쟁이 사자와 친구를 맺고.
때론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하며, 마녀와 싸우기도 하며, 마침내 도로시는 대마법사 오즈에 이르렀다.
대마법사 오즈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빌어 열기구를 타려 하자.
몰래 도로시에게 애정을 품고 살아가던 요정 하나가 끼어들어, 그녀를 현실로 끌어내주었다.
그제야 도로시는 환상의 나라에서 벌였던 모험이, 사실은 자기 목숨을 좀 먹기 위한 허상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도로시는 요정의 도움으로 하늘을 떠다니는 거대한 땅덩어리로부터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그곳은 이미 부유섬이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햇빛이 저물어가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도, 도로시는 묵묵히, 무표정으로, 황폐하게 변해 버린 고향 땅을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눈을 내리깔면, 찢어진 황토색 원피스 틈새로 복부에 새겨진 저주의 낙인이 보였다.
도로시에게 남겨진 것은 확정된 죽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쓸쓸한 달빛이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밤중에 비가 오고 동이 트니, 드넓은 황야 너머에 세상을 가로지르고 있는 무지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비에 홀딱 젖어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무지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높이,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언젠가 자장가에서 들어 본 곳이 있었다.
졸음이 몰려오자 그 아름다운 꿈나라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어린 소녀는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연보랏빛 머리의 9살 소녀, 도로시 게일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는 아득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언제 다시 밤이 됐는지, 어여쁜 별빛이 군청색 하늘에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주위로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녀는 기억 속의 자신과는 달리 무척이나 태평한 표정이었다.
“헛!”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그녀.
“참, 쓸데없는 허상이구만!”
도로시는 웃는 얼굴로 왁왁 소리를 내지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보게, 이곳엔 짐밖에 없는 것인가?!”
혼자서 장난식으로 크게 소리치며, 도로시는 춤을 추듯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황토색 원피스 자락이 발걸음을 따라 훨훨 나부꼈다.
“어쩜 이리도 야속할 수가! 이 낭만적인 광경을 나 혼자 만끽하라는 건 너무하지 않소?! 밤하늘도 이렇게 예쁜데!”
9살의 평민 소녀는 왕이라도 된 것 같은 말투로 그리 소리치다가, 문득 다리에 부드러운 털덩이 같은 것이 맞닿는 감촉을 느껴 우뚝 멈춰 섰다.
도로시는 의구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짙은 갈색 강아지가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리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
도로시는 흠칫 고개를 떨었다. 표정이 차츰 굳어간다. 방금 전까지 입방정이나 떨면서 장난스럽게 웃어대던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지면에 두 무릎을 꿇고는, 강아지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토토.”
눈을 감고 사랑하는 반려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작은 강아지는 어린 도로시의 품에 쏙 들어왔다.
이내,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용히 눈을 뜨자 밤하늘 아래 고향 마을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붉은 지붕으로 이루어진 판잣집.
판잣집 앞에 서서 애틋한 표정으로 도로시를 바라보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외숙모와 외삼촌.
도로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토토, 잠깐만.”하고 강아지 토토를 내려놓고 판잣집으로 다가갔다.
거리를 벌리고 멈춰 서서, 도로시는 애써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외숙모랑 외삼촌을 다 뵙네요! 니히히, 저도 곧 거기로 가려나 봅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느껴졌다. 자신이 얼마 못 가 죽으리라는 걸, 도로시는 여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에는 머릿속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 이 세상은 그 일환인가. 아니면 저승의 문턱인가.
“있죠.”
도로시로선 알 길이 없었으나, 뭐든지 상관없었다.
단지 그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으니까.
“다들 떠나고 그냥 좀 뭐…, 대충 그만 살까 싶었거든요? 근데 안 되겠더라구. 그래서 그냥 열심히 살았어요. 아, 힘들었어 힘들었어! 진짜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을 걸요?”
도로시는 과거 일을 떠올리곤 손사래를 치며 질색했다.
“그래도 모험가 일 하면서 돈도 좀 벌고…. 나름 먹고 살 만해지고, 나이도 들고…. 그러다 보니까 왠지 내 나잇대에 맞는 경험을 하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아카데미에 들어갔어요. 저야 워낙 잘 났으니까 수업 같은 건 들을 필요도 없긴 했는데, 그래도… 재밌긴 재밌었어요!”
죽기 전에, 제 나잇대에 걸맞은 생활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아카데미였다. 또래 친구들과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시험을 치르며, 부대끼며 생활한다는 건 처절하게 살아왔던 도로시에겐 로망이나 다름없었으니.
“저 답게 벌점도 왕창 받았죠, 느흐흐! 그래도 저, 인기는 많아요. 귀여운 팬클럽 회장도 있고, 제 팬도 많이 있어요. 어쩜 다들 그렇게 나를 좋아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도로시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했다.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어투였다.
외숙모, 외삼촌은 아무런 대답 없이 웃는 얼굴로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슬픈 이야기는 없었다. 도로시는 오로지 즐겁게, 웃으면서 떠들 수 있는 이야기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재밌었던 모험담을, 무슨 음식들이 맛있었는지를, 아카데미에서 벌어졌던 유쾌한 일들을, 도로시는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바보 같은 농담도 가끔씩 던져 주며, 실없는 웃음소리를 터뜨리기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재밌게 살아왔는지를, 도로시는 그림을 그려나가듯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다 점점 눈가가 젖어들고,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소리가 늘어지면서.
서서히 도로시의 웃는 얼굴에 눈물이 한두 방울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일상 이야기를 하는데도 목이 잠기고, 기껏 눈물을 훔치면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와 버린다.
그리 손가락과 손목으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도로시는 여느 때처럼 웃는 가면을 써 보였다.
기껏 외숙모와 외삼촌을 만났으니, 슬픈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느 순간, 즐거운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목이 메여 버리고.
감기라도 걸린 사람처럼 코맹맹이 소리나 흘려대고 있으니,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절로 실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입가를 찌푸리고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려 해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도로시는 조막만 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말을 꺼내기 힘겨워져 잠깐의 시간을 들이고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나지막이 입에 담았다.
“…보고 싶었어.”
도로시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으려 할 때마다, 도로시의 눈에는 항상 당신들이 보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와서, 잠자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젠가, 자신도 당신들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물씬 들곤 했었다.
온화한 밤이었다.
찬연한 달빛이, 형형한 별빛이, 어깨를 떨면서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어린 소녀를 조용히 내비치고 있었다.
이 황폐해진 고향 땅에서 소녀는 영원히 깨지 않을 깊은 잠에 빠지려 했었다.
현실은 꿈과 낭만, 모험이 넘쳐나는 환상의 세계와 달랐다.
그녀에게 남겨진 현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중한 사람도, 소중한 고향도. 남아 있는 건 10년도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리란 시한부 낙인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빛나고자 했다.
칙칙한 여생에 절망밖에 남겨진 것이 없다고 한들, 누구보다도 연극의 주인공처럼 살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것을, 남아있는 생애를 한껏 만끽하자며.
그리, 쭉 참아왔다.
소녀는 그리 견디며 살아왔던 것이다.
외숙모와 외삼촌이 다가와 도로시를 꼭 껴안았다.
초라한 시골 마을. 고아였던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도로시가 사랑했던 사람들.
도로시는 두 손을 내리고, 다시금 애써 웃어 보였다.
외숙모는 도로시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고.
도로시는 사랑하는 외숙모의 얼굴을 더욱 또렷이 두 눈에 담고, 뇌리에 깊이 새기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저 멀리, 무지개가 떠 있는 반대편의 세상이 형형색색의 눈부신 별빛으로 뒤덮여갔다.
마치 지금 도로시가 있는 곳과 대비되듯, 세상의 반절이 빛으로 감싸여졌다.
놀란 얼굴로 뒤바뀌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던 도로시는, 이내 무슨 상황인지를 깨닫고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도로시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외숙모, 외삼촌, 강아지 토토의 뺨에 잽싸게 키스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숙모, 외삼촌, 토토! 조금만 나중에 갈게요! 절 구해주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별빛 세상을 등진 채, 9살의 어린 소녀는 뒷짐을 지고서 밝은 미소를 내보였다.
“제 팬클럽 회장이에요. 항상 단련밖에 안 하는 단련충에, 고지식할 정도로 자기 발전에만 시간을 쏟고, 가끔 머리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 바보 같은 녀석인데…. 그래도, 엄청 귀여워요. 녀석이 절 구해주겠다고 했으니까, 기꺼이 구해져야죠. 니히히.”
외숙모, 외삼촌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이토록 사랑스럽고 가슴 아프도록 그리운지.
도로시는 북받치는 감정을 꾹 참아내고 조금씩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금만 나중에 갈게요. …사랑해요.”
그 말을 끝으로, 도로시 게일은 등을 돌리고 휘황찬란한 별빛 세계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이자, 어린 9살의 소녀는 어엿한 학생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마녀 모자를 쓰고 메르헨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별의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희대의 천재, 도로시 하트노바의 모습으로.
“벌써 신나네.”
토끼처럼 가벼운 발걸음.
도로시는 한 손으로 파란색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허울없는 웃음을 흘렸다.
얼른 아이작이 보고 싶었다.
……
서리를 머금은 은빛 바람, [서리바람]이 사납게 몰아쳤다.
누구든 죽음으로 몰고 가는 부유섬의 황빛 마력 가스가 폭발해 에메랄드 궁전을 박살 내고 주위로 퍼져 나갔으나.
[서리바람]이 휘몰아치며 마력 가스를 삽시간에 몰아내었다.
청은발의 남학생은 [서리군주의 위광]을 사용해 제 몸에 들이닥친 죽음의 위협을 가볍게 튕겨 내었고.
이후, 오른손에 골렘 사역마 이든 부분 소환으로 만들어 낸 바위 건틀릿을 착용하고 검은 구체형 결계를 단번에 깨부쉈다.
유리 깨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결계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검은 기둥에 몸이 반쯤 흡수되어 버린 연보랏빛 머리칼의 여학생. 온몸에는 화염처럼 생긴 검은 반점이 잔뜩 피어올라 있었다.
사내는 이든 부분 소환을 풀고서 그녀 앞에 멈춰 섰다.
난데없는 빛줄기가 쏟아져 그녀는 힘없이 눈을 떴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빛줄기를 등지고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은 무척 낯이 익었다.
“…….”
문득,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자신이, 고작 이 남자의 말 몇 마디 때문에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 버리고 말았으니.
마치 구해주는 게 당연하다는 듯 사내는 태평하게,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돌아가자.”
비록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도로시는 가까스로 힘을 쥐어짜내,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왕이면 웃는 얼굴로 아이작을 맞이하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