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8 Monologue - 막간 (2)
요새 방랑시인들이 숱하게 노래하는 시의 주제를 꼽자면, 단연코 부유섬을 토벌한 ‘이름 없는 영웅’이었다.
어느 날 돌연 메르헨 아카데미에 출현해 마족을 처치하는 ‘검은 괴물’을, 세계에선 그러한 별칭으로 칭송하고 있었으니.
아스트레앙 공작령에 출현했던 악마의 기둥 또한 이름 없는 영웅이 해치웠다는 정황이 있었다.
검은 괴물과 부유섬 간의 전투에서 일어났던 차가운 은빛 바람이, 악마의 기둥이 출현했던 장소에서도 목격됐던 까닭이다.
마족이 붙잡은 인질이 그리 많았음에도 사망자는 단 0명. 부유섬과의 전투에서 아무런 피해자를 발생시키지 않은 데에 이어, 믿을 수 없는 행보였다.
그 소식이 검성, 제랄드 아스트레앙과 천재 마법사, 히스토리아 아스트레앙의 귀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런가.”
한밤중.
급히 아스트레앙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앞머리를 뒤로 넘긴 담녹색 머리의 중년 남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검은 탑 마족을 해치운 자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사실이 확실시되었다는, 호위 기사의 보고를 전해 들은 뒤 보인 반응치고는 덤덤했고.
악마의 기둥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보였던 격분과는 몹시 대조적이었다.
제랄드는 화염처럼 이글거리나, 독수리처럼 예리한 눈매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지러진 달 하나가 밤하늘 한구석에 휘영청 걸려 있었다.
부유섬을 단신으로, 그 어떤 희생도 없이 해치운 대마법사.
그만한 존재가 어떻게 제 정체를 숨겨 오다가 갑자기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하를 막론하고, 그가 아스트레앙 공작령을 지켜 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마법사에게, 빚을 져 버렸군….”
제랄드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 * *
모험가 숙소. 책상에 놓인 발광 램프만이 은은한 빛을 내비치며 밤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잠옷 차림의 하얀 단발머리 소녀, 에이미 할로웨이는 책상에 앉아서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평소에 쓰던 검은 토끼 귀 리본은 벗어둔 채였다.
책상에는 예습을 위해 가져온 원소마법학 서적이 펼쳐져 있었으나, 에이미는 도저히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없었다.
“…….”
검은 탑 마족. 그리고 마법사 로브를 입은 정체불명의 누군가.
그가 입고 있던 로브는 인식 저해 기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얼핏 봤을 때 형체가 흐릿해서 잘 분간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할로웨이 백작가의 여식. 가계 능력인 [심색 분별]이 상시 발동 중이었다.
[심색 분별]은 상대방이 가진 마음의 색을 비추는 마법. 할로웨이 백작가가 온갖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게 한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아스트레앙 휘하의 기사들에게서 엿들은 바, 검은 탑 마족을 해치운 자는 이름 없는 영웅, 즉 검은 괴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마음의 색은 분명….
“푸르고…, 주황빛.”
주황빛을 머금은 푸르고 고운 색. 기본적으로 그가 고운 성품임을 증명하는 색이자, 에이미를 소중히 여길 때 나타나는 감미로운 색이기도 했다.
아주 잠깐, 얼핏 봤을 뿐이니 정확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잘못 봤을 수도 있다.
상대가 일부러 냉기와 얼음의 벽으로 자기 모습을 감췄던 데다.
에이미 자신은 곧바로 카야의 바람 마법으로 떠올라 버려서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 마음의 색이 진짜라면….
─ ‘미안한데 널 납치하려고 하거든. 협조 좀 해줄래?’
얼음 속성 보유자이면서, 에이미에게 그 색을 보였던 메르헨 아카데미 소속 인물은 단 한 사람뿐.
아카데미 최약체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룬 청은발의 소년이었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에이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이작…?”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어보지만….
막상 아이작이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가정해 버리니, 미심쩍은 부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고.
밤이 깊어질 수록 에이미의 의심은 겹겹이 쌓여나가기만 했다.
* * *
[ 상 태 ]
이름 : 아이작
Lv : 105
성별 : 남
학년 : (2)
칭호 : 예비 2학년
마력량 : 25500 / 26000
- 마력 회복 속도(A-)
연신 덜컥거리는 마차 안. 마력기를 쥐고 마력 운용력을 단련하며 상태창을 살폈다. 메르헨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스트레앙 공작령에서 마족이 나타났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나는 [서리바람]을 일으킨 뒤, 빠르게 혼탁의 바벨이 집어삼켰던 영역에서 벗어나 인근 숲속에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눈으로 뒤덮인 겨울나무에 아직 녹음이 남아 있는 숲이었다. 작은 동굴도 바로 보여서 몸을 숨기기에 적합했다.
이후, [천리안]으로 인근을 훑었다. 슬슬 아스트레앙 휘하의 기사단이 바벨이 있던 장소에 당도하려는 참이었다.
나는 작은 동굴에서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멀리 있는 마차 정류소 방향으로 슬금슬금 다가가며 중간에 다른 동굴로 들어가 푹 쉬었고.
이른 아침. 로브를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고 숲을 벗어나 마차를 잡아 탔다.
빙설룡-힐드를 타고 가면 검은 괴물이 언제 메르헨 아카데미에 도착하는지 대놓고 드러내는 꼴이었기에, 마차를 타고 안전하게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내 기억대로, 메르헨 아카데미 행 마차에 한정해선 육지에서도 겔을 화폐로 쓸 수 있었다. 아카데미 정문에서 환전이 가능한 까닭이다.
카야와 실컷 이야기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아쉬웠지만, 그건 방학이 끝난 이후로 미뤄도 상관없겠지.
악마의 기둥이 출현했던 장소와 메르헨 아카데미를 잇는 연륙교는 가까운 편. 밤이 이르면 아카데미에 도착할 터였다.
‘중간 점검이나 하자.’
제대로 된 단련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중간 점검이라도 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편이 좋으리라.
확실한 것부터 되짚어 보자면.
‘우선, [마력 회복 속도].’
[마력 회복 속도]가 B+급에서 A-급으로 올라갔다. 암철검을 얻은 직후에 그리 된 것인지, 혼탁의 바벨을 처치한 이후에 그리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E급 시절에 비하면 마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는 게 체감된다.
그때는 마력이 자연 회복 되어 가는 속도가 물이 쪼르르 흐르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홍수가 범람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다음은 암철검.’
고르모스의 암철검을 얻은 덕분에 여러 7성급 스킬들을 습득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바랐던 능력은 패시브 스킬, [암식]이었지.
이제 내게 대미지를 입힐 우려가 있는 강력한 적이 공격해 오든 말든 우뚝 선 채.
팔짱 끼고 메테오를 떨어뜨리며 ‘이게 하늘의 이치다’ 따위의 멋있는 대사를 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페이즈 혼탁의 바벨에게 일격을 날릴 때, 아직 검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까닭인지 [쇄암식 제1형]이 온전히 발동되지 않았다. 절반만 발동됐던 느낌?
아무래도 무식하게 힘으로만 검을 휘두르면 쇄암식과 [천암격] 따위의 스킬은 사용할 수 없는 듯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잘만 발동됐는데, 아무래도 이안이 검술을 잘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스킬용 자세 정도는 익혀야겠네.’
적어도 암철검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도록 올바른 검술 동작을 연습할 필요가 있겠다.
뭐, 대충 대검 잘 휘두르는 사람 찾아가서 조언 좀 구하면 되겠지. 검술에 깊이 매진할 필요는 없으리라.
‘[혼탁의 먼지]도 줘야 하고.’
주머니에 들어 있는 큐브를 꺼냈다. 단단한 감촉. 큐브는 이질적인 잿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 큐브는 이안에게 주는 편이 좋으리라. 녀석이 빛 속성 영역을 전개하면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적에게 신성력을 미칠 수 있게 되니까.
지금까지 SSS급 기절 전문가 이안 페어리테일의 행보를 돌아보자면.
2학년 2학기 파트에 나오는 사령의 칼가르트나 사멸의 타나토스 같은 적들을 상대로 기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놈들을 상대로 신성력을 퍼붓지 못하면 배드 엔딩은 기정사실일 터.
‘그리고 잠재력.’
[ 잠재력 ]
보유 스탯 : 0
◆ 성장 속도
- 신체 단련 효율(S) : 100/100
- 마법 단련 효율(S) : 100/100
- 학습 효율(S) : 98/100
보유 스킬 <<상세>>
이제 2 스탯만 더 투자하면 성장 속도 잠재력을 모두 최대치까지 찍을 수 있게 된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2학년 1학기 중반부 쯤에 이르러서야 전부 최대치를 찍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몹시 빠른 속도였다.
‘부유섬 쓰러뜨린 게 진짜 크긴 크네.’
부유섬.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도로시의 희생 없이는 절대로 쓰러뜨릴 수 없었던 규격 외의 마족.
놈을 떠올리자 사암의 시련 도중 떠올랐던 단편적인 기억들이 소나기처럼 내 머릿속을 적셔 나갔다.
덜컥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한동안 숨을 죽여야만 했다.
1회차.
사암의 시련은 내가 잃어버렸던 기억을 어둠 속에서 조명 키듯 밝혀냈다.
모든 게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일부 기억의 편린만 엿볼 수 있었을 뿐.
1회차에서, 나는 도로시가 부유섬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시나리오를 막아 내지 못했다.
그리 상실하고, 후회하고. 그럼에도 악신을 해치우기 위한 여정을 꿋꿋하게 달려오다가.
최후에 이르러서는 비참하게 패배하고 만 것이었다.
결국, 이안은 죽었고 세계는 멸망했다.
“…….”
창밖을 내다 보았다. 흰 눈이 살랑거리며 내려와 세상을 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이 세계에 처음으로 빙의됐던 때가 떠올랐다.
단순히 내가 빙의한 상황이 ‘흔해 빠진 클리셰’라며 현실을 부정해 보기도 하다가.
이 세상이 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하며, 살아남기 위해 악신을 쓰러뜨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었지.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 빙의된 뒷배경에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당연한 거였는데.’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에 초월적인 힘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이 고민은 보류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지금으로썬 내 좋지 않은 머리로 고민해 봤자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확실한 건.’
이번 2회차에선 1회차와는 명백히 다른 결과가 있었다.
도로시를 구해 냈고.
부유섬을 이기고 폭업한 것.
그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 내 속에서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자갈 도로를 달리며 연륙교로 향하는 길. 하얀 눈송이를 쏟고 있는 칙칙한 잿빛 구름 아래, 잔잔히 파도 치는 아킨스 해의 정경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 종말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평화로운 정취가 느껴져서.
한동안 멍하니 그 풍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메르헨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늘이 먹물로 칠해져 있었다.
우선 사암의 시련에 개입했던 도로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도로시 어딨냐.’
조세나 숲 아지트에 있을까, 해서 어두운 숲길을 뚫고 찾아가 보았다.
아지트에 발광 램프 불이 켜져 있었다. 내 생각은 적중한 듯했다.
[왔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도로시의 하얀 고양이 사역마 엘라가 나를 반겨주었다.
여느 때와 같은 새침하고도 도도한 목소리였다.
“너 왜 여기 있어?”
[다 사정이 있어. 그것보다 저기.]
엘라는 턱짓으로 침대 쪽을 가리켰다.
연보랏빛 머리칼의 여신이 편안한 사복 차림으로 여기가 자기 집인 것처럼 쿨쿨 잠들어 있었다.
“도로시… 선배?”
엘라가 옆에 있어서 얼른 선배란 호칭을 덧붙였다.
[쟤, 지금 이틀째야. 자는 거.]
“이틀?”
침대 옆, 빛 가리개를 조금 연 발광 램프의 은은한 빛이 어둠 속에서 제 자리를 갖추고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도로시가 잠들어 있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그러자 엘라는 기다렸다는 듯 도도한 아가씨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로시 곁을 이틀 내내 지키느라 무척 지루했는지 투덜거림, 하소연 따위가 이야기의 8할을 차지해서 대충 걸러 들어야만 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도로시는 다른 세계선에 개입하면서 무리했던 탓에 이틀 내내 쭉 잠들어 있었고.
이토록 도로시가 지쳐 보였던 건 엘라도 처음 봤다고 한다.
‘그렇겠지.’
말만 들어도 인지를 아득히 초월하는 능력이 아니던가.
아직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녀석이 벌써 그러는 건, 이제는 재능의 영역이 맞는 건지 의문마저 들 정도다.
어쨌든, 도로시는 도로시지.
내게 가장 골치 아팠던 문제를 이 녀석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으니, 무척 고마운 마음만 들고 만다.
문득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을 허무하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회환이, 내 가슴속을 가시처럼 쿡쿡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1회차 때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여기에 멀쩡히 살아 있었다.
여기서 편안히, 천진난만하게 코를 드르렁 골면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되새기니 문득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무척 사랑스럽게 보인다.
엘라의 미묘한 눈초리가 느껴져서 애써 웃음을 참아내고 입을 가려봤지만, 기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선배 몸은 괜찮아?”
[내가 느끼기론. 아마 내일은 깨어나지 않을까?]
엘라는 침대 위로 올라가 앞발로 도로시의 뺨을 살며시 흔들며 대답했다.
그녀의 고개는 맥 없이 흔들렸다.
[얘 꽤 깊이 잠들었다? 심심해서 장난 좀 쳐봤는데 절대 안 일어나더라구. 도로시한테 마음껏 장난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그러냐.”
[그리고 나는 딴 짓을 아주 많이 하는 고양이라, 도로시한테서 눈을 떼버릴 때가 많거든. 그럴 때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로 눈치 못 채겠지.]
“아, 그래….”
[아아, 무조건 모를 거야. 확실해. 이런, 딴 짓 할 시간이네. 이제부터 네가 도로시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절대로 모르겠네.]
“……?”
갑자기 침대에서 내려와 새침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엘라.
‘얘 왜 뇌절 하냐.’
[심리 간파]를 써보았다.
[ 엘라 ]
심리 : [ 당신이 도로시 하트노바와 사랑의 결실을 맺길 바라고 있습니다. ]
“…….”
엘라, 이 녀석도 뇌신조 못지않게 음습한 년이었다.
사역마는 원래 다 이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