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9 Monologue - 막간 (3)
좁은 부스 안에서 처음 보는 상자가 신기한 영상을 내보내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큼지막한 음악 소리가 귀청을 울리는 와중.
도로시는 아이작과 함께 마이크를 쥐고 스텝을 밟으며 노래를 불러댔다.
아이작이 살던 세계의 코인 노래방이었다.
“응?”
그러던 중, 어째선지 고개가 멋대로 움직였다.
좌우로 한번, 두 번.
연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노랫소리를 뚫고 흐릿하게 들려왔다.
[얘 꽤 깊이……………. 절대 안 일어나………….]
“…….”
아, 이거 꿈이구나.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삽시간에 의식이 현실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은 미처 그런 줄 몰랐지만, 코골이가 멎었다는 사실이 그녀가 꿈에서 깨어났음을 증명했다.
깜깜한 시야. 새침한 목소리가 연신 몽롱한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엘라의 목소리였다.
“아, 그래….”
‘……!’
그리고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 아이작이었다.
도로시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그 반응을 엘라는 포착했으나, 그녀는 모르는 척 아이작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회장 왔구나.’
잠에서 깨자마자 도로시는 장난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작이 방심한 틈에 소리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 놀라게 해주자. 그는 잘 놀라서 장난치는 맛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딴 짓 할 시간이네. 이제부터 네가 도로시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절대로 모르겠네.]
아무리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도로시라고 해도, 그녀는 엘라가 한 말의 숨겨진 뜻을 못 알아채는 바보까진 아니었다.
막상 기억을 헤집어 보면, 아이작이 먼저 나서서 도로시와 신체를 접촉했던 적은 부유섬에서 말고는 따로 없었다.
물론 아이작 같이 올곧은 녀석이 자고 있는 자신에게 손을 가져다 대는 음흉한 짓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엘라가 내뱉은 발언 때문일까. 묘한 상상과 은근한 기대감이 도로시의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어째선지 도로시는 계속 자는 척이 하고 싶어졌다.
왠지 이 분위기….
‘나쁘지 않군…!’
솔직히, 조금쯤은 음흉하게 굴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가슴이 떨리고 얼굴에 열기가 올라온다. 기분 좋은 오싹거림이었다.
희대의 천재, 메르헨 아카데미의 최대 전력. 그런 수식어 따위가 곧잘 따라다니는 도로시라도, 그녀 또한 평범하게 연심을 자각한 한 명의 여자에 불과했다.
하물며 이곳은 조세나 숲 안에 있는 외딴 곳. 아이작과 둘만의 추억이 깃든 밀폐된 아지트.
이런 데서 그와 야릇한 공기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내심 바라고 마는 것이다…!
뻣뻣하게 굳은 채 도로시는 옅은 숨을 내뱉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고, 평소보다 아이작이 더욱 강하게 의식된다.
‘음?’
삐걱대는 소리. 의자에서 일어난 건가?
‘어디 가?’
아이작은 어딘가로 발을 옮겼다.
촤아아,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손을 씻고 세수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도로시 옆으로 되돌아와 의자에 앉더니, 지쳐 있었는지 깊은 숨을 내뱉는 아이작.
도로시는 눈을 감은 상태라 그의 감정을 간파할 수 없었지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구만.’
시선 탓에 이토록 또렷이 간질거리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아, 맞다. 지금 자신은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지지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입에 침 자국이 묻어있진 않을까. 설마 상태 완전 엉망인 거 아니야?
피부가 떨려왔다. 그런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
‘오오…!’
아이작이 도로시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도로시는 속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소중한 것을 대하듯 무척이나 상냥한 손길. 주인에게 쓰다듬어지길 좋아하는 강아지의 심정을 이토록 절감한 적이 있었을까.
몸이 으스스 떨리고 긴장감이 격랑처럼 일었다. 몹시 부끄러워 손가락과 발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갔으나, 그런데도 그의 손길을 좀 더 느끼고 싶다는 본능이 그녀를 물씬 휘어 잡았다.
기분이 좋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몸이 움츠러들 것 같았다.
“덕분에 잘 끝내고 왔어.”
“……!”
“정말 고맙다, 도로시.”
연이은 반말. 그것도 가라앉은 목소리.
가끔씩 아이작이 무심코 반말을 내뱉을 때면 도로시는 고개를 흠칫 떨곤 했다.
매일 정중하게 존댓말을 써대는 연하남이 함부로 말을 놓는 행위란 어찌 이리도 매혹적이란 말인가.
하물며 감각이 모조리 곤두선 상태인데, 머리까지 쓰다듬어지며 그리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여주니 황홀감으로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도로시는 좀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싶었으나.
‘크르르…! 못 참겠다, 회장…!’
몸이 과하게 뒤틀리는 느낌이라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못 참겠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남자 경험이 없는 도로시로선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선배, 일어났죠?”
그때, 도로시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아.
도로시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슬쩍 눈을 뜨고는, 태평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작과 눈을 마주쳤다.
야릇한 긴장감이 풀리자 기다리고 있던 수치심이 쏜쌀 같이 찾아왔다. 도로시는 아이작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이내, 도로시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쭈뼛쭈뼛 상체를 일으켰다. 얼굴은 더없이 새빨갛게 물든 채였다.
언제나 웃는 얼굴을 가면처럼 쓰면서 표정을 쉽게 갈무리할 수 있었던 도로시지만.
화끈거리는 얼굴을 잠재우는 방법 만큼은 아직 알 길이 없었다.
“와, 왔구나, 회장!”
대뜸 과하게 미소 지으며 부자연스럽게 텐션을 높이는 도로시.
“선배, 배는 안 고파요?”
“어, 어! 거, 엄청난 공복감이 느껴지는군…!”
부끄러움을 몰아내고자, 도로시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내보였다.
“스튜 끓여 올게요.”
“아,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아이작.
도로시는 이불을 끌어올려 고개를 파묻었다.
아이작 탓에 처음 겪게 된 감정 앞에서, 그녀는 한낮 부끄럼쟁이에 불과했다.
* * *
도로시가 잠에서 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놀라게 하려는 목적이었나 보다.
딱히 상관없었다. 고맙다는 말을 가식 없이 해주고 싶었으니까.
‘영 좋은 행동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설마 도로시가 그토록 오글거려 하면서 거부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거든…. 앞으론 자제할 필요가 있겠다.
“고기 스튜!! 닭고기도 있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도로시 모습 그대로였다. 모르는 척 배려해 주는 거구나, 자식. 감격스러웠다.
나는 고기 스튜를 끓인 뒤, 두 그릇에 덜어내고 도로시와 함께 별빛 마법으로 아지트 지붕에 올라갔다.
겨울 바람은 쌀쌀했고.
밤의 색깔로 물든 눈구름은 여전히 눈송이를 살랑살랑 쏟아 내고 있었다.
[얼음 장막]을 전개해 찬바람과 눈송이를 막아 내며, 도로시에게 따뜻한 스튜가 든 그릇과 숟가락을 건넸다.
그녀와 함께 두꺼운 담요를 덮고 한가운데에 불 속성 주문서를 모닥불처럼 사용하니 느낌이 썩 괜찮았다. 포근하고 안락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대로 우리는 짧게 간단한 수다를 떨었고.
“우리 할 얘기 많지?”
이어지는 도로시의 질문.
‘올 게 왔구나.’
아카데미에서 생활하고 마족들을 해치워 나가며 끊임없이 고민해 왔지.
그렇게 내가 그려 낸 시나리오는, 적절한 시기에 카야처럼 가장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악신을 토벌하기 위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적절한 시기는 앨리스 토벌 직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 비밀을 공개하는 섣부른 행동은 양날의 검이라고 여겼다.
상대가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드러나 버리면 곤란해질 테니.
다만, 도로시는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린 상황. 나로선 굳이 밝히려 하지 않았던 비밀도 밝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지는 돌아오는 길에 고민을 끝마쳤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도로시에게 가장 먼저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네, 뭐…. 할 얘기가 많네요.”
상태창이나 <메르헨의 마법 기사>, 본래의 시나리오는 언급하지 말자. 혼란만 가중시킬 테니까.
한겨울이라 풀벌레 울음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불 속성 주문서가 피어올린 불꽃만이 타닥대는 소리를 낼 뿐.
그 아늑한 분위기에서, 나는 조곤조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이 세계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
사실 나는 별로 강하지 않다. 하지만 마족 상대로 강해지는 힘이 있다.
마족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악신이 튀어나올 것도 알고 있다.
그리 최대한 이해되기 쉽게, 핵심적이고도 간단한 내용들을 입에 담았다.
적막.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던 고기 스튜는 미적지근하게 식은 채였다.
도로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별빛 마력에 가로 막혀 심리는 읽히지 않았다.
당장에 내 이야기가 확 와닿진 않겠지. 나는 식어 버린 스튜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도로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단련했구나.”
예상대로 도로시는 내 이야기를 털끝 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애당초 내 감정을 살피고 거짓말도 간파해낼 수 있는 그녀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고, 그간 그녀와 신뢰 관계도 쌓아왔으니 온전히 믿어 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도… 너무 시원하게 받아주는 거 아닌가. 마치 내 목적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방금 전의 대답도 마치 미리 준비해 놨던 멘트처럼 느껴져서 위화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네요.”
“니히히, 뭔가 엄청난 게 숨겨져 있을 줄 알고 있었거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던 거지. 역시, 회장은 뭔가 있을 줄 알았어.”
…어째 거짓말 같았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근거 없는 직감으로 도로시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내 기분 탓일 가능성이 농후하니 넘어가자.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천천히 알아갈게. 솔직히 방금 얘기만으로 머리에 쥐가 날 것 같거든.”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도로시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근데 꼭 동화 같다. 마왕 잡는 용사 이야기 같은 거.”
“구도는 비슷하네요.”
“그럼, 회장은 용사네?”
용사.
왠지 웃음이 툭 튀어나오는 거창한 호칭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고요히 흘러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서로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회장.”
도로시는 생각을 끝내고,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주먹을 내밀었다. 마치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도와줄게. 같이 악신을 쳐부수자.”
문득 서리의 시련 때 세상을 부수자고 했던 도로시가 떠올랐다.
그때보다도 차분해진 목소리지만, 무척 의지가 되었다.
“…저야 고맙죠.”
나는 살짝 쥔 주먹을 내밀어 그녀의 주먹에 맞대었고.
용사 파티가 결성됐다며 도로시는 배시시 웃어댔다.
* * *
메르헨 아카데미 중심부에 위치한 궁전 형태의 건물, 바르토스관.
어둠이 들어찬 총학생회실, 집무용 책상에 놓인 미약한 발광 램프 불빛만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곳에서, 기다란 연금발의 여학생이 집무용 책상을 가녀린 손가락으로 연신 툭툭 두들겨댔다.
목에 낀 흑백 체크무늬 초커, 귀에 건 흑백 귀걸이.
그녀의 존재만으로 학생회실의 공기는 시종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앨리스. 방해꾼 말이지.]
어둠 속, 응대용 소파 위에 편안히 앉아 있던 뚱뚱한 보라색 고양이가 신비로운 푸른 안광을 발했다.
괴묘-체셔. 그 마수가 씨익 웃자 새하얀 치아가 훤히 드러났다.
[역시 ‘아이작’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니?]
그 질문을 받고서 연금발의 여학생, 앨리스 캐럴은 책상을 두들기길 멈추었다.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여전히 밤하늘은 새하얀 눈송이를 쏟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