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7 2학기를 마치며 (4)
“지금부터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겨울방학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흰 눈이 메르헨 아카데미를 제 색으로 물들인 채였다.
아침. 마법학부 수업동, 오르핀관 앞 광장.
교복과 케이프숄 차림의 마법학부 학생들은 학년별로 광장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고.
마법학부 1학년 C 클래스 담당 여교수는 단상에 서서 활기찬 목소리로 방학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마법학부 1학년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아카데미 행사였다.
마족 출현 건, 부유섬, 다사다난했던 1년을 돌아본다는 교장 엘레나 우드라인의 훈화는 대충 흘려들었다.
아, 올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져 가는 건 상당히 안쓰러웠다.
‘고생 길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울지 마세요. 앞으로도 힘든 날이 많을 테니까….
이윽고, 진행자의 호명에 따라 마법학부 1, 2학년 수석이 각 학년의 대표로서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1학년 수석은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학생, 루체 엘타니아였고.
2학년 수석은 기다란 연보랏빛 머리 여학생, 도로시 하트노바였다.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내 애정캐들, 미모가 미쳐 날뛰고 있구나…!
비록 동복과 케이프숄로 꽁꽁 싸맸으나, 단상 앞에 선 그 뒷모습만 봐도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흐으, 아빠 미소 절로 나오네.
참고로 방학식은 재학 중인 학생들을 위한 것.
기존 3학년은 예비 졸업자 신분이므로 강단에 서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졸업식에서 성대한 의식을 치를 것이었다.
어깨에 하얀 코트를 걸친 교장 엘레나가 두 수석 앞에 섰다.
그녀는 루체의 리본에 달린 붉은색 보석 브로치를 떼어내고, 2학년을 상징하는 파란색 보석 브로치를 대신 달아주었다.
도로시의 리본에는 같은 방식으로 3학년을 상징하는 보라색 보석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교장 엘레나가 두 여학생과 악수하자, 학생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수를 치는 도중.
나는 담녹색 양갈래 머리 여학생, 카야 아스트레앙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카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쉬운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분한가 보네.’
학기말 평가 때 카야는 루체와 대련하고 패배했다.
설령 카야가 본래의 시나리오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해도, 루체는 여전히 넘기 힘든 굳건한 벽처럼 자리 잡고 있으니.
카야로선 몰아치는 열등감을 감내하기 힘들 것이었다.
“…….”
어제부터 줄곧, 도로시가 해주었던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부유섬을 해치운 이후, 카야가 아지트에 와서 날 치유해주고 갔을 줄은 전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카야는 홀연히 나타나 나를 위기에서 건져주곤 했었다. 그녀가 없었으면 곤란했을 일들이 많았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카야와 연을 쌓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뇌신조랑 싸우고 뒤졌겠지.’
그러네…, 뒤졌겠구나.
‘진짜로 고맙다….’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제야 카야는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려 비취색 눈동자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흐아아….”
카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자길 쳐다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밀려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푹 숙였다.
어깨가 뻣뻣하게 올라가고, 머리 위로 증기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여느 때의 카야였다.
……
방학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메르헨 아카데미가 개방되고, 많은 학생이 마차를 타고 고향으로 떠나간다. 이제 며칠 지나면 아카데미는 무척 조용해지겠지.
이러나 저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여느 때와 같았다.
‘단련.’
방학이 되면 훈련장이 한산해진다. 이 개꿀 시기를 놓칠 터냐.
훈련장으로 향하는 중, 주위를 둘러보자 메르헨 아카데미의 아름답고도 새하얀 정경이 시야에 담겼다.
숨을 내뱉으면 희뿌연 입김이 흘러나와 조용히 사그라졌다.
완연한 겨울 풍경이었다.
“…….”
그러다가,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새벽녘에.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입학식 날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이 봄비를 퍼붓던 그 새벽에, 나는 저 나무에 웅크리고 앉아 빗방울이 [얼음 장막]에 맞닿아 얼어가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막막함이 지금도 무척 생생하게 다가온다.
1학년.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 나오는 엑스트라, 아이작에게 빙의하고 1학년.
나는 뇌신조에게서 살아남았고, 부유섬을 쓰러뜨렸고, 도로시를 살려 냈다. 그리고 많은 배드 엔딩을 막아 냈다.
그리고 죽지 않았다. 살아남아서,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여정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용케.”
피식, 실소가 터져나왔다. 용케도 살아 있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학기를 마치며.
내 1학년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 상 태 ]
이름 : 아이작
Lv : 103
성별 : 남
학년 : (2)
칭호 : 예비 2학년
마력량 : 24000 / 24000
- 마력 회복 속도(B+)
……
훈련장.
나는 잔야의 지팡이를 들고 마물 환상과 맞붙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현재 상황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구체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1학년 2학기, 내 등수는 전교 45등.
2학기 동안 치렀던 모든 평가 결과를 총 합산해 매겨진 등수였다.
저번 학기보다 성적이 가장 크게 오른 학생에게 주어지는 자기발전 우수 장학금 대상으론 확정이었다.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안도감만 든다.
아무튼, 이번 겨울방학 동안 등록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으리라.
게다가 기숙사 이동도 확정 사항이었다.
현재 내가 속한 곳은 중하위권 기숙사, 브릭스관.
2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중상위권 기숙사, 엘마관으로 옮겨지겠지.
엘마관부터는 편의 시설이 급격히 좋아지고, 학사 소속 메이드가 생활에 개입하는 영역이 늘어난다.
즉, 생활이 몹시 편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인 메이드를 부려도 상관없지만, 평민인 나하고는 관계없는 사항이었다.
‘뭣보다 개쩌는 건.’
내가 2학년이 되기 전에 종결급 마도 무기 2개를 전부 얻을 수 있게 됐다는 점.
이번엔 고르모스의 대검을 얻을 작정이긴 한데….
아쉽게도 빙설룡-힐드 때하고는 상황이 달랐다.
‘고르모스랑 사역마 계약을 못 맺으니까.’
고르모스의 대검을 지키고 있는 놈은 암갑귀-고르모스. 놈은 8성급 마수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전설 무기를 지키고 있는 8성급 마수와 사역마 계약을 맺으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첫째,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을 지니고 있을 것.
둘째, 시련을 통과해 전설 무기를 손에 넣었을 것.
셋째, 8성급 마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자신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것.
그렇다, 이게 정석이다. 빙설룡-힐드의 경우가 특이했던 거지.
‘그래서 극후반부에나 가야 사역마 계약이 가능했었어.’
즉, 암갑귀를 내 사역마로 두려면 정석을 따라야 한다는 얘기.
암갑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수준까지는 강해져야 했다.
‘2학년 1학기도 대비해야겠지.’
2학년 1학기라고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네 가지다.
황금의 세대.
루체의 종결급 마도 무기를 드랍할 수 있는 마족, 심해 괴수.
무녀.
앨리스 토벌전.
‘루체 반지 어쩌냐.’
나는 악신 토벌대 멤버 중 한 명으로 루체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그녀의 스펙 업은 곧 내 전력 강화에 직결되는 문제.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흑해 여왕의 반지’를 드랍할 수 있었는데.
그게 루체의 종결급 마도 무기였다.
‘무조건 얻어야 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왼손 약지에 껴야 효과가 발휘된다는 건데….’
흑해 여왕의 반지에 얽힌 사연 때문이라는데, 이 세계에서도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우는 건 프로포즈의 맥락과 동일하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할 당시에는 게임 개발진의 음습한 의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반지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건네줄지는… 고민해봐야겠지.
‘그리고.’
시나리오 진행과는 무관하지만 꼭 알아내고 싶은 게 있었다.
‘앨리스는 어떻게 모든 걸 알고 있었는가.’
앨리스 토벌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앨리스는 웃는 얼굴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모든 의문을 껴안은 채 극에서 퇴장한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해봤다면 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터.
나라고 예외겠는가.
그래서 기왕이면, 나는 앨리스가 어떻게 모든 걸 알고 있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하!”
별안간 익숙한 실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마지막 마물 환상을 처치하며 웨이브 하나가 끝난 참이었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뜻밖의 인물이 출입구를 지나쳐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깔끔한 귀족풍 의복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남성.
허영심 많은 금발 귀족, 트리스탄 험프레이였다.
“트리스탄?”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단련인가? 가소롭구나 평민!”
턱을 치켜세우고 오만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트리스탄.
사복 차림을 보아하니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듯하고, 수련하러 이곳까지 온 건 아닌 듯 보였다.
즉.
‘나한테 볼일 있어서 온 건가?’
…아니지, 그냥 시비 걸러 왔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트리스탄이잖아.
트리스탄은 나와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여느 때처럼 거만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만연했다.
“어차피 2학년이 돼도 네놈은 내 발밑에 있겠지!”
“……?”
…웬 뜬금없이 개소리냐.
“그런 것이다, 평민!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이 몸에게 근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사실을, 2학년이 돼서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호기롭게 선전포고하는 트리스탄.
대충 뭐….
2학년이 되어서도 잘 지내보자는 뜻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크흐흐! 어디 열심히 발버둥이나 쳐 봐라! 이 몸이 면학으로 압살해줄 테니!”
트리스탄은 마치 삼류 악역이라도 되는 양 그리 말을 늘어놓고는, 등을 돌리고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고 호탕하게 비웃다가 사레 들렸는지 연신 헛기침하는 녀석.
[ 트리스탄 험프레이 ]
Lv : 92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물
위험도 : X
심리 : [ 당신보다 강해지고 싶어 합니다. ]
아무래도 트리스탄은 학기말 평가 때 내 마력량을 느끼고 우열을 가늠한 모양이었다.
트리스탄이라면 그 사실에 크게 자극 받았을 법했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 언제나 놈은 자신을 갈고 닦으며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했다.
그런 녀석이, 자신이 업신 여기던 평민 아이작에게 추월당했으니….
그러면 트리스탄이 내보일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더 노력한다.’
객관적인 우열을,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욱 노력하는 것.
놈은 경험으로 노력의 가치를 알고 있고, 남이 쌓아온 노력의 결과를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신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노력의 결과로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것이 놈이 추구하는 삶의 태도였다.
그렇기에 의욕을 다지고자 나에게 선전포고를 하러 온 듯했다.
‘나도 뭐, 너랑 비슷하다.’
이 아카데미에서 내가 이르고자 하는 종착점은 악신 네피드다.
언제나 내 비교 대상은 그 마족.
지금 당장 싸운다면 내가 개쳐발릴 게 객관적으로 명백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마족을 이기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는 것뿐.
트리스탄의 뒷모습이 출입구 너머로 사라져 갔다.
의도치 않게, 녀석이 한 말이 다시금 내 속에서 각오를 다지게 했다.
마물 환상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고.
나는 손에서 얼음 마력을 피워 올렸다.
고르모스의 대검을 얻기 위해, 사암의 시련을 치를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