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180화 (180/334)

〈 180화 〉 공신제 (1)

* * *

“자, 지금!! 메르헨 아카데미의 제블렘이 개최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평소보다 화려하게 꾸며진 메르헨 아카데미에 교장 엘레나 우드라인의 활달한 선언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곳곳에 놓인 대형 확성기가 그녀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주었다.

동시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꽃 다발이 대낮의 상공에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펑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카데미에 함성이 들어찼다. 학생들은 야외 경기장을 메운 채였다. 유달리 시끌벅적한 분위기.

좋은 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기온은 적당했다.

무대엔 아름다운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복장의 합창단과 응원단이 나타나 신나는 분위기에 맞추어 노래와 춤 공연을 펼쳤다.

숱한 사고로 분위기가 은근히 침잠해 있던 지난날들이 사뭇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카데미는 오랜만에 제대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오오.”

뒤쪽 자리. 내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함께 공연을 바라보고 있던 루체 엘타니아가 감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만의 감성이 담긴 공연을 실제로 감상하는 건 게임에서 보았을 때의 느낌과는 확연히 달랐다. 확 와닿아 가슴을 울리는 듯했다.

메르헨 아카데미는 개막식에선 즐거운 분위기를, 며칠 뒤 폐막식에선 감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계획이었다.

신들이 화합해 공신제를 즐겨주었길 바라며, 동시에 풍요를 내려주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무녀 미야가 춤을 추겠지.

평화롭고 사랑이 가득한 이상적인 세상을 위한다는 의미가 그 춤에 내포되어 있을 터. 물론 춤을 추는 당사자의 인종차별적인 가치관을 생각한다면 춤의 의미가 옅어져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체, 얘 이제 갈 시간 아닌가.

“루체, 몇 시에 꾸미러 가?”

“곧. 바로 돌아올 테니까 이 자리에 그대로 있어.”

“뭔 소리냐. 못 돌아오잖아, 2학년 얼굴 대표라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이작 곁에 있을 거야.”

아름다운 음색으로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는 루체.

원래 이런 애였지. 규칙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씹어먹어 버리려는 막무가내 성격. 그런 점에선 도로시와 닮았어.

웬만하면 이런 행사에선 하나뿐인 친구와 쭉 같이 있고 싶겠지만. 아니, 원래 항상 그래 왔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마라…. 안 그럼 피해 다닐 거야.”

“…갑자기 공신제가 싫어졌어.”

루체는 내 반곱슬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투덜댔다.

한창 개막식이 진행되던 중, 한 여학생이 다가와 루체에게 말을 걸었다. 2학년 치장 담당이었다.

“루체, 이제 꾸미러 가야지.”

“으엑….”

엄청 질색하는 거 아니냐…. 표정은 또 웃기네.

“다녀와.”

내가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루체는 내가 얄미운지 뾰로통한 얼굴로 내 어깨를 껴안고 내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미워.”

그리 속삭이고는 입김을 후 불어 넣었다. 온몸에 소름이 우수수 돋으면서 오싹한 쾌감이 몰려왔다.

와오.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휙 빼면서 습격당한 귀를 가렸다.

‘자극 미쳤네….’

자기 목소리가 내 귀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루체는 내가 얄미울 때마다 이랬다. 갑작스럽게, 능숙하게.

루체는 못마땅한 얼굴로 가까이서 나를 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길 어떻게 그리 망설임 없이 보낼 수 있느냐는 불만의 표시였다.

물론 장난의 의미가 강했다. 루체도 제 역할을 저버릴 만큼 무책임한 애는 아니니까.

“미안해, 아이작. 루체 좀 빌려갈게~.”

여학생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사과하고 루체와 함께 관중석을 떠나갔다. 나는 루체와 이따 보자며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혼자가 됐다. 마력기를 쥔 채 마력 회로를 순환하길 반복하며 학생들을 살피는 척, 조용히 눈만 돌려 주위를 훑었다.

팔라딘 4인방은 마법학부 1학년 자리에서 저마다 떨어져 있었다.

앨리스 캐럴은 학생회장이라 관중석과는 다른 경기장 위쪽, 상석에 있었고.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

공신제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보았던 대로 진행되었다.

경기 시작 전,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각 학년별 얼굴 대표인 학생들이 등장하자 학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른 학부의 얼굴 대표들은 모두 관심 없으니 무시하고.

마법학부로는 1학년 화이트와 2학년 루체, 3학년 도로시가 나섰다. 그녀들은 어여쁘게 개량된 옷과 여러 사람의 손길을 통해 화장한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긴장한 화이트, 시큰둥한 루체, 신이 난 도로시. 모두 얼굴 간판이라는 역할에 걸맞게 후광이 비칠 만큼 엄청난 미모를 자랑했다.

그나저나 화이트가 드릴 머리를 하지 않고 멀쩡히 꾸미고 온 건 천만다행이었다.

얼굴 간판을 각 학년별 상석에 올리고 여러 경기가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얼굴 간판을 중심에 둔 여러 퍼포먼스로 자기 편을 응원했다.

아무래도 축제 분위기 속에 있다 보니 즐거운 마음이 드는 건 불가피했다. 참자. 놀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칠 때마다 억누르고 감정을 갈무리했다.

‘긴장감을 흩트리면 안 돼.’

클로버 팔라딘이 화이트를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까.

어느덧 점심시간. 경기의 열기가 사그라지고 학생들이 들뜬 모습으로 먹거리를 즐기러 가려는 때였다.

루체는 다음 퍼포먼스 준비 때문에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학생들에게 끌려갔다.

학생들과 어떻게든 동떨어져서 혼자 식사할 녀석의 모습이 상상되니 가슴이 미어졌지만, 미안하게도 오늘은 같이 못 있어 주겠다. 클로버 팔라딘 때문에.

“냐하하학! 카리나, 아까 웃겨 죽는 줄 알았다구! 카리나의 몸 개그~. 느햣!”

“윽. 도로시, 이 자식….”

인기 많은 도로시는 학생들과 두루두루 몰려다니며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떠나갔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문득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공신제 개막식을 봤던 때가 떠올랐다.

헬리제 교단의 성직자는 개막식이 시작되기 전에 감사 기도를 올렸지. 도로시에게도 축제의 열기가 닿길 바란다며. 당신이 목숨 바쳐 지켜낸 이 풍경을 부디 하늘에서 지켜봐 달라며.

‘시나리오에서 도로시는 반드시 죽어야 했으니까.’

절로 입가에 미소가 튀어나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는 도로시의 모습을 보니 꽤 뿌듯해졌다.

‘뭐, 이제….’

할 일을 하자.

이번 공신제에서 내 목표는 화이트를 지켜 주는 것이었다. 무녀 미야에게 호되게 당했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울화통이 치밀고 마니까.

클로버 팔라딘도 나를 자극하고자 화이트에게 해코지할 유치한 생각을 품고 있으니.

[심리 간파]는 만능이 아니므로, 놈이 지금은 어떻게 생각을 바꿨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대비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화이트를 괴롭힐지도 모르는 일.

그렇다면.

“미안한데, 좀 지나갈게.”

발걸음을 옮겨 마법학부 1학년 학생들을 헤쳐 나갔다.

가장 위쪽, 상석에 서서 상체를 굽힌 채 학생들을 여신처럼 내려다보던 순백의 황녀에게 다가갔다.

“뭐야?”

“어? 아이작 선배님?”

“아앗!”

슬쩍 밀려날 때마다 다채로운 반응을 보이는 1학년 후배들은 무시했다. 팔라딘 4인방은 이미 떠나 있었기에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연예인 떠받들듯이 화이트에게 몰려 있었다. 화이트는 아직 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화이트. 꽤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학생들 틈새에서 차마 빠져나가지 못하는 모양. 어서 상석을 내려가 그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그녀의 심리가 읽혔다.

“부디 화이트 황녀님께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셨으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움도 화이트 황녀님의 미모에 비견될 수 없을 겁니다!”

“황녀 전하! 하멜른 가문의 장남인 소인이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엄청 난리네. 내가 저 정도 인기를 누렸으면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겠는데.

뭐, 온갖 입 발림을 숱하게 들어왔을 다른 황녀였으면 이 더럽게 어수선한 분위기에 화가 나서 전부 입 다물라고 명령했을 듯했다.

그러면 진작 쥐 죽은 듯 조용해질 텐데. 차마 성품이 선한 화이트는 그 비슷한 행위조차 못하고 있었다.

황녀라는 강력한 권력과 지위를 갖고 있더라도.

화이트가 해코지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학생들은 그녀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었다. 착한 호구의 숙명이었다.

물론 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나름 귀족가 자제들이니 화이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출중하겠지.

하물며 이곳은 전통적으로 신분 관계가 완화되는 아카데미.

황녀와 또래로서, 그녀를 이리도 가까이서 마주할 기회는 앞으로도 절대 흔치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기회는 내가 빼앗아 가야겠다.

“어?”

화이트는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져가고, 심리가 안도감으로 물들여져 갔다.

1학년 학생들도 내 등장에 놀란 눈치였다. 그래, 놀라워 해라. 내가 바로 너희들이 존경하는 아이작 선배다.

“화이트.”

나 때문인지 시끌벅적했던 분위기가 꽤 가라앉았다.

나는 화이트 앞에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그녀는 상석에서 내려다보며 눈을 마주했다.

“가자.”

내가 오른손을 내밀자 화이트는 흠칫 고개를 떨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동그랗게 떠지고, 입술이 살짝 벌려져 돌연 넋이 빠진 기색을 보였다.

방금 전까지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탓인지, 내 손이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지는 모양.

멘토와 멘티 사이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나를 한 명의 선생이자 스승쯤으로 화이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아카데미 학생 그 누구보다도 편한 것이었다.

뭐, 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화이트와 만날 계획을 짰을 땐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꽤 깊은 정이 생겨 버렸다.

스승이 제자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옛 영화 같은 데서 자주 봤던 것 같은데. 이게 그런 감정 비슷한 건가. …그건 잘 모르겠네.

어쨌든, 이 정도면 교통정리가 됐을까.

“…좋아요.”

화이트의 만면에 순수한 미소가 넘쳐흘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고는 상석에서 휙 뛰어내렸다.

부웅, 하고 발밑에서 바람 마력이 쿠션처럼 일렁이고.

화이트는 안정적으로 지면에 착지했다. 우리는 환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1학년생들은 기함했다. 특히 바로 주변, 화이트에게 작업 멘트를 쏟아붓던 놈들은 더욱 그러했다.

자기들은 높은 신분과 온갖 아첨, 아부, 달콤한 말로 무장해 화이트에게 식사 제안을 했는데.

평민인 내가 고작 ‘가자’라고 한마디 한 것으로 화이트가 움직여 버리니 무척 당혹스러웠나보다.

“앗.”

그대로 화이트를 데리고 움직였다.

1학년 학생들로 이루어진 물결을 가로질러야 했기에 화이트의 손목을 잡고 걸어 나갔다. 얘를 놓치면 큰일 나니까.

많은 1학년생이 우리를 위해 길을 비켜 주는 분위기라서 다행이었다. 나와 화이트가 멘토링으로 엮인 사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서 그런 듯했다.

화이트는 손목이 잡히자마자 짤막한 외마디 비명을 지른 이후로 말문이 턱 막힌 듯 보였다. 설명은 이따 해도 충분하겠지.

공신제에서 나를 자극하기 위해 화이트를 노리고 있는 알파메일 새끼, 클로버 팔라딘은 앨리스의 수하다. 앨리스가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주의해서 행동하는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내 해법은 간단했다. 그냥 화이트를 내 곁에 두면 되지 않겠나.

지금 빙설룡-힐드는 내 셔츠 깃 속에 숨어서 주위를 감시하고 있고.

순수 무력으로 이루어진 싸움만 아니라면 나라도 팔라딘 상대로 승산이 있었다.

화이트는 내가 지킬 생각이었다. 또 대련 평가 때의 꼴이 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화이트를 쳐다보았다. 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기쁜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는 걸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웃겨서 그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잘 따라와. 손 안 놓을 거니까.”

“…네…!”

화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하게 대답하곤 내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기뻐하면서도 어째 긴장한 눈치였다.

이게 뭐라고. 지금 화이트의 눈에 비치는 광경이 그녀에게 꽤 깊은 인상을 안겨 주고 있는 듯했다.

뭐, 읽어 봤자 무의미한 심리였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화이트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여전히 경악하는 1학년생들을 지나쳐, 우리는 함께 경기장을 떠나가려 했고.

“아, 메를린.”

출입 통로 쪽에서 메를린 아스트레앙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녀석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외부인이라 그곳에서 화이트를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검성의 딸인 메를린 실력이라면 이 정도로 거리가 멀어도 화이트를 지킬 수 있는 재간이 충분했다.

출입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메를린에게 식사를 권했다. 얘가 있으면 훨씬 든든하지.

“어떠세요? 같이 식사하러….”

휙.

메를린은 유려한 움직임으로 어느새 나와 화이트 사이에 이르더니, 화이트의 손목을 잡은 내 손을 턱 짚었다.

나와 화이트는 당황해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고.

“아이작 공.”

“예…?”

“화이트 황녀님에게서, 손 떼 주십시오.”

메를린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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