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반지 (4)
* * *
도로시의 심리는 여전히 읽히지 않았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는 어떻게 생각하든지 추측에 불과할 터.
일단, 이 어색한 분위기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선배.”
“으응….”
역시나. 내 쪽으로 고개 돌려주지 않네.
웃는 얼굴을 가면처럼 쓸 줄 아는 도로시지만, 수치심 앞에선 장사가 없는 모양.
웃긴 얘기를 들려줘 봤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듯하고…, 괜히 분위기만 더 어색해지리란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도로시가 내게 호감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 분위기를 풀어 줄 방법이 있었다.
과감하지만, 효과적인 방법.
나는 책을 옆에 내려놓고 도로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응? 회장? …흐앗?!”
말없이 도로시의 귓바퀴를 입술로 물었다.
도로시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 떨림이 내 입술을 타고 전해져 온다.
한번 키스하듯 그녀의 귓바퀴를 빨자 쭈읍, 하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울리고.
처음으로 도로시의 입에서 하아아, 하고 힘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그녀의 귀에서 입술을 뗐다.
도로시는 물린 귀를 가린 채 빠르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까지 동그랗게 뜬 걸 보니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드디어 눈 마주치네.’
얼굴은 더 빨개졌구나.
그렇게 우리는 물린 귀를 가린 채 서로를 빤히 마주 보는 형국이 되었다.
막상 이러니까 부끄럽네.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로시의 반응이 이해가 가.
“이걸로 쌤쌤이네요.”
마무리로 실실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도로시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니히히, 회자앙. 복수야?”
드디어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저만 당하면 불공평하잖아요. 이거 기분 이상하거든요.”
“응, 그러게. 기분 이상하다….”
…근데 어째, 조금 다른 의미로 분위기가 틀어진 듯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솔직히 이런 분위기는 좋아하는 편이다. 가슴속이 간질여지는 기분. 쉽게 말하자면, 설렜다.
이대로 쭉 내 최애캐 얼굴만 진득하게 보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공부를 일절 못할 듯했기에 이만 자제하기로 했다.
힐링 타임을 여유롭게 만끽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선배, 저 공부할 거니까 너무 방해하진 마세요.”
“응…, 안 할게.”
“…….”
예전 같았으면 ‘방해할 건데에~?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시지! 냐하하!’라고 반응했을 텐데.
도로시 치고는 영 고분고분한 태도라, 뭐랄까…. 되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나쁘진 않았다. 나야 방해가 없으면 좋지.
도로시는 다리에 내려놨던 마녀 모자 안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아마 소설책인 듯했다.
“…….”
고요.
책을 읽다가 슬쩍 도로시 쪽을 곁눈질했다.
한번만 더 도로시 얼굴 보고 진짜로 책을 읽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내 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는지, 고개만 책 쪽으로 고정한 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능청맞은 미소를 머금었다.
“회장, 집중 안 하지? 그렇게 이 누나가 보고 싶어?”
“…그냥 뭐 하나 신경 쓰여서 본 거예요.”
만족하고 다시 책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 * *
“아이작 선배랑 루체 선배는 나중에 사귀게 되겠죠?”
수국 정원 구석.
휴일임에도 스노우화이트는 단련에 나섰다.
아이작이 기절할 때 말고는 단 하루도 단련을 쉬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녀 또한 휴일에 쉬지 않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스스로 이르길, ‘아이작 따라하기 운동’이었다.
물론 그가 단련에 퍼붓는 시간까지 따라잡을 순 없었다. 화이트로선 체력이 뒷받침되지 못했으니까.
쉬는 시간. 화이트가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때였다.
별안간 화이트는 옆에 서 있는 메를린에게 아이작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연애 얘기인가. 메를린의 고개가 단숨에 화이트 가까이로 치달았다.
절도 있는 동작.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기까지 하는 메를린.
“제가 볼 땐 무조건입니다.”
“헉…!”
메를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질문조차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화제였기 때문이었다.
그 적극적인 대답에 화이트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흠흠, 메를린은 그런 거 좋아하시나 보네요. 연애 얘기. 어째 평소 이미지랑 안 맞는 느낌인데….”
“풋풋하잖아요. 화이트 황녀님 나잇대의 연애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힘이 있습니다. 특히 아이작 공과 루체 엘타니아라는 분 사이에는 제가 좋아하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죠. 사귀기 직전의, 바로 그 간질간질한 느낌…!”
“메를린이 이렇게 흥분한 거 처음 봐요….”
화이트는 하하, 하고 헛웃음 소리를 냈다.
“카야는 언제쯤 그런 연애하게 될지….”
“아, 친동생 분 말씀이시죠? 카야 아스트레앙 선배.”
“네. 가끔 마주치면 인사하려고 했는데, 어째 영 마주치기가 어렵군요. 전 수업동에 들어갈 수도 없는 처지고.”
“카야 선배를 저희 쪽으로 부르면 되잖아요? 전 괜찮은데.”
“아뇨. 그 녀석도 아이작 공 못지 않게 향상심이 강한지라, 평소엔 단련에 치중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화이트 황녀님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기도 하니, 굳이 불러봤자 서로에게 민폐만 되겠죠.”
“그런가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저도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화록청의 마법사시니까.”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2학년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
식물 속성 보유자이자, 화록청의 마법사로 불리는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의 차녀였다.
“카야 선배는 심성이 올곧은 데다, 수업 태도론 2학년 A 클래스 중에서 가장 좋다고, 교수들님께서 본받으라고 막 칭찬하시거든요. 상점도 가장 많으시구! 거기다 성적은 차석…! 얼마나 멋진 분일까요? 훌륭한 성품에다, 반듯하고, 똑 부러지고…. 분명 제가 꿈꾸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을 쏙 빼닮으셨겠죠?”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제 동생을 그리 치켜 세워주시니 오히려 제 쪽이 영광이군요.”
“에헤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런 카야 선배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분명 나중에 멋있고 훌륭한 분을 만나실 테니까. 아이작 선배처럼요.”
“그래야 할 겁니다.”
“…네?”
메를린은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쥐었다.
“만약, 카야가 아무 여자에게나 치근대는 난봉꾼 같은 놈을 만나게 된다면….”
메를린의 눈빛이 한 마리의 야수처럼 돌변하고.
섬뜩한 오오라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자, 화이트는 흠칫 고개를 떨었다.
“그놈은, 제 검을 피해 갈 수 없을 테니까.”
검성의 딸. 검술의 천재. 메를린 아스트레앙.
그녀의 검을 받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화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공포감이 일며, 식은땀이 뺨을 타고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어쨌든.”
이내, 눈을 천천히 깜박이고 표정을 갈무리하는 메를린.
서늘하고도 묵직한 기운이 사그라졌다.
“카야 녀석은 어리벙벙한 면이 좀 있어서 걱정되긴 합니다. 괜히 이상한 남정네한테 연심을 품었을까 봐.”
“에헤, 헤…. 메, 메를린은 멋진 언니시네요…! 동생 걱정이, 그, 아, 아주 좋아요!”
“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화이트는 식은땀을 슥 닦아낼 수 있었다.
카야 아스트레앙이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과연 검성과 메를린의 기준에 부합할 수 있을까.
‘아니, 일단은….’
그의 목숨이 건재할 수 있을지부터 걱정되었다.
……
“아이작, 나 왔어.”
“아, 루체. 어서 와.”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든 때.
나비 정원 구석. 책에서 본 내용으로 술식을 구축하고 마력을 운용하며 한참 단련하던 중이었다.
6성급 마법은 이미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아직 전투에 써먹을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다.
냉기와 서리로 가득한 잔디밭 위.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여학생이 양손으로 바구니를 든 채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루체 엘타니아였다.
나는 마법진을 거두고 루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
“…….”
루체는 나무 쪽에 앉아 있던 도로시의 활기찬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무시했다. 일부러 못 들은 척, 나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루체는 헤실거리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배고플까 봐 빵 사 왔어. 6성급은 잘 돼 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한 2주 정도면 목표치까진 도달할 것 같은데.”
“헤헤. 아이작 대단하네. 거기서 2주면 엄청 빠른 건데.”
나와 친구가 된 후로 점점 밝아져 왔던 루체였지만.
내가 반지를 준 후로는 다른 발랄한 여학생들 못지 않게 표정이 굉장히 밝아졌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
순정 만화에서 보면 캐릭터 주위로 꽃이 피는 듯한 연출이 나오곤 하는데, 지금의 루체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화사한 미소야.
물론 여전히 그 미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나로 한정되어 있었다.
“아이작은 갈수록 재능이 강해지는 것 같네. 노력한 만큼 보답 받는 느낌이라, 내가 더 좋…. …음?”
“응?”
훈훈한 말을 해주려는 듯해서 나도 미소로 화답하려 했는데.
대뜸 루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내 왼쪽 귓가에 갖다 댔다.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킁킁. 내 귀 냄새를 맡는 루체.
“뭐해, 루…?”
“아이작.”
루체의 눈동자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의문이 가득한 표정.
“이거, 무슨 냄새야?”
“…뭔 냄새?”
설마.
도로시가 내 귀에 묻혔던 침 냄새를 맡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려는 건 아닐 터.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아니, 시간을 따지기에 앞서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그때, 도로시가 바구니를 살피러 다가오고.
“냐하하! 당연히 내 것도 준비해 왔겠지? …어?”
루체는 잰걸음으로 도로시에게 다가가 그녀의 뒤통수를 손으로 짚더니.
도로시의 왼쪽과 오른쪽 귓가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거렸다.
그리 루체의 고개는 도로시의 오른쪽 귓가 앞에서 멎었다.
“이보시오, 후배 님? 갑자기 뭔…?”
당황하는 도로시.
“왜….”
삽시간에 루체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몰아쳤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 나조차도 절로 몸이 움찔거릴 정도였다.
도로시와 숨결마저 맞닿을 법한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루체.
로즈골드색 앞머리 아래로 그늘이 져 있었다.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칙칙한 잿빛처럼 보였다. 그 싸늘한 눈동자에서 생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돌처럼 굳은, 차가운 무표정.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냉소적이며.
그러나 살의를 머금은 목소리가 그 자리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네 귀에서 아이작 침 냄새가 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