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175화 (175/334)

〈 175화 〉 암계 (1)

* * *

아이작 님 주위에 아름다운 여자가 많다.

근래 카야 아스트레앙을 괴롭히는 고충 중 하나였다.

루체 엘타니아와 도로시 하트노바만 해도 벅찬데.

아름답기로 유명한 스노우화이트 황녀님까지 멘토링으로 가세해 버리니, 카야는 그 틈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마치 강철의 요새.

세 명의 여학생이 아이작에게 딱 달라붙은 채 카야 자신을 향해 낄낄, 사악하게 비웃는 듯했다.

너 같은 녀석이 낄 곳 따윈 없다고 조롱하면서. 아이작은 우리 거라고 단언하면서.

그렇다고 매일 바쁘게 돌아다니는 아이작을 뒤쫓을 수도 없는 노릇.

1학년 1학기 때 개미 마족을 처치했던 이후로 카야는 아이작을 쫓아다니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왔다.

아이작이 미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대마법사인 그는 카야의 접근을 아주 쉽게 눈치채고 말 터. 그렇다고 대놓고 다가가 버리면 아이작이 눈에 띈다고 싫어할 터였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떠나가는 게 두려워, 카야는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카야는 간혹 아이작을 보거나 인사하는 것으로, 소식을 듣는 것으로, 가끔 작전 회의를 위해 몰래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루체 엘타니아는 학생들 시선 따윈 무시하고 아이작에게 찾아가 애정 공세를 펼치잖는가. 카야가 아이작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 중 5할은 그 수석이 차지하는 듯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겐 쌀쌀맞은 그녀가 아이작 한 명에게만은 유독 다정하니, 그 매력의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아이작에게 우월감을 안겨 주고 있을 터.

도로시 하트노바 선배는 아카데미의 유명인이자 연예인이다. 거기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그 강함을 고려해야 하는 미친 강자.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 ‘즐거워서’일 뿐인 세상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천재가 아이작만을 누구보다도 챙기고, 아껴주고 있으니 카야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스노우화이트 황녀는 ‘황녀’라는 대륙 최고의 지위를 지닌 데다,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미인으로까지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후배이자 제자로서 아이작과 매일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 함께하는 시간이 두 사람을 얼마나 끈끈한 사이로 만들어 줄지 카야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위험하다. 카야는 엄청난 경각심을 느꼈다.

“대책이 필요해.”

[대책?]

최상위권 기숙사, 샤를관. 밤이 깊은 때였다.

도통 잠을 못 이뤄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던 카야는 천장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옆에는 카야와 같은 잠옷 복장의 악식이 카야를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인격이기에 카야 눈에만 보이는 형상이었다.

이내, 악식의 카야는 핏빛 눈동자를 번뜩이더니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본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이작 님을 제대로 유혹할 작정이구나? 네가 드디어.]

“그, 그래…!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비장한 얼굴의 카야. 그녀는 식은땀을 한 방울 삐질 흘렸다.

악식은 뺨을 붉히고는 배시시 웃었다.

[난 무조건 찬성! 내일 아이작 님이랑 작전 회의할 때를 노리는 거지?]

“응. 그때 말고는 또 당분간 기회가 안 날 것 같으니까. 뭔가,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

카야는 고심했다.

아이작은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 탓에 연애를 기피하고 있다.

그런 분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려면 어떡해야 할까.

그 방법을 카야는 악식과 의논했고.

아이작과의 부끄러운 행위로 가득 찬 상상을 내내 하다 보니.

“…어?”

갑자기 아침 해가 밝으며 참새가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맺힌 카야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의문에 찬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왜 벌써 아침이지? 하고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 * *

“명예 학생회 될게요.”

아카데미 건물 뒤편.

그늘진 곳에 앨리스 캐럴과 나란히 벽에 기대고 서서 햇볕을 피한 채였다.

눈앞은 아담한 화원이었다. 학생들이 들릴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 간혹 진한 애정 표현을 하려는 커플들이 몰래 이곳을 찾기도 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커플 브레이커 놀이나 게임 스크린샷 찍는 용도 말고는 들릴 필요가 없는 곳이었지.

그 와중에 나는 마력기를 왼손에 쥔 채 마력을 순환시키며 마력 운용력 단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악력기 쥐고 전완근 운동하면서 다니는 관심종자 같은 부류나, 종이 책을 걸으면서 읽는 부류가 나와 비슷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습관이 돼 버리니 안 이러면 허전해.

앨리스는 가슴 아래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와 교복 치마 차림이라, 돋보이는 큰 흉부를 팔로 받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두드러졌다.

몸매를 과시하는 무의식적인 동작 하나하나에서 앨리스가 자기 외모에 얼마나 드높은 자신감을 가졌는지 새삼 짐작할 수 있었다.

“고민이 길었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과 들으려고 한 말 아니야. 한시적으로라도 네가 내 편이 된다니까 좋은걸.”

얌전하고 태평하네.

진짜로 좋아 보인다는 기색은 전혀 없는데. 상냥한 선배가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투잖아, 그냥.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앨리스 선배 밑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에요.”

“알고 있단다. 내가 한 말이잖니. 그럼, 애기는 명예 학생회가 되는 조건도 기억하고 있니?”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 학생회.

아카데미에 큰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을 지킬 의무를 지며, 일시적으로 학생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학생회 지휘체계로부터 독립적인 데다, 학생회 혜택 중 일부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직책이다. 나한텐 꿀일 수밖에.

학생회 자체로 취급되지는 않지만, 학생회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상관없었다.

그리고.

아마, 앨리스는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깊이 의심하고 있다.

나를 명예 학생회라는 유인책으로 꼬드겨서 앨리스가 얻을 이점은 당장에 파악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두 가지.

첫째, 사건이나 사고 발생 시 내가 과감한 행동을 할 것을 가정하고 내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어차피 명예학생회가 되든 안 되든 앨리스는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달라질 건 없었다.

둘째, 명예 학생회가 돼 주는 조건인 ‘가끔 데이트하기’로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로맨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내기까지 곁들였으니 명분은 충분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앨리스가 여느 마족들처럼 막 나가는 저능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짓이긴 하지만 이름 없는 영웅은 앨리스를 넘어 도로시조차도 개미 밟듯 우습게 짓밟을 수 있는 강력한 대마법사. 용의자를 감시하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할 터.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한쪽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쨌든 그 위에 우리는 서 있었다. 자칫 언제든 무기를 빼 들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리스크를 감수하고 앨리스의 비밀을 제대로 파고들자고.

잠자코 앨리스가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것보다는 부딪치는 편이 나으리라. 이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면 좋을 것이었다.

거기다, 나는 악신을 이기기 위한 여정에 있고 이미 한 번 패배하기까지 했잖아.

사암의 시련이 재현했던 기억을 되새겼다. 과거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

아마 악신이 세계를 멸망시킨 후, 일정 시간 동안 살아남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나는 구조인 듯했다.

‘회귀가 발동되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야.’

누가, 어떻게? 왜?

티끌 만큼도 모르겠다. 진실은 아직 내가 모르는 뒤편에 숨어 있으리라.

하나 분명한 건, 죽으면 회귀고 뭐고 나가리 확정이란 것이었다.

그러니 찝찝한 것들은 단 하나라도 남겨둬선 안 된다. 먼지 한 톨까지도 내 여정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합리적이고도 최선의 결과가 아닌, 최고의 결과를 추구해야만 했다.

악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잘해봐야 악신한테 패배하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그러니, 앨리스 캐럴이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빌런이라고 해도 그녀를 알아갈 생각이었다.

앨리스가 누구인지.

앨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앨리스가 감춰둔 비밀이 무엇인지.

“앨….”

앨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걸려다 그만 흠칫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흉부 쪽 셔츠 단추 사이를 벌리더니, 그 틈새에 검지와 중지를 집어넣었다. 얼핏 색정적인 살구색이 비쳤다.

곧 그녀는 가슴 사이에 넣어 놨던 마법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오.’

뜬금없이 감탄스러웠다.

앨리스는 마법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열고는, 그 안에 담겨 있던 배지 하나를 보여주곤 그대로 내게 내밀었다.

아주 작은 보석이 박혀 있는 은색 배지. 검과 마도서가 교차하는 모양새.

“학생회 배지란다. 명예 학생회 일할 때 쓰렴. 애기는 평상시에 달고 다니면 교칙 위반이니까 주의하고.”

나는 케이스를 받고 배지를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수상쩍은 장치는 없어 보였다. 마력이 담겨 있지도 않은 평범한 배지였다. 케이스도 마찬가지고.

“임명식은 따로 없단다. 공식 학생회가 아닌 데다 명예 학생회 자체가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거라. 정 아쉬우면 우리끼리라도 할까?”

“아뇨,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나는 방긋 웃었다.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앨리스는 “착하네.”하고 웃더니 악수하려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유사시엔 잘 부탁할게.”

“저야말로.”

앨리스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그저 훈훈한 분위기 같겠지만.

나는 마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내게 이 악수는 앞으로 잘 협력해 보자는 의미보다는.

피차 비밀을 열심히 들춰내 칼을 빼 들고 죽여보자는 의미처럼 보였으니까.

그때. 삭, 하고 앨리스가 검지 손톱으로 내 손바닥을 가볍게 긁었다. 간지러운 쾌감에 몸이 살짝 오싹거렸다.

뭐야.

“히, 애기는 간지럼 잘 타는구나? 좋은 정보야.”

“선배….”

내가 눈을 반개하고 노려보자 앨리스는 장난스럽게 시시덕거렸다. 어이가 없네.

“그럼 애기는.”

돌연 앨리스는 악수한 손을 밑으로 끌어내리고는.

내 어깨를 짚고 까치발을 들면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앨리스의 숨결이 느껴졌다. 순간 키스하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그녀는 내밀한 음색으로 속삭였다.

“이제 내 것이 될 일만 남았네?”

앨리스는 나와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고는, 여유롭고도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 마무리로 내지른 회심의 미소일까.

참 여유 넘치네.

일부러 얼떨떨한 척 연기하며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특유의 ‘히’ 하는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일 때문에 더 같이 못 있어서 아쉽구나. 애기야, 다음에 보자?”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앨리스는 손을 흔들면서 등을 돌리고 떠나갔고.

나는 그녀에게서 받은 학생회 배지를 바라보았다.

‘…간지는 있네.’

꽤 멋있긴 했다.

나는 학생회 배지가 담긴 케이스를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