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멘토 아이작 - 막간
화이트의 심리를 읽어보았다.
‘…겔 없구나.’
단숨에 사정을 짐작했다.
화이트는 소유 중이던 겔을 전부 소진하고 굶주렸던 모양이었다.
자립심을 기르겠다는 맹세, 자기 생활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그 일념이 그녀를 이리도 내몬 것일 터.
어디에 겔을 그렇게 많이 썼느냐, 한다면… 역시 단련 상품이겠지. 요즘 내게 이것저것 자랑해댔으니까.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냐.
“빵이 이렇게 맛있는 건 줄 몰랐어요….”
어둑한 정원. 가로등이 불빛을 내리쬐고 있는 벤치에서 나와 화이트는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감격의 눈물까지 눈가에 머금은 채 빵을 우물거렸다. 처량하네, 참.
“저분은 계속 저기 있겠대?”
나는 가로등의 빛이 닿지 않아 어둡게 그늘진 나무 쪽을 쳐다보았다.
메를린 아스트레앙의 금안이 안광을 비추고 있었다.
“가까이 있으면 마음 약해진다고 거리 좀 벌리겠대요. 제 문제는 제가 극복하라면서….”
자신을 억제하려고 일부러 손이 안 닿는 곳까지 거리를 벌린 건가.
이해는 간다. 화이트가 공복에 괴로워하는 꼴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으면 도와주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 테니.
메를린은 화이트의 다짐과 각오를 존중하고 싶겠지.
참고로 내가 메를린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화이트가 빵을 먹으려 하자 갑자기 튀어나와 한 입 먹고 갔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독이 들어 있지 않은지 확인하려고 그런 것이었다.
상황은 이해 갔지만, 눈앞에서 빵만 먹고 도망치니 꽤 황당했다.
“…아이작 선배는 정말 쉴 틈 없이 단련하시네요.”
나는 오른손에 쥔 마력기로 마력을 계속 순환시키고 있었다. 뜀박질하는 중이거나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하는 소박한 단련이었다.
화이트는 빵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그녀의 뺨이 볼 안에 음식을 저장한 햄스터처럼 부풀었다.
“쩝쩝….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세요?”
“성적 잘 나오면 기분 좋으니까. 미래도 보장되잖아. 나름 향상심 같은 것도 있어. 너는?”
“아. 저, 저도 비슷해요…! 향상심이죠, 향상심!”
“그래?”
실력을 길러서 무녀, 성녀와 친해지는 것이 화이트의 목표다. 그런 목표만을 입에 담기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애가 왜 굶고 있었어? 넌 겔 달라 하면 줄 사람 차고 넘치잖아.”
화이트에게 잘 보이려는 학생은 줄을 섰다. 황녀라는 지위 때문이었다.
얘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그건… 좀 별로예요.”
“왜?”
“보답해야 할 것 같잖아요. 전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또,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기 이익 챙기려고 절 이용하려는 경우가 태반일 텐데. 그런 사람에게 보답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는 건… 정말 싫거든요.”
아, 그랬지.
화이트는 부채의식을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그저 불편하다고 느낀다. 오히려 자신을 등쳐먹으려는 사람처럼 보일 터였다.
그 정도로 화이트에게 인간불신이 뿌리를 내린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암살 당할 뻔했으니까.’
화이트는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몇몇 사람에게 목숨이 노려진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그 배후가 자기 어머니였으니, 얘한텐 여간 충격이 아니었겠지.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렇다고 굶는 건 좀 그렇다.”
“제 잘못된 행동이 낳은 결과니까요. 저 스스로가 감당해야겠죠….”
말은 기특했다.
“아이작 선배. 이건 빚이에요. 아이작 선배에게 지는 빚.”
빵을 바라보며 말하는 화이트.
빚이라. 그렇게 받아들이는 편이 화이트에겐 마음이 편할 것이었다.
“쩝쩝…. 이 빚은 언젠간 꼭 갚을게요.”
“…이자까지 쳐서 갚아라.”
“네에, 무조건!”
화이트는 내가 해피 엔딩을 맞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빚을 지우게 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오히려 이러는 편이 화이트가 좋아할 테고.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작 선배.”
“응.”
“저 보증…, 아니, 겔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잠깐 소름 돋는 단어가 들렸으나 모르는 척했다.
화이트는 마력량도 적고 성적도 밑바닥이다. 아카데미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계획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얜 아니잖아.
하물며 다음 시험까지 버틸 수 있는 금전이 없으니, 결국엔 내게서 겔을 빌리기로 다짐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열심히 단련해서 겔 많이 따라. 못 갚겠으면 책임 질 각오하고.”
살길을 찾은 화이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고, 고마워요, 아이작 선배애…! 꼭 책임지고 갚을게요!”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게 강한 화이트이기에 돈 먹고 튈 걱정은 없었다.
괜히 부채의식을 싫어하는 애가 아니다. 얘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무를 상환할 것이었다.
“그런데 평민한테 빚진 황녀는 네가 처음 아니야?”
“그럼 이것도 나름 제르베르 역사의 한 장면이네요!”
치욕의 역사 한가운데서 화이트는 농담이라는 듯 배시시 웃었다.
마음의 짐이 덜어졌는지 그녀는 한층 편안해진 표정으로 정면을 쳐다보았다.
빵을 먹던 입이 뚝 멈추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있죠, 아이작 선배.”
“응.”
“아이작 선배는 절 편하게 대해 줘서 좋아요. 저도 편해지는 느낌이거든요.”
“그래?”
“그러면서도 단호할 땐 단호하고. 수련할 땐 가차 없고. 진짜 스승 같은 느낌?”
“너무 높게 쳐주는 거 아니야? 고작 멘토인데.”
“아이작 선배 같은 분을 뵌 적이 없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얼굴 보고 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 …아무튼, 그렇다구요.”
스노우화이트는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졌으면서도 신분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학생 간 신분 관계를 완화시키는 아카데미 풍토를 빌미로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나 같은 평민에게도 이런 취급을 해주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순백이란 표현이 잘 어울리는 외형처럼 세상 떼에 찌들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래서 이 아이에겐 역시 정감이 가고 만다.
나는 선한 미소를 짓고서 손을 내밀었다.
“…다음 시험 잘해 보자, 화이트.”
“네에, 아이작 선배.”
화이트는 활짝 웃으면서 내 손바닥을 쳤다.
짝, 소리가 밤공기에 퍼져 나갔다.
* * *
밤하늘. 가로등이 비추는 길.
검은 토끼 귀 리본을 장식한 하얀 단발 머리 여학생, 에이미 할로웨이는 이안 페어리테일과 단련을 마치고 생활동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둘 다 땀에 젖은 훈련복 차림이었다.
문득 에이미는 정원 방향에서 청은발의 남학생, 아이작과 순백의 황녀, 스노우화이트가 함께 벤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다.
에이미는 멈칫했다.
“왜 그래, 에이미?”
흑발의 남학생, 이안도 발을 멈추었다. 에이미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하고 그의 말을 막았다.
아이작. 요즘 황녀 스노우화이트의 멘토가 되었다지.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평민 멘토와 황녀 멘티의 조합은 메르헨 아카데미가 아닌 이상 상상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점에 별다르게 의심할 점도 없었다.
에이미는 할로웨이 가문의 가계 마법, [심색 분별]로 아이작이 지닌 마음의 색을 살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된 후로 아이작을 볼 때마다 반복하는 행위였다.
그 색깔의 형태를 빈틈 없이 외우고 싶었고.
아이작이 이름 없는 영웅인지 확신을 얻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 색.”
“뭐?”
푸르고, 주황빛.
몇 번이고 쳐다봐도 아이작이 가진 마음의 색은 얼핏 보았던 이름 없는 영웅의 것을 연상케 했다.
문제는 그 이름 없는 영웅의 마음이 무슨 색인지 제대로 못 봤다는 것. 마치 눈앞에서 지나갔던 화살의 색을 떠올리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를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에이미는 항상 같은 질문에 도달하곤 했다.
만약 아이작이 진짜로 이름 없는 영웅이라면 어쩔 것인가?
‘추궁해야겠지.’
할로웨이 백작가 차원에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건 이안 페어리테일과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것이었다. 메르헨 아카데미는 그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 될 터.
하지만 작년에 메르헨 아카데미에는 잦은 빈도로 마족이 출현했고.
이름 없는 영웅은 수차례 마족을 해치우고 이안을 지켜 주었다. 하물며 아스트레앙 공작령에선 자신을 구해주기까지 했잖은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 대마법사를 지원해주기 위해서.
에이미는 이름 없는 영웅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것이었다.
“……?”
그리 아이작을 바라보던 중, 에이미는 뜻밖에 황녀 스노우화이트가 가진 마음의 색까지 엿보게 되었다.
“뭐야, 저거?”
“에이미?”
에이미는 오싹한 감정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냐, 가자~.”
이안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에이미.
이안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뒤따랐다.
[심색 분별]로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필요할 때가 아니면 하지 말자는 게 에이미가 어렸을 때 했던 다짐이었다.
그 사람에게 선입견이 씌워지니까. 그럴 때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일은 없었다.
그래서 에이미는 황녀가 가진 마음의 색은 보지 않았다고 여기기로 했다.
저분은 그저 선량한 스노우화이트 황녀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었다.
가로수길을 걷던 중, 이안은 긴장한 목소리로 “혹시나 묻는데 너, 아이작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라고 물었고.
에이미는 “설마 질투하는 거야?”하고 뺨을 붉히며 즐거워했다.
……
[니오옹. 앨리스의 전언이야.]
검은색과 붉은색 체스 무늬로 이루어진 장소, 앨리스의 미궁.
계단 위, 호화로운 여왕의 의자에 정장 차림의 보라색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괴묘-체셔였다.
의자 양옆에선 정장 차림의 검은 토끼, 흰 토끼가 괴묘를 향해 붉은 부채를 살살 흔들어 댔고.
팔라딘 4명은 괴묘 앞에 나란히 선 채 앨리스의 전언을 전해 들었다.
[합동 전술 평가 때 심해에서 마족 하나가 튀어나올 거야. 정확히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는 몰라.]
괴묘-체셔가 입은 정장이 터지려 하고 있었다. 뚱뚱한 체형 탓이었다.
[검은 괴물은 그 마족을 처치하려 들겠지. 하지만 그 전에, 검은 괴물도 너희들이랑 같은 시험을 치를 지도 몰라. 걔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실력 감추고 정체를 숨기고 있잖니. 어쨌든, 검은 괴물의 계획을 저지하는 것이 너희들의 목적! 검은 괴물의 정체를 밝혀내기까지 하면 금상첨화!]
괴묘가 앞발을 들며 소리치자, 복부 쪽 셔츠 단추가 툭 떨어져 나가 털로 뒤덮인 뱃살이 드러났다.
[마족이 빛의 아이를 해치우고 이 세계가 멸망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도우라구! 니오옹!]
스페이드 남학생은 불만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트 여학생은 뺨을 붉히며 싱긋 웃었다.
클로버 남학생은 선한 인상에 어울리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몬드 여학생은 아무 반응 없이 무덤덤할 뿐이었다.
[아차, 그리고 앨리스의 전언 하나 더.]
괴묘는 앞발로 턱을 괴고 태평하게 말했다.
[죽지 말 것. 너희들 모두 앨리스의 소중한 부하들이니 말이야~.]
무거운 긴장감이 오갔다. 팔라딘 4명은 눈을 지그시 깜박였다.
상대는 자신들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는 미스터리한 대마법사.
9성급 마법을 사용할 줄 알며, 부유섬마저 단신으로 해치운 규격 외의 존재.
하지만 팔라딘에게는 각자의 각오가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고 해도, 자신이 섬기는 여왕님의 뜻을 실현시키겠노라고.
그들은 왼팔을 허리 뒤로 넘기고, 오른손을 가슴에 붙이고서 상체를 살며시 숙이더니.
모두 같은 말을 읊조렸다.
모든 것은 여왕님의 뜻대로.
……
얼마 뒤.
합동 전술 평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