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 멘토 아이작 (3)
“여, 여태까지… 전 잘못된 단련을 해왔던 거군요….”
2시간 동안 지옥의 단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화이트에게 잔야의 지팡이를 빌려줬다. 그녀는 그것을 양손으로 잡고 땅에 짚어서 겨우겨우 중심을 잡아가며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황녀님, 역시 제가 부축해드리는 편이….”
“안 돼요…. 윽. 저 혼자서,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메를린은 수차례 부축해주겠다고 나섰지만, 자립심을 기르겠다고 다짐한 기특한 화이트는 한사코 거절했다.
훌륭한 자세야.
“아이작… 선배.”
“응.”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크윽.”
문득 이 세계에 처음으로 빙의해, 기사학부 학생들에게 지옥의 PT를 받았던 한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매일 기숙사까지 기어갔었지.
마치 그때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해 피식 미소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귀여웠다.
……
“마력을 모으고 발산하길 반복할 수록 마력 회로가 좀 더 튼튼한 형태로 재구축돼. 그러면 점차 가속화되는 마력의 흐름을 마력 회로가 버틸 수 있게 되고, 마력의 질이 높아지면서 최대 마력량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거야.”
“그, 그런 건 알고 있는데요오….”
“이 부분 다시 해 보자. …그게 아니지. 마법진은 이 형태야. 획 세 개가 틀렸어. 여기서 획의 형태는 금무야. 네가 그린 건 제야고. 금무는 좀 더 구불구불한 형태인데…, 이렇게 그리면 돼. 마력 발산 강도는 이 정도로 하는 게 좋겠다. 자, 따라해 봐.”
“주주, 죽을 것 같아요, 아이작 선배애….”
이튿날, 수국 정원 구석.
내가 동그란 안경을 들치며 설명하자, 화이트는 울상을 지었다.
“이대로 한번 더. 한번 더 바람을 일으켜봐.”
“흐아악…!”
휘우우우─!
“좋아, 한번 더.”
“흐악!”
“좋다, 그대로 한번 더.”
“흐억…!”
“그 기세야. 한번 더.”
“흐야앗…!”
화이트는 힘들어하면서도 군말 없이 내 지시를 따랐다.
심지어 나도 바위 마법을 반복해서 시전하고 있었으니, 화이트는 내게 딴지 걸 마음조차 들지 않는 듯했다.
참고로 내가 마법을 반복하고 있었던 건 단순히 시범 용도가 아니었다. 아무리 화이트를 가르치는 와중이라도, 내 단련을 게을리하고 싶지 않았던 것에 불과했다.
“흐으…! 앗!”
화이트의 코에서 빨간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재빨리 화이트에게 다가가 뒤통수를 슬쩍 잡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손수건을 그녀의 인중에 갖다 댔다.
“괜찮아?”
“……!”
화이트는 어깨를 흠칫 떨고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무에 기대고 서 있던 메를린은 놀란 얼굴로 다가오려 했으나, 화이트가 팔을 뻗어 막자 발을 멈추었다.
“…꼭 미리 중비하셨덩 것처럼 그러시네요.”
코에 갖다 댄 손수건 탓에 화이트의 입에선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아이작 성배도 이렁 일이 많았덩 거죠?”
“마력을 과다하게 사용하면 그래.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이러면 실력이 팍팍 는다? 너무 무리하면 마력 회로가 망가질 수도 있는데, 그 직전까지는 내가 가늠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미 몇 번 망가져 봐서 잘 알았다.
“성배애….”
화이트는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많이… 힝드셨겠네여….”
예상 외의 반응이었다. 코피 쏟으면 놀라서 우왕좌왕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화이트는 침착해 보였다.
“다 그런 거지.”
나는 피식 웃고 손수건을 화이트에게 넘겼다. 그녀는 인중을 덮은 손수건을 꾹 눌렀다.
“조금 쉬고 하자.”
“녜에…!”
“이거 먹을래? 마력 회복에 좋아.”
“오오! 마력푸딩 바…! 머글래여…!”
마력푸딩 바 포장을 뜯고 화이트에게 건넸다. 마력 회복에 효과가 있는 푸딩 식감의 간식이었다.
이번 학기부터 출시됐으며, 상점에서 마력 회복에 좋다는 광고를 버젓이 달고 판매하고 있어서 학생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한 것이었다.
다만, 화이트처럼 최대 마력량이 적은 사람한테나 미미한 효과가 나는 수준이었다. 즉, 허위 광고지. 그래서 마력 회복에 좋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은 화이트에게 ‘내 마력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라는 인식을 갖게 해 심신 안정에 도움을 주고, 단련에 더 열을 올리게 만들어줄지도 몰랐다. 플라시보 효과처럼 말이다.
무엇보다도, 이거 되게 맛있다. 나는 선호하지 않지만. 단 걸 많이 먹으면 몸이 둔해지고 단련에 방해되거든.
화이트는 힘든 와중에 맞이한 달콤한 간식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해하는 얼굴로 마력푸딩 바를 한 입 베어 먹으려 했고.
“황녀님.”
“……!”
그때 메를린이 나서서 먼저 한 입 먹기로 했다. 혹여나 독 같은 게 들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상대가 나라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푸딩 바를 내주었고, 메를린은 거의 반절이나 한입에 처먹었다.
“으아앙…!!”
화이트의 입에서 울음기 섞인 비명이 튀어나왔으나, 메를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없군요.”하고 태평하게 돌아갔다.
화이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나마 남은 푸딩 바를 우물거리며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마싰써….”
망연자실한 표정과 슬픈 목소리였다.
잠깐의 꿀 같았던 휴식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단련에 돌입했다.
“화이트, 한번 더!”
“크아악…!”
털썩.
잠시 후, 화이트는 탈진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
봄하늘이 노을빛으로 찬연했다.
지옥의 마법 PT를 마친 화이트는 이번에도 내가 빌려 준 잔야의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허리디스크 걸린 사람처럼 비치적비치적 걸어 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수국 정원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며칠째 반복 중인 일과였다.
그녀는 오늘도 몇 차례 쓰러져서 교복이 더러웠고, 순백색 머리칼에도 일부 흙이 묻어 있었다.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댔다. 이게 정녕 황녀가 맞을까, 싶을 만큼의 몰골이니까.
황녀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지금의 화이트에겐 그럴 여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만큼 개고생한 적도 없을 테니까. 화이트를 가르쳤던 엘리트들도 권력 눈치 보느라 쉬엄쉬엄 교육했을 텐데.
메를린은 혹여나 화이트가 넘어지지 않을까, 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얘는 얘대로 안쓰러웠다.
“아이작 선배.”
“응?”
“선배처럼 실력 기르는 거, 예상은 했지만 정말 고된 일이었네요…. 그래도 요즘 아이작 선배 덕분에 눈에 띄게 마력이 잘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강해지는 기분…!”
“잘하고 있어. 그대로만 하면 돼.”
화이트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 칭찬이 기분 좋아서 툭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는 눈치였다.
단련을 거듭할 수록 [심리 간파]를 통해 보았던 화이트의 심리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이렇게 힘든 걸 반복하고 반복해 급성장을 이룬 내가 멋있는 모양이었다.
‘난 상태창 빨이지만.’
상태창이 없었으면 필시 한계에 봉착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리 존경 받을 그릇이 못 된다.
반면에 화이트는 아직 제대로 된 단련을 해 본 적이 없었을 뿐. 막상 제대로 구르면, 그녀도 높은 경지까지 성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황족의 피는 헛된 것이 아니니까.
하물며 화이트의 숨겨진 힘은 「요정 대전」을 좌우할 열쇠이기도 했다. 그녀의 죽음이 배드 엔딩으로 직결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화이트가 없으면 안 돼.’
나는 화이트를 성장시키고, 지켜내면서, 빌런을 쓰러뜨려 배드 엔딩을 기어이 막아 낼 셈이었다.
겸사겸사 그녀가 발산하는 마력을 곁에서 쐬며 누릴 것도 있었다. 햇빛을 쬐며 광합성하는 식물처럼 말이다. 내가 좀 더 효율적으로 세지려면 역시 이 아이가 필요했다.
“저기, 아이작 선배. 혹시 원하는 거 없으세요?”
“원하는 거? 갑자기?”
뜬금없네.
“저도 겔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라 지금 당장은 많은 걸 못 드리지만…, 그래도 언젠간 보답해주고 싶어서요. 덕분에 강해지고 있으니까요!”
“아, 그런 거라면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푸흐! 망설임이 없으시네요…!”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취할 건 취해야지.
“말씀해 보세요. 웬만한 건 들어드릴게요. 뭔가요?”
“그냥 가끔.”
나는 화이트의 호위 기사, 메를린 아스트레앙을 가리켰다.
“이 분 좀 빌려줘.”
메를린 아스트레앙.
그녀는 검성의 딸이자 무기술의 천재다. 전술했듯 그녀에게 검술 교육을 받는다면 암철검 스킬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스승이지.
아, 이 기회에 낫술도 쓸 만한 기술 정도는 익히는 편이 좋겠다. 되도록 마법 단련에 집중해야 할 테니 무기술에 그리 많은 투자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아아, 메를린이요? 그거야 물론…, 어? 자, 잠깐, 그건 안 돼요오…!!”
화이트는 기겁했고, 메를린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마.
* * *
“즐거워 보여….”
메르헨 아카데미 건물 위. 마녀 모자를 쓴 여학생이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자를 꾹 누른 채 수국 정원 쪽을 바라보며 투덜댔다.
뾰로통한 얼굴. 그녀의 끝 부분만 묶인 기다란 연보랏빛 머리칼이 봄바람에 휘날리며 노을빛을 반사시켰다.
도로시 하트노바였다.
[그냥 가서 말 거는 게 어때?]
옆에 누워 있던 하얀 고양이 사역마 엘라가 묻자, 도로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리를 휘적였다.
“멘토링 제도? 그런 거 한다잖아. 회장을 방해할 순 없지. 거기다 멘티가 황녀라는데 어떻게 건드리겠어….”
[너무 유해졌네. ‘멘티야, 나야?’ 이 질문 하나면 끝날걸.]
“이 고양이 자식, 회장을 곤란하게 하면 못 쓴다?”
[그것보다, 네가 원래 신분 같은 거 신경 쓰는 애였나? 너한테 어울리는 건 멧돼지 같은 저돌맹진 아니야?]
도로시는 훗, 하고 조소를 내뱉곤 의기양양하게 자기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멍청하긴, 나처럼 조신한 여자가 또 어딨다고. 날 비유하고 싶으면 멧돼지가 아니라 우아한 백조를 가져오라구.”
[퍽이나 어울리겠네. 근데 진짜로, 요새 부쩍 조심성이 많아졌다 너?]
“난 원래 그런 사람인데?”
[벌점 만점.]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자고.”
[호락호락하지 않네…. 뭐, 아이작이랑 미래를 그려야 해서 더 이상 사고 치면 안 된다는 사고의 전환이라도 있었나?]
“…냐하하학! 거, 어, 엄청난 상상력이야! 나를 감탄시키다니 굉장하군, 엘라!”
정곡. 부끄러워서 부정하는 꼴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엘라는 실소를 내뱉었다가, 이윽고 진중한 얼굴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있지, 진짜 이유는 뭐야? 요즘 아이작을 몰래 감시하는 이유.]
도로시는 다시 아이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황녀 스노우화이트, 호위 기사 메를린 아스트레앙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수국 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회장을 중심으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거든.”
주신 만할라의 축복을 몰아 받았다고 전해지는 희대의 천재. 별의 요정 스텔라와 계약을 맺은 선택 받은 소녀.
도로시의 마나 감지력은 웬만한 천재들보다도 아득히 뛰어난 수준을 자랑했다.
그런 만큼 미지의 위험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는 비상식적으로 예민한 감각이 그녀에게 있었다. 저번 학기에 부유섬이 오리란 직감이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뭔가가 회장을 노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게 만약 위험한 거라면… 내가 처리해야겠지.”
도로시에게 아이작이란 무척이나 각별한 존재였다.
하물며 목숨까지도 빚졌으니, 그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각오가 그녀에게 있었다.
만일 자신이 느낀 대로 그에게 해를 끼치려는 존재가 있다면.
도로시는 아카데미고, 권력이고, 세계고, 뭐든지 뒤엎어서라도 아이작을 우선해서 지킬 생각이었다.
엘라는 한숨을 내뱉었다.
[사랑꾼.]
“푸헉! 우, 웃기는 소릴 하는구만, 거참!”
엘라의 한 마디에 도로시는 얼굴을 붉히며 크게 당황했다. 그녀의 진지했던 분위기는 그리 30초도 채 넘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