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암계 (2)
* * *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아? 네, 네! 멀쩡해요! 괜찮습니다…!”
“…….”
대개 카야 아스트레앙과 만나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밤하늘 아래, 교정에서 제법 떨어진 계곡.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꽤 안락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와 카야는 옆에 세워둔 받침대 위에 발광 램프를 올려둔 채 나란히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계획을 작성한 양피지를 들고 앞으로 벌어질 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즉,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안전할 테니까.’
그나저나, 오늘따라 카야가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고개를 까딱거리며 헤롱헤롱거린다. 오늘은 양갈래 머리를 안 한 탓에, 기다란 담녹색 머리칼이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가벼운 춤을 췄다.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잔 게 분명했다.
아까 심리를 읽고 알아낸 바, 내 생각으로 밤새 잠을 못 이룬 모양이었다.
아마 상상 속에서 나와 물고 빨면서 별별 야한 짓을 다한 것 같은데. 아직 나 말곤 남자 경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양피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안경을 한번 들치고서 입술을 움직였다.
“다음 상대는 무녀야. 정확하게는 무녀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마족. 지금은 그림자랑 일체화되어 있어서 아무도 건드릴 순 없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처지인 건 놈도 마찬가지야. 무녀가 구미호까지 써서 전력을 발휘했을 때 모습을 드러낼 거야. 아, 고마워.”
옆에서 카야가 과일 조각을 내밀자 양피지에 눈을 고정한 채 입만 가져가서 먹었다. 출출할까 봐 챙겨온 과일이었다.
오, 잘 깎았네. 제 언니인 메를린보다 실력이 출중했다.
“동방국의 무녀. 얘기만 들어 봤습니다. 대련 평가 때 아이작 님과 겨뤘던 후배잖아요? 아이작 님께서 무녀를 이겼다는 소식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정체를 드러내셨나, 하고.”
“그럴 리가.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카야가 또다시 내민 과일 조각을 입만 가져가서 먹었다.
아직 카야에게는 내가 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단지 ‘이유가 있다’라고만 얼버무리고 있을 뿐.
물론 드러낼 정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지금 이 모습이 그냥 내 전력 그대로지.
웬만해선 최소한 앨리스가 토벌되기 전까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내 비밀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믿음직스러운 카야라고 해도 말이다.
그나마 도로시에게 내 비밀의 대부분을 밝혔던 건, 이미 들켜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에 불과했다.
다행히 카야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 편하고 좋았다. 누구보다도 나를 깊이 맹신하는 사람은 단연코 얘였다.
“어쨌든, 마족은 무녀의 힘을 쓰게 될 거야. 거기다 어둠 마력까지 쓸 테니까 무녀보다 강한 건 상정해 놔.”
“일단 내용은 알았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마족을 저지하고 아카데미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 그걸 위해 아이작 님은 명예 학생회가 되신 거고요. 내통자를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혹시 무녀는 얼마나 강한가요?”
“우리 1학년 때 루체 급.”
“그런가요….”
카야는 루체 엘타니아를 목표로 삼고 있다. 지금처럼 강해진 자신과 1학년 때의 루체와 맞붙는다면 어느 쪽이 강할지 궁금해할 법도 했다.
“아. 아이작 님, 이거….”
“아, 고마….”
카야가 또다시 과일 조각을 내밀었다. 고맙네. 나는 입만 내밀어 먹으려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과일 조각이 점점 멀어지더니, 매혹적인 향이 후각을 찌르길래 미심쩍어져서 카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풀어헤친 기다란 담녹색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카야가 고개를 기울인 채 지근거리에서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어색하게 입술을 내민 채 긴장해서 덜덜 떠는 모습. 마치 처음 사귄 연인과의 첫 키스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
하마터면 입술이 맞닿을 뻔했다. 악식이 아니면서도 나름 각도를 잘 계산한 함정을 파냈구나. 나름 용기 좀 냈네.
아마 악식이 회유한 거겠지. 딱 봐도 악식이 할 법한 장난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내 입술이 맞닿지 않는 게 의문스러운지, 카야는 조심스럽게 슬쩍 눈을 뜨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뭐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카야의 입술이 다시 쏙 들어갔다. 얼굴은 단숨에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앗, 아아…. 이건, 그…! 죄, 죄송합니다…!”
카야는 바람이 일 만큼 고개를 뒤로 휙 빼고는 뻣뻣한 자세로 굳어 버렸다. 막상 계획이 실패하니 수치심과 후회가 물밀듯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카야는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을 내 쪽으로 향했다.
“오, 오랜만에 단둘이 있는 거라…. 너무 좋아서…. 예, 예전처럼 제 입술을 얼마든지, 시도 때도 없이 마음껏 탐해도 저, 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예전처럼…!”
“…….”
우리가 언제 그랬는데?
어설프게 악식의 인격을 따라 하려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걔는 뻔뻔하리만치 나를 유혹해대니까. 능숙하게 음욕을 자극하잖아.
악식에게 조언을 구해 저런 대사를 준비해온 걸까.
똑같은 외형임에도 악식의 섹시함과 요망함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굉장히 귀여웠다.
나야 어느 쪽이든 애정이 갈 뿐이고.
“예전에도 그런 적 없잖아.”
고개를 거두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선을 그었다. 계획을 적어둔 양피지를 바라보면서.
뭐가 어찌 됐든 연애는 중대사잖아. 악신을 이기려면 연애는 잠시 미뤄둘 필요가 있었다.
“그건…!”
“넌 내가 가장 신용하는 애야.”
“네?”
안경을 벗고 안경 알을 옷자락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봤다고 조급해하는 기색이 보여서 꺼낸 말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솔직한 심정이 덧붙여졌다.
“아카데미 졸업해도 계속 보고 싶을 테니까, 자주 못 본다고 아쉬워하지 마.”
카야의 두 눈이 조금 더 크게 뜨였다.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서서히 곧추세웠다.
정전기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담녹색 머리칼이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녀의 사고마저 멎은 듯했다.
악신을 이긴 뒤엔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 세계에 계속 남게 될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될지.
하지만 이 애가 계속 보고 싶을 건 분명했다. 그만큼 카야에겐 애정이 물씬 들고 만다.
“아, 어…? 으어억…?”
카야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동공이 빙글빙글 돌아갔고, 그 눈동자 상태처럼 살랑거리는 몸짓을 보였다.
괜히 쑥스러워져서, 나는 카야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아무튼 그렇….”
“흐에에…!”
퍼엉.
의도치 않게 내 미소가 회심의 일격이 됐는지, 카야는 끝내 터지고 말았다. 새빨갰던 머리 위로 폭죽이 펑 터지는 것 같았다.
돌연 그녀는 몸에 힘이 쑥 빠져 뒤로 자빠졌고.
격하게 몰아치는 부끄러움에 못 이겨 기절하고 말았다.
“…응?”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남자에 면역이 없다지만, 이 정도라고…?
“뭐야? 카야, 괜찮아?! 일어나 봐! 야!”
사태가 심각해 보였다.
나는 다급히 쓰러진 카야에게로 다가갔고.
그녀의 어깨를 마구 흔들면서 연신 소리쳤다.
카야는 세상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아버렸다.
향년 18세였다.
* * *
“피에르, 과제는 다 했어?”
“오늘 시간 비어? 괜찮으면 우리랑 놀자!”
“피에르, 나 이것 좀 알려주면 안 돼? 어려워서 이해가 잘 안 돼~.”
낮. 점심시간. 마법학부 수업동 오르핀관, B 클래스 강의실.
마법학부 1학년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을 꼽으라면 누구나 똑같은 인물을 떠올릴 것이었다.
피에르 플랑체. 베이지색 고운 머리칼과 신비로운 연초록 눈동자를 가진 미남. 앨리스 캐럴의 부하 중 한 명인 클로버 팔라딘이었다.
그는 언제나 앨리스처럼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다녔고, 높은 친화력으로 학생들과 두루 친했으며.
마법 실력까지도 출중해 나중에 학생회장이 될 것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특히 1학년 여학생들 사이에선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와 비등한 수준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1학년 여학생들이 냉철한 페르난도 파, 자상한 피에르 파로 나뉠 지경이었으니.
매 쉬는 시간마다 클로버 팔라딘, 피에르 근처에는 여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피에르는 사람 좋은 인상으로 그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친절하게 대하며 호감을 샀다.
“피에르는 왜 그렇게 바빠? 전에 모르는 거 가르쳐준 게 고마워서, 보답하고 싶은데. 오늘 진짜 시간 안 돼? 으응?”
한 여학생이 피에르의 넓은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유혹하듯 물었다.
피에르는 슬쩍 그녀의 손을 치우며 환한 미소를 건넸다.
“응, 오늘은 곤란해. 미안해.”
“어머, 아냐 아냐! 미안하긴, 피에르가 왜 미안해? 시간 될 때 말해 줘. 우흐흥.”
피에르의 얼굴만 보아도 좋다는 듯 여학생은 헤실거렸다.
주변 남학생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피에르에게 쏟아졌다.
‘귀찮아.’
피에르에게는 모든 것이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그는 여기 있는 여학생들에게 일말의 호감도 느끼지 못했다. 애당초 나이 차이가 몹시 컸으니 모두 어린애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 애들이 매일 마구 달라붙어 말을 걸어오니 짜증과 혐오감만 물씬 들 뿐이었다. 피에르는 어린애랑 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얘들아, 나 잠깐 화장실 좀.”
피에르는 잘생긴 미소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에 몰려 있던 여학생들이 설레는 얼굴로 열심히 응, 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강의실을 나서는 피에르. 그러나 어딜 가든 여학생들의 호감 어린 시선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칫.”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혀를 찼다.
자신은 검은 괴물을 처단하기 위해 메르헨 아카데미에 온 이방인. 이 아카데미에 녹아들어 제 편을 만들고 검은 괴물을 몰아내거나, 암살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었다. 좋은 교우 관계는 필수였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역시 재미없고 번거롭기만 할 뿐이었다.
하트 팔라딘, 셰라 헥토리카처럼 제멋대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가끔 했지만.
앨리스 여왕님께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하고 노심초사하게 되어 결국엔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
피에르의 발걸음은 외부 쉼터로 향했다. 그러다 그는 야외 복도를 지나가는 한 남학생을 발견했다.
청은발. 동그란 안경. 2학년 선배인 아이작이었다.
피에르는 흠칫 고개를 떨었다.
저 아이작이란 선배는 대련 평가에서 무녀 미야를 일방적으로 쓰러뜨린 자.
그 전투방식은 피에르의 전투 욕구를 절로 끓어 오르게 만들만큼 뜨거웠다.
마법사를 꿈꾸는 마법학부 학생이 그런 전투방식을 선보이다니. 아이작의 대련은 대련 평가가 끝난 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에르의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복도를 걷는 중에도 손에서 마력기를 떼지 않는구나. 자투리 시간마저 헛되이 보내지 않는 걸 보면 참 대단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싸워 보고 싶다.’
자신에게도 저 남자의 전투법이 먹힐까. 자신은 저 남자의 전투법에 대항할 수 있을까.
대련 평가 이후로 피에르는 그런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 저 남자는….’
앨리스 여왕님께서 검은 괴물이라고 의심하는 자. 앨리스 여왕님께서 물밑 작업 중인 대상이었다.
결국, 피에르는 아이작을 몰래 조사해 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이작에 관한 여러 정보들이 피에르의 머릿속 한 켠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이작의 정보를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피에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 녀석을 몰아붙인다면?’
고작 대련 따위가 아닌.
아이작과 ‘진심으로’ 싸울 수 있는 명분을 만들면서, 동시에 그가 검은 괴물인지 떠보게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 괜찮겠는데.’
사심이 첨가되긴 했지만, 모든 건 결과적으로 왕국을 위해서였다. 아이작, 저 남자는 방해꾼으로 의심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니까.
그러니 상관없겠지. 피에르는 아이작과 싸우기 위한 명분을 떠올렸다.
저 남자는 꿈에도 모르고 있으리라. 피에르 자신이 앨리스 캐럴을 따르는 신하이자 클로버 팔라딘이라는 사실을.
씨익.
피에르는 아이작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처음, 그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머금어졌다.
지나가던 남학생이 그 모습을 보더니 흠칫 놀라 거리를 벌렸다.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면서.
* * *
슬쩍 눈길을 돌렸다.
클로버 팔라딘이 나를 쳐다봤다는 사실은 대번에 알아챘다.
심리를 엿보니 나를 몰아세울 얄팍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거라면.’
…역이용해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