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177화 (177/334)

〈 177화 〉 공신제 준비 (1)

* * *

메르헨 아카데미의 아침 해는 일찍 떠오르는 편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올라 여명을 밝히면, 나는 피로한 몸을 일으켜 일과를 준비했다.

아침 구보로 하루를 시작. 고시생 시절 법조문을 머릿속으로 읊어댔던 것처럼, 자기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뜀박질하면서 머릿속으로 복습했다.

구보가 끝난 뒤엔 떠오르지 않았던 내용을 책에서 들여다보았다. 이 방식이 암기에는 효과가 탁월했다.

[학습 효율]을 최대치로 찍은 덕분에 아무리 피곤해도 공부가 잘 되는 느낌은 상당히 신기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몸이었다면 고시 삼관왕 정도는 가볍게 넘봤으리라.

샤워를 마치고 맨몸으로 샤워실을 나섰다. 중상위권 기숙사, 엘마관의 샤워 시설은 이제까지의 기숙사들보다 훨씬 준수한 편이었다.

수건으로 물기 가득한 청은발을 닦으며 전신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키가 크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예전보다 비율이 좋아졌어.

아기용 형태로 소환된 빙설룡-힐드가 책상 위를 뒹굴고 있었다. 제 몸을 쓰다듬어 달라는 무언의 신호였기에, 배를 만져 주니 “으히힝.”하며 귀여운 신음을 냈다. 꼭 개 같았다. 아니, 표현을 바꾸자. 강아지 같았다.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넥타이를 매자 목에 적당한 압박감이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도 꽤 됐는데, 아카데미에 1년 넘게 머무르고 있으니 다시 이 교복의 착용감이 익숙해졌다.

그대로 엘마관을 나서면 대문 앞에서 루체 엘타니아가 반겨 주었다. 그 아름다운 외견과 명망 탓에 많은 학생의 시선을 몰아받으면서.

마탑 수습 일이 겹치지 않는 날엔 대체로 함께 등교하는 편이었다.

루체의 ‘오늘 날씨 어때?’ 따위의 식상한 인사말에 화답하며 함께 마법학부 수업동으로 향했고.

각자 서로의 강의실로 들어간 뒤 수업을 준비했다.

내 손은 마력기를 쥔 채였다. 틈틈이 마력 운용력을 단련하는 건 필수였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온갖 술식을 계산하며 마법 숙련도를 기르는 데에 집중했다.

술식 계산은 피로감이 상당해서 초반엔 머리에 쥐가 나고 기진맥진할 때가 많았다. 머리를 더럽게 많이 쓰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뭐,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았다.

“교수 데이지, 바람 같은 등장.”

2학년 B 클래스 교수, 데이지가 강의실 문을 박력 있게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누가 보아도 바람 같지 않은 요란한 등장이었다.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건지 화들짝 놀라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나는 마력기를 책상 아래로 내리고 데이지 교수를 쳐다보았다.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사실을 전파하지.”

데이지 교수는 교재를 교탁에 턱, 내팽개치고는.

진중한 얼굴로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일부러 말을 끊고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이맘때면 누구나 말로만 듣던 어떤 행사가 진행될 터였다. 그 행사가 계획대로 진행될지 말지는 아직까지 결정사항이 아니었기에 학생들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벌어졌던 숱한 사건들 때문이었다. 마족들이 불시에 출현하는 시국이니까.

누구나 큰 행사를 즐기고 싶겠지만, 이성적으론 당연히 축제나 행사 따위를 자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학생들로선 매번 아쉬운 일이었지.

기대감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데이지 교수를 쳐다보는 학생들.

긴장감이 강의실을 메우고 학생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데이지 교수, 저거. 일부러 뜸 들이고 있네.

이윽고.

데이지 교수는 흠, 하고 콧김을 내뿜더니 박력 있게 소리쳤다.

“기뻐해라! 앞으로 3주 뒤! 공신제, ‘제블렘’이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우와아아아!!!

기다렸던 희소식에 학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의자를 밟고 일어나 포효하는 남학생들, “꺄아악!”하고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꽥꽥 내지르는 여학생들.

별별 방식으로 기뻐하는 학생들 탓에 강의실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학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뿌듯한지, 데이지 교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신제.

‘제블렘’이란 공신제의 명칭. 3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 행사다.

헬리제 교단의 성서에 따르면, 주신 만할라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던 인간들이 신에게 즐거운 구경거리라도 보여주고자 만들어냈다는 행사가 바로 공신제였다.

결국에 그게 뭐냐면, 올림픽 같은 것이다. 제르베르 황국에선 대규모 제블렘이 열리겠지. 화려한 축제가 개막되리라.

여기는 메르헨 아카데미로 범위가 축소되니 더 단출하게 ‘체육제’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최근, 교장과 교수진은 제블렘을 진행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으리라.

‘학생들 사기를 높이자면서.’

강력하게 추진했겠지.

모든 이벤트를 취소시키는 건 학생들의 의욕을 저하시킬 뿐이니까.

방어 체계까지 구체화해 둔 메르헨 아카데미는, 학생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몇몇 행사는 예전처럼 진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게다가 카를로스 황제 같은 든든한 지원자도 있으니, 마족 문제 때문에 재정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공신제를 여는 데에 큰 무리는 없으리라.

‘애초에 당연히 열릴 거였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 「8막, 홍련의 무녀」 파트가 공신제에서 진행되니까.

여담이지만, 학생회장인 앨리스 캐럴 또한 그 행사가 열릴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클로버 팔라딘도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나와 싸울 흉계를 꾸미기도 했고.

팔라딘이 끼어들면서 나로선 경계해야 할 강적이 늘었지만.

그들의 등장이 무조건 손해인 건 아니었다. 앨리스의 심리는 읽을 수 없어도, 그녀의 명령을 하달 받는 팔라딘의 심리는 읽을 수 있기 때문.

즉, 앨리스의 계략이나 명령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점은 편리했다.

“모두 조용히.”

학생들은 웃는 얼굴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데이지 교수를 쳐다보았다. 다들 정숙했음에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결정이 늦어졌지만, 3주면 공신제 준비는 충분할 거로 생각한다. 그럼 이제부터 각 종목별 참가자를 모집하겠다. 모든 학생이 각자 하나 이상의 종목에는 반드시 참가해야 하니까, 원하는 종목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지원하도록.”

스포츠 경기 참가자를 모집하겠다는 얘기였다.

데이지 교수는 칠판에 내용을 적어 나갔다.

마력이 담긴 분필은 원하는 색감대로 칠판에 글자를 새겨 나갔고, 데이지 교수가 원하는 부분에 마력을 슬쩍 불어넣으면 강조 효과로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클로버 팔라딘의 계획을 떠올렸다.

‘꽤 유치했어.’

화이트가 무녀에게 당하자 내가 분노한 모습을 봤었지. 그 요소를 이용하려는 게 클로버 팔라딘의 사심이 담긴 흉계였다.

종목별 참가자 리스트는 공신제 때 아카데미 사람 모두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그런 정보를 사전에 확인하는 건 학생회장 권한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팔라딘 4인방은 검은 괴물을 찾아내기 위해 미리 그 정보를 제공받으리라.

그걸로 클로버 팔라딘은 화이트가 참가한 종목을 확인하고, 같은 종목에 참가한 클래스 학생 한 명이 사고를 당하도록 유인한 뒤.

자신이 대타로 그 종목에 참가하겠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녀석이 수많은 학생과 두루 친하면서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던 건 그런 일 하나하나에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지.

‘친구가 다쳤으니 제가 대신 참가하겠습니다’라는 감동적인 발언을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긴 데다 사교성까지 좋은 개사기 알파메일이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지지하느라 바쁠 것이었다.

그리고 놈은, 공신제에서 화이트를 다치게 할 의도를 품었던 것.

스포츠니까, 화이트가 다쳐도 나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클로버 팔라딘은 내가 분노를 쌓고 또 쌓길 바랐던 것이다.

‘공신제 스포츠는 참가자들끼리 부딪히는 게 주류니까.’

가령 축구나 아이스하키, 럭비 같은 느낌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실제로 그런 스포츠를 한다는 건 아니고, 그런 종류의 몸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공신제 마지막 날에 클로버 팔라딘은 ‘나는 일부러 화이트를 다치게 했다’라고 몰래 내게 전함으로써, 내 분노를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 셈이었던 것.

그리 되면 나와 진심으로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븅신.’

그 유치한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화이트를 또 당하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먹기로 했다.

……

나비 정원 구석에 오자마자, 햇볕을 피해 느티나무에 기대고 앉아 있는 여신님이 보였다.

그녀는 마녀 모자를 갈무리하고는 나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내비치는 후광이 무척 눈부셨다.

“오, 회장!”

“선배!”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겨 주는 도로시.

개 예뻐. 나는 그녀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점심 먹었어요? 벌써 와 계셨네요.”

“대충 먹고 왔거든! 회장, 너 공신제 종목 뭐 골랐어?”

“아크볼 레이스요.”

“나돈데! 이 누나랑 통했구만!”

도로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니히히.”하고 웃었다.

‘아크볼 레이스’.

‘아크볼’이라는 반짝이는 공을 쫓아가는 시합이다. 제블렘의 꽃이라고 불리는 종목인 만큼 인기도 많고 가장 규모가 크기도 하다.

뭐, 말이 레이스지. 사실상 쟁탈전이나 다름없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간단한 종목에 참가한 뒤 그림자 마족이 튀어나올 때까지 방관했겠지만, 클로버 팔라딘 탓에 일부러 아크볼 레이스에 참가하게 되었다.

저번에 화이트와 얘기를 나눴을 때, 그녀는 공신제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아크볼 레이스에 참가하겠다고 했으니까.

아까 오르핀관을 걸으면서 화이트와 마주쳤을 때 물어보고, 그녀가 계획대로 참가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뭐, 황녀가 아크볼 레이스에 참가하고 싶다는데 누가 막을 쏘냐.

물론 우리 쪽은 인원 제한 탓에 참가자들끼리 간단한 내기로 탈락자를 골라야만 했다. 나야, [심리 간파] 덕분에 가뿐히 내기에서 승리했다.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황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탈락자들이 듣는다면 충분히 납득해주겠지.

참고로 B와 C 클래스는 인원수가 많아서 조별로 쪼개졌다. 우리 조엔 트리스탄이 들어왔다. 그 탓에 놈은 나와 싸울 수 없게 되었다며 끄아악, 하고 좌절했다.

“회장, 그렇게 이 누나랑 같이 하고 싶었어?”

도로시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농담에는 농담으로 받아쳐 줘야지.

“선배야 말로. 절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종목까지 따라하시고.”

“느흐, 뭔 소리래니. 난 언제나 독립적이라구?”

“글쎄요. 저 없는 도로시 선배가 상상이 안 가는데. 만약에 저 없으면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건데요?”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데? 이 누나는 닭고기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그러면 안심이고요.”

나는 우스갯소리로 대답하며 나비 정원 구석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도로시와 꽁냥거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이봐, 회장.”

도로시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하자,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농담인 거 알지?”

“……?”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였지만, 어째 그 밝은 목소리에 약간의 진중함이 들어 있었다.

‘장난삼아 말한 거였는데….’

저 반응 뭔데.

당연히 심정이야 안다. 도로시에게 나는 나름대로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 때문인지, 도로시는 농담으로라도 내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선배, 역시 저랑 같이 하고 싶었죠? 귀엽네요.”

“니히히. 건방지구만, 회장!”

곧바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나와 도로시는 서로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

오르핀관. 마법학부 1학년 A 클래스 강의실.

해가 저물어 가는 때.

무녀 미야는 텅 빈 강의실에 홀로 앉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과 후 교정은 각자 자유로운 일과를 보내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괜히 땋은 머리칼을 배배 꼬아보는 미야.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아카데미에선 자신이 언제나 위에 군림할 수 없다. 그 사실이 진절머리 나게 느껴졌다.

루체 엘타니아. 그녀를 포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치 부와 명예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야 자신이 흔히 알던 인간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작. 그 개자식에게 당했던 연유는 무엇일까. 그놈은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 없는 평민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그런 놈이, 화봉국이 자길 노리든 말든 어쩌라는 식으로 일말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끄윽.”

돌연 미야는 머리칼을 꽉 거머쥐었다.

아이작. 아이작. 그 놈이 뭔데.

왜 여기까지 와서, 왜 그딴 평민 한 명 때문에 자신이 이리도 과민반응을 해야 하는데.

그 선배 놈이 문제였다. 속으로 삭이고 있는 이 감정의 근원은, 결국 그 선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미야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당장에라도 아이작, 그놈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려 자신을 이토록 화나게 만든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아무 때나 찾아가 놈을 처단해선 안 된다는 건 당연하잖아. 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면 가슴 뛰는 사랑을 맺는 것도, 인재 영입도, 미야가 원했던 모든 기회가 싹 날아갈 터였다.

그러니 적절한 때에 몰래, 미야는 아이작을 처참하게 찢어발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미야는 다급히 강의실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개인실처럼 강의실에 노크하는 행위가 미야의 사고에 혼란을 일으켰다.

곧, 미야는 해답을 찾았다. 아마도 지금 강의실 문에 노크한 사람은, 미야 혼자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들어오려는 게 틀림없었다.

어느 건방진 녀석이? 미야는 경계했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여학생을 보자마자 미야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연금발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노을빛을 받아 찬연하게 빛났다. 아름답고도 고혹적인 여학생이었다.

미야는 대련 평가 때의 기억이 떠올라 헛숨을 집어삼켰다.

“안녕?”

앨리스 캐럴은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인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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