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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157화 (157/334)

〈 157화 〉 반지 (3)

* * *

“정리해 보자면, 마족을 해치워서 얻은 마도무기가 그 스토커 친구에게 잘 맞는 거였고, 그래서 그걸 줬다?”

“네.”

“그게 왼손 약지에 끼워야 효과가 발휘된단 거지?”

“잘 이해하셨네요.”

오늘 수업에서 이해한 내용을 원소 마법 단련에 써먹으면서, 도로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숨길 것도 없었으니까.

도로시는 내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 설명하기도 편했고.

애당초 감정을 간파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 탓에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루체는 악신 토벌전 때 도움 될 거예요. 그 애 전력 강화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알아. 전에 말해줬잖아. 뭐…, 별로 재밌는 얘긴 아니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도로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나무에 기대앉아 있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펼쳐진 책으로 눈길을 돌린 채였다. 옆에 떠 있는 별빛 마력이 조명처럼 빛을 흩뿌리며 그녀의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비추고 있었다.

“…….”

딱히 더 할 말은 없었다.

이러면 보통 도로시가 다른 화젯거리를 꺼내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데, 오늘따라 상당히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의 그 무거운 느낌. 찝찝하네. 도로시랑 같이 있으면서 이 정도로 분위기가 침잠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내, 도로시는 책을 덮었다. 텁, 하는 소리가 들려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야?’

도로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곤 엉덩이를 툭툭 턴 뒤, 장난스러운 미소로 나를 쳐다보았다.

“회장, 이 누나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벌써?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생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가볍게 손을 흔드는 도로시.

“…….”

께름칙한 기분.

영문 모를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무 사이로 자취를 감추어가는 도로시의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오늘처럼 도로시가 기운 없어 보이는 때는 내가 기억하기론 없었으니까.

* * *

“느하아아….”

최상위권 기숙사, 샤를관.

창문을 뚫고 달빛만이 들어오는 그곳에, 도로시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에 엎어지더니 고개를 파묻었다. 독특한 침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수납장 위에 앉아 있던 하얀 고양이 사역마, 엘라는 피식 웃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지금 도로시의 생각을 추측해볼게. ‘회장한텐 나만 있는 게 아니었는데. 내 팬이다 뭐다, 하면서 완전히 방심하고 말았다’.]

“시끄러워, 고양이 자식아.”

[‘루체, 걔는 마도무기를 받았으면 싸울 때나 낄 것이지,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온종일 끼고 다니는 건데? 기억력도 좋으면서, 왜 자꾸 반지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내내 쳐다보고 다니냐고’.]

“끄으….”

도로시는 단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이봐, 엘라.”

도로시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엘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볼이 찐빵처럼 침대 시트에 눌렸다.

오늘 보았던 루체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이 턱턱 막혀온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회장의 사정이야 머리로는 이해가 가거든? 그래도 뭔가 답답해. 이런 기분 처음이야. 닭고기도 소화가 안 되는 것 같고, 영 더러운 기분….”

[닭고기 좀 적당히 먹지 그래?]

엘라는 도로시를 다그치고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부여잡았다.

드디어, 느슨해진 도로시의 연애사에 긴장감을 불어 넣어 줄 위기가 찾아왔다.

루체 엘타니아. 마법학부 2학년 수석. 1학년 때부터 아이작과 깊은 인연을 쌓아왔으며,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단아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학생.

이제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인 반지를 볼 때마다, 도로시는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고 말겠지.

덕분에 도로시는 루체라는 연적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며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오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기까지 했다.

가끔 보면, 루체는 아이작과 신체접촉을 거리낌 없이 하는 편이었다. 어깨나 정수리에 자연스레 턱을 올린다거나, 팔짱을 서로의 어깨 위에 올린다거나….

하물며 겉보기엔 연인 같은 행위도 서슴지 않았지.

동급생이자 친구로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척이나 거리감이 없어 보였다.

반면에 도로시는 어떠한가.

선후배 사이인 탓에 아이작은 도로시에게 예의를 차리는 편이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루체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얘기다.

그런 깨달음이었다.

[루체 엘타니아가 부러운 거지?]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엘라는 수납장에서 뛰어내려 침대 위에 안착했다.

그러더니 도로시 얼굴 앞에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엘라.

[도로시. 아이작은 루체에게 마도무기를 줬을 뿐이야. 물론 그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아마 아주아주 큰 진전을 이뤘겠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가만히 있을 거야?]

“…….”

도로시는 상체를 일으키고서 양반다리 자세로 앉고는, 엘라를 내려다보았다.

“너라면 어떡할 건데?”

[진도 뺄 거야. 아이작이 널 보게 해야지.]

새침하게 대답하는 엘라.

‘진도’라. 도로시는 흐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연애 경험이란 쥐뿔도 없는 그녀였지만, 나름 용기 내서 아이작에게 저지른 행위들이 있었다.

그 기억들을 되새기며, 이내 도로시는 허리를 펼치고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여느 때처럼 자신감 넘치는 자세였다.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나도 회장이랑 할 건 다 해봤거든? 손도 잡아봤고, 키스도 해봤다구? 진도는 뺄 대로 뺀 사이다, 이거야.”

[키스는 아이작 기절할 때 했었잖아. 아이작 본인도 모르던 걸…. 손은 잘 모르겠지만 대충 둘러댔을 게 뻔하고.]

“그거언, 그렇긴 한데….”

[게다가 너, 평소엔 아이작이랑 몸 하나도 안 맞대잖아. 가끔은 너도 과감해질 필요가 있어. 여우 짓을 하란 말이야, 도로시.]

“여우 짓? 어떻게?”

[예를 들자면, 이렇게 아이작 다리에 손을 올려보기도 하고.]

엘라는 도로시의 허벅지에 앞발을 올렸다.

[루체 엘타니아처럼 아이작 어깨에 턱을 올려보기도 하고.]

엘라는 도로시 등을 타고 뛰어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흐읏…!”

엘라가 촉촉한 입술로 귓바퀴를 살짝 깨물자, 도로시는 반사적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움찔했다.

오싹한 자극이었다.

도로시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고 귀를 손으로 가리자, 엘라는 그녀에게서 뛰어내려 다시 침대에 안착했다.

어느새 도로시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릇한 장난도 쳐보란 말이야.]

“너….”

[여기서, 그 쓸데없이 크기만 한 지방덩어리도 갖다 대면 아이작은 무조건 환장할걸.]

“지방덩어리?”

엘라는 도로시의 흉부 쪽으로 턱짓 했다.

도로시는 반개한 눈으로 엘라를 찌릿 노려보았다.

[잘해 보자, 도로시. 아이작을 쟁취하자구. 난 아이작 좋거든. 걔라면 우리 도로시를 줘도 상관없을 것 같아.]

“누가 주인이고 사역마냐….”

싱긋 웃는 엘라가 여간 얄밉지 않았으나.

이윽고,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곰곰이 고민하는 도로시.

이 기회에 엘라의 조언처럼 진도를 빼서 아이작을 설레게 만들어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대낮. 나비 정원 구석.

휴일. 오늘은 온종일 단련에 치중할 생각이었다.

내가 휘두른 원소 마법 탓에 잔디에는 성에가 잔뜩 끼어 있었다. 잔디는 회복 마법이 걸려 있어 아예 뽑히지 않는 이상 며칠 뒤에 원상복구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단련하던 구간에서 벗어나, 나무 그늘 아래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번 목표가 그 책에 담겨 있었다.

‘[엄동의 파란], [서리혁작].’

그 6성급 얼음 마법들을 모두 완벽하게 익힐 셈이었다.

6성급부턴 학습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지만.

물론 어려운 난이도에 비해, 예전보다 내 학습 속도는 무척 빨라진 편이었다.

적어도 저번처럼 코피를 펑펑 쏟아가며 [빙결 폭발]을 익혔을 때보다는 수월하다는 느낌이지.

[멸악자]가 발동되면 스킬트리가 급격히 증가한다. 참고로 서리낫과 암철검의 힘으로 얻은 스킬들은 별개라 아무 상관없다.

어쨌든, 스킬트리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디자인의 UI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킬과 상관없는 숫자가 화면 오른쪽에 블록 형식으로 새겨져 있었다.

[대 종족 전투력]으로 스킬트리가 올라갈 때는 그 숫자를 기준으로 삼았었지.

그중 7성급 마법부터 9성급 마법까지는 스킬트리가 10 만큼의 차이가 있었어.

[멸악자] 발동시 스킬트리는 10 만큼 증가하므로.

내가 7성급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마족 상대로는 9성급 얼음 마법까지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즉.

‘[한빙지옥]을 쓸 수 있게 돼.’

[한빙지옥]은 일대를 죽음의 얼음 땅으로 만들어 버리는 9성급 얼음 원소 마법.

세계멸망급 마법이라 아카데미에서 사용하기엔 부적합하다.

하지만 [허구지옥]을 사용했던 허상의 리파처럼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적들이 나중에 튀어나올 테니, [한빙지옥]만 익힌다면 그런 녀석들 상대론 하드 카운터가 될 터.

어쨌든 결국, 내 목적은 2학년 1학기 동안 [빙뢰]나 [만년설] 같은 7성급 마법을 단 하나라도 허술하게나마 익히는 것이었고.

7성급 마법은 6성급 마법과 긴밀하고도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서, 6성급 마법부터 제대로 마스터하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책 내용을 읽던 중, 신경 쓰이던 것이 머릿속 한 켠에서 부풀어 올랐다.

도로시였다. 어제 기운이 없어 보였지.

평소 같았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어떻게든 걔를 웃게 만들었겠지만, 어제는 이유가 짐작돼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질투인지는, 확신이 없네.’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도로시가 나를 한 명의 남자로서 대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은근슬쩍 수줍어하는 기색을 자주 보여 대는데. 걔가 나한테 호감이 없다고는 도저히 못 말하겠다.

그렇다면 도로시는 내가 루체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줬다는 사실에 질투한 걸까.

루체에게 반지를 준 이유는 솔직하게 다 설명했다.

거기서 도로시에게 더 늘어놓을 얘기도 없었다. 결국엔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중요하지.

‘그렇긴 한데….’

하지만.

도로시가 기분이 상한 느낌이라 가슴속이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도로시….”

절로 탄식 튀어나왔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 너머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꿍!”

“흡…!”

흡, 에서 비명이 멈췄다. 헛숨을 집어삼킨 채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연보랏빛 머리칼의 최애가 상체를 숙인 채 내 어깨 바로 옆에 얼굴을 들이민 채였다. 나무 그늘 아래서도 그 미모가 빛을 발했다.

나무 뒤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슬그머니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개놀랐다….

“니히히, 회장. 숨 쉬라구.”

도로시가 내 어깨를 찰싹 때리자, 그제야 나는 숨 쉬는 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선배….”

“혼자 있을 때도 이 누나를 찾다니~. 회장은 누나 없으면 못 사는구나?”

양손을 들어 양쪽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도로시는 장난스럽게 나를 놀렸다.

나는 그저, 나를 놀라게 한 그녀에게 반개한 눈으로 무언의 항의를 보낼 뿐이었다.

“이건 무슨 책? 오오, 6성급 마법이구만! 추억이군!”

도로시는 내 옆에 달라붙듯이 앉고는, 고개를 가까이 내밀며 내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너무 붙는 거 아닌가?

도로시의 목덜미와 머리칼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육향이 후각을 적셨다.

“이 누나는 말이다, 12살 때 6성급 마법을 뗐다고? 굉장하지 않니? 천재라고 불러도 좋아!”

“아, 네…. 굉장하네요. 선배는 천재입니다.”

“니히히.”

평소처럼 자기 자랑을 하며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긴 한데….

‘어째….’

왠지, 오늘따라 느낌이 달랐다.

일단 도로시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허벅지에 올라가 있다는 점이 그렇고.

목을 빼고 내 어깨에 턱까지 올린 점도. 부유섬을 토벌한 날 이후로 그녀가 이토록 몸을 밀착해오는 건 처음이었다.

얘가 이러는 거 흔한 일이 아닌데.

“잘 모르겠는 거 있으면 이 누나한테 다 물어봐. 누나가 얼음 속성은 아니어도 나름 보고 들은 게 있거든!”

“고마워요. 그럴게요.”

…책 내용에 집중할 수 있어야 모르는 걸 물어보든지 말든지 할 텐데.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집중하냐….’

그래도 어제 일을 생각하니 뭐라 할 수 없었다. 일단 참자.

시야 끝에 슬쩍슬쩍 도로시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그것만으로 예쁘네.

…뭐, [학습 효율] 최대치라 그런지 의외로 책을 읽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공부가 술술 잘 된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윽고.

“…하압.”

도로시의 영문 모를 기행에 내 [학습 효율] 최대치의 집중력조차 무너지고 말았다.

“읏…!”

대뜸 귓바퀴에 부드럽고도 촉촉한 감촉이 스며들었다.

내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황홀한 쾌감이 전기처럼 흘러 들어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고개를 휙 돌려 도로시를 쳐다보자, 그녀는 얼른 내 귓바퀴에서 입술을 떼고 상체를 뒤로 빼 나와 거리를 벌렸다.

“아….”

침음을 흘리는 도로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당황한 걸까.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처하다는 듯이 흠흠, 하고 어색하게 헛기침까지 한다.

“저기, 선배? 방금 뭘 하신…?”

“이건, 장난이 좀 심했다. 미안, 회장….”

도로시는 내게서 눈을 피하고는 슬쩍 옆으로 빠졌다.

그녀가 입술로 물었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에 미량의 타액이 묻어났다.

다시 도로시를 쳐다 보니, 그녀는 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불편하리만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

진짜.

얘 오늘 왜 이러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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