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8 합동 전술 평가 (5)
진분홍빛 화염이 범람했다. 하트 팔라딘, 셰라 헥토리카의 화염 마법이었다.
셰라는 학생을 만나는 족족 가볍게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화염 앞에 대항할 수 있는 1학년생은 없었으니.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보잘것없는 1학년생들을 탈락시키는 일이 아니었다. 개미처럼 시시한 놈들을 짓밟아봤자 조금도 즐겁지 않으니까.
셰라는 으으, 하고 짜증을 냈다.
‘포식자 어디 있냐고…!’
미로처럼 복잡하고 드넓은 이곳, 옥토버스관에서 팔라딘의 목적은 모두 같았다.
포식자 사냥. 그중 얼음 속성을 집중적으로 노려야 했다.
미리 얘기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팔라딘은 시험 규칙을 들었을 때 포식자를 노려야 한다는 걸 알아챘다.
검은 괴물, 이름 없는 영웅의 계획을 방해하고, 그가 누군지 밝혀내는 것이 그들의 목적.
만약 그가 이 시험에 끼어들었다면 포식자일 거라고 그들은 판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작년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1학년 시험 때 마족이 자주 출현했고, 그럴 때마다 검은 괴물도 함께 나타났었으니까.
검은 괴물이 학생이라면 지금은 2학년생일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검은 괴물이 이곳에 없더라도 손해는 없었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
옥토버스관을 나도는 중, 어느 넓은 공간에 이른 때였다.
별안간 강한 마력이 돌풍처럼 불어와 셰라의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반대편 통로 쪽에서 느껴지는 마력이었다.
셰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한 여학생이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셰라를 발견하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교복 리본에 달린 2학년 파란색 보석 브로치. 머리 위로 떠 다니는 5개의 푸른 마법진.
셰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루체 엘타니아….”
드디어 자신을 즐겁게 해 줄 상대가 나타났다.
포식자와 마주치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으로선 루체 엘타니아 상대로는 절대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걸, 셰라는 온갖 전투 경험으로 알아챘다.
바라던 바였다.
화염 마법진을 전개하는 셰라.
대화할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원소 마법을 쏟아부었다.
* * *
화이트의 회중시계는 내 기억과는 달랐다. 그 까닭은 아직 알 수 없었다.
새로운 변수를 발견한 탓에 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떠올라 머릿속을 이리저리 휘저었으나.
지금은 그 생각을 보류해야 했다. 슬슬 심해괴수가 출현할 때가 됐으니까. 시험용 팔찌에 있는 시계를 보고 알아챘다.
빙결 해제로 얼음 의자를 없앤 뒤, 엘트라 해 방면 통로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걸으면서 쉬지 않고 [천리안]으로 팔라딘을 살폈다.
짐작컨대, 놈들은 나 같은 포식자 사냥에 나섰던 모양이었다.
시험이 시작됐을 때 사교성 좋은 모범생을 연기하는 클로버 팔라딘을 제외하고, 나머지 팔라딘은 팀에서 빠져나가 무서운 속도로 학생들을 처치해 나갔으니.
그들은 내가 이번 시험에 끼어들었다고 가정하고 움직이는 듯했다.
‘내가 최소 2학년 이상이라 봤겠지.’
작년에 여러 마족이 마법학부 1학년 시험 때 출현했고, 그때마다 검은 괴물도 나타났었으니까.
그리고 합동 전술 평가가 진행되는 동안 심해괴수가 출현하는 엘트라 해를 포함해, 목적지는 모두 결계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
작년에도 검은 괴물은 시험 일정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이번 시험에서도 그럴 지도 모른다고 팔라딘은 생각했으리라.
즉 검은 괴물이 정체를 숨기고 마족을 사냥하기 위해, 이번 시험에 개입했으리란 가능성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옥토버스관은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점.’
이곳은 드넓은 섬의 밑 부분을 뚫어서 만들어 낸 시설이다.
평소엔 출입 금지라 내부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며, 이는 학생회장 앨리스 캐럴조차 예외가 아니다.
옥토버스관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미로 같은 시설이라 나침반이 필수지.
여기서의 나침반은 시험용 나침반이다. 오로지 목적지 방향만을 가리키며, 그 외엔 지도만 표시해주는 용도였다.
나침반을 갖고 있더라도 엘트라 해가 목적지로 설정된 게 아니라면 팔라딘에게 지도 기능 외에는 쓸모가 없을 터.
얼마 안 가 심해괴수가 출현할 텐데도 팔라딘이 아직 내 쪽으로 오지 못한 것이 그들이 옥토버스관을 헤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선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이었다.
물론 심해괴수가 출현하면 누구든지 강한 마력을 느끼고 엘트라 해 방향이 어디인지 특정 지을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볼 장 다 보면 끝날 일이지.’
심해괴수가 출현하면 시험용 팔찌는 기능을 상실하고 완전히 고장 나 버린다. 놈의 패시브 스킬 [마력 갈취]의 효과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본 기억에 따르면, 학사 측에선 수많은 학생의 위치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기에 탈락한 학생들의 위치를 체크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었다.
즉, 굳이 눈에 띄는 행동만 보이지 않는다면 학사 측에 의심을 살 일은 웬만해선 없을 터.
심해괴수가 출현하면 얼마 안 가 옥토버스관의 모든 출구가 자동으로 봉쇄되고.
마족 출현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작년 한 해 동안 헤겔 마탑이 개발해낸 견고한 보호 마법이 작동된다.
나를 포함해서 옥토버스관에 있는 누구든지 쉽게 뚫기는 어려우리라.
‘즉, 적절한 타이밍은.’
심해괴수가 출현한 이후.
출구가 봉쇄되기 전에 엘트라 해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타이밍 잘 재서 나가면 된다는 얘기다.
엘트라 해안에 대기 중인 시험 감독관은 심해괴수가 출현하면 학생이 없다는 조건하에 집결지로 후퇴한다. 그 조건은 내가 성공적으로 충족시켰지.
현 상황으로 돌아가서.
하트 팔라딘은 루체 엘타니아와 마주쳤다. 변수가 없다면 루체가 승리할 터.
나머지 팔라딘은 엉뚱한 방향에서 나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다이아몬드 팔라딘은 어느 조를 해치우고 나침반을 가져갔다.
엘트라 해로 이어지는 나침반이었다. 침이 가리키는 방향은 내가 가려는 방향이었고, 나침반 겉면에도 ‘엘트라 해안’이라고 적혀 있어서 파악이 가능했다.
팔라딘은 엘트라 해 방향도 알아야 하므로, 다이아몬드 팔라딘은 필요한 나침반을 찾아낸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여담으로, 바보 같은 셰라는 포식자부터 잡을 생각에 신이 나서 섣부르게 단독 행동에 나섰던 모양이었다.
자기 팀 나침반이 엘트라 해안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모르고,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팀을 떠나버렸으니까.
‘뭐, 괜찮겠지.’
운이 좋게도 다이아몬드 팔라딘은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길을 빙빙 돌아야 하는 처지였다.
역시 오늘 만큼은 행운의 여신은 내 편 맞다. 저 녀석에게 방해 받을 일은 없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나아가던 중.
“…뭐야?”
…나도 모르게 발이 멈추고 말았다.
[천리안]에 집중했다.
별안간 이마에 금빛 다이아몬드 문양이 새겨진 여학생, 알렉사의 기상천외한 행동에 헛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그녀가… 내가 나아갈 진로를 향해, 벽을 부숴가며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콰앙─.
콰앙─.
여기까지 폭음이 들렸다. 점점 가까워져 간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공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땅도 쿠우웅, 하고 울리고 있었다.
옥토버스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도 모두 당황해서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아니, 미친. 저건 에바잖아…! 시험 치르러 왔는데 시험장을 부수는 몰상식한 사람이 어디 있냐고…!
설마 무식하게 길을 개척해 나갈 줄은 몰랐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콜럼버스도 그 기개에 감탄할 것이었다.
저 굵직한 벽이 뻥뻥 뚫려간다. 나도 나름 주먹으로 나무나 바위 정도는 부술 수 있지만, 다이아몬드 팔라딘은 차원이 달랐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잰걸음으로 통로를 가로질렀다.
예상대로 시험 감독관이 다이아몬드 팔라딘, 알렉사를 막으러 갔으나.
그녀는 시험 감독관을 바위 마법으로 공격하고 기절시켜 버렸다. 무표정으로 날린 무자비한 일격이었다. 징계 스택을 차곡차곡 쌓고 있구나….
‘진짜 막 나가네.’
앨리스가 저렇게 눈에 띄는 짓을 벌이라고 입학시킨 게 아닐 텐데.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이란 말은 취소다. 그 여신은 변덕쟁이다.
이대로 가다간 경로가 겹친다. 엘트라 해까지 가는 길에 반드시 마주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빠르게 달려서 먼저 엘트라 해까지 가는 건 좋지 못했다.
아직 내 위치는 시험용 팔찌로 감시되고 있기에 서툰 행동은 금물.
게다가 출구 밖엔 시험 감독관이 있었다. 그가 집결지로 후퇴하기 전까지 출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우선, 알렉사와의 승부는 피할 수 없겠다.
그녀의 진로는 일직선.
지금부터라도 합동 전술 평가의 온갖 함정과 이용할 만한 것들을 최대한 상기해 그녀를 어떻게 습격할지 대안을 짜내는 편이 합리적이리라.
“어?”
이윽고,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한 사내가 오만방자한 미소를 띤 채 다이아몬드 여학생, 알렉사 앞을 가로막았으니.
“트리스탄…?”
허영심 많은 금발 귀족, 트리스탄 험프레이였다.
* * *
콰앙!
벽면에 걸린 램프가 빛을 내리쬐고 있는 넓은 공간. 수 갈래 길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
강력한 바위 마법이 벽을 뚫었고, 이마에 사각형 다이아몬드 문양이 새겨진 여학생 알렉사가 튀어나왔다.
“하!”
“……?”
대뜸 짧은 실소 소리가 알렉사의 발을 멈추게 했다.
벽이 부서지며 일어난 흙먼지 속, 금발 남학생이 알렉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후배 중에 건방진 놈이 많다고 들었다만….”
흙먼지는 금세 사그라졌고.
금발 남학생의 넥타이에 달린 브로치가 아쿠아마린빛으로 한 차례 반짝였다.
“설마 시험 취지까지 부수려는 어리석은 녀석까지 있었을 줄이야.”
그는 포식자. 마법학부 2학년 B 클래스 2등, 트리스탄 험프레이였다.
허공에 새겨진 알렉사의 바위 마법진이 트리스탄을 노렸고.
트리스탄이 단숨에 전개한 4개의 바람 마법진이 일제히 알렉사를 겨냥했다.
마력의 파동이 충돌해 격한 돌풍이 한 차례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
알렉사는 트리스탄의 마력을 느끼고 자신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기에 그녀는 의구심을 느꼈다.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두려움에 잡아 먹힌다면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으리라. 작년 1학기 학기말 평가 때, 루체 엘타니아의 마법에 허무하게 휩쓸린 뒤로 얻었던 트리스탄 험프레이만의 교훈이었다.
돌아보면 그랬다. 학기말 평가 때 루체가 나타나기 전. 건방진 평민, 아이작은 A 클래스 학생들과 트리스탄 자신을 포함한 많은 적을 앞에 두고도 망설임없이 전투 태세를 갖췄었지. 그에게선 일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의지. ‘내가 네놈들을 쓰러뜨리겠다’라는 의지가 그의 눈에 일렁이고 있던 걸 트리스탄은 기억했다.
겨울 방학 동안 그 기억을 되새기니, 아이작이 자신보다 위에 설 수밖에 없는 놈이라고 트리스탄은 납득하고 말았다. 절로 이가 갈리는 깨달음이었다.
그렇기에 죽어라 단련했다. 아이작에게 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트리스탄의 겨울방학은 피나는 단련으로 빼곡하게 점철되어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지 넘어서리라고, 그의 의지가 사납게 일렁였다.
눈앞에 있는 알렉사란 후배가 얼마나 강한지는 마력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두려움조차 못 느끼는 사람처럼, 가소롭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 우월한 내가! 네 녀석을 친히 교육해주마!”
크하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는 트리스탄.
이내, 그는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헛기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