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공신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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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의 마법 기사> 「8막 1장, 공신제」.
플레이어는 여러 스포츠 종목을 선택할 수 있었고.
선택지에 따라 이벤트가 발생해 반드시 원하는 종목을 플레이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와는 무관하게 공신제 스포츠를 주제로 한 여러 미니게임도 마음껏 플레이할 수 있었지. 꽤 재밌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중 공신제의 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스포츠가 바로 아크볼 레이스였다.
세부적인 규칙까지 들어가면 머리 아파지니, 아크볼 레이스가 뭔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크볼’이라는 공을 팀원들과 패스해 가며 지정된 경주로를 달리고, 목적지에 먼저 도달한 순서대로 등수를 매기는 경기다.
아크볼은 전격 마력이 똘똘 뭉친 마도구 공이다. 내 주먹 크기쯤 될까.
그 공은 그물망 없는 테니스 라켓과 잠자리채를 합친 듯한 모양새의 독특한 뜰채를 사용해서 잡아야 하며, 신체 접촉 시 반칙이었다.
뜰채에 잡힌 아크볼은 2분간 기능이 마비된다. 이는 즉, 2분이 지나면 기능을 회복해 도망친다는 얘기다.
따라서 아크볼을 지속해서 마비시키려면 팀원들간의 패스가 필수였다.
소란 속, 나는 참가자들 틈에 섞인 채 발을 움직였다.
“가즈아아!!”
“전부 비켜어어!!”
“우와아아아!”
그 와중에 주황빛 포니테일 머리의 A 클래스 불량아, 리제타 라이온하트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몸이 튼튼한 녀석이라 그런지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네.
그때. 경기장 밖으로 이어지는 큰 통로 앞에 마력이 뭉치더니 치직, 거리며 전류를 흘려내는 공 형태가 되었다.
내 주먹과 비슷한 크기. 아크볼이었다.
“자!! 아크볼이 생성되었습니다!! 과연 선두는 누구?!!”
휘익!
예상대로, 연보랏빛 머리칼의 한 여학생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어 뜰채로 아크볼을 낚아챘다.
형형색색의 별 무리가 그녀 주위를 휘감았다.
“니히히.”
학생들을 향해 한쪽 팔을 쭉 뻗어 검지와 중지를 펼치는 여신님.
도로시는 머리에 쓴 마녀 모자를 꾹 누르며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뜰채를 통과한 아크볼은 지직, 거리며 흐르는 뜰채의 전격 마력에 붙잡혀 꼼짝하지 못했다.
“역시라면 역시일까요?! 우리 메르헨 아카데미의 연예인! 도로시 하트노바 선수가 가장 먼저 아크볼을 낚아채 갑니다!!”
진행자 에이미 할로웨이가 소리치자 학생들의 함성이 퍼져 나갔다. 특히 도로시 팬들의 함성이.
반면에 참가자 중 여러 학생은 침음을 흘리거나 혀를 찼다.
물론 난 좋았다. 도로시 하고 싶은 거 다 해.
도로시를 선두로, 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은 경기장 통로를 지나 야외로 나섰다.
통로로부터 아주 길게 마나 알갱이가 빛나며 트랙을 형성하고 있었다.
반드시 아크볼을 가지고 트랙을 지나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게 아크볼 레이스의 규칙이었으니.
완주한 팀이 나올 때마다 마나 알갱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트랙은 더 짧게 재구성될 터. 즉, 첫 트랙이 가장 긴 편이었다.
우리는 트랙을 따라 내달렸다.
“너희들, 빨리 오라구!”
도로시는 섣불리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했다.
어차피 아크볼을 먼저 가져가 봤자 2분 이내로 팀원들에게 패스해야 하고.
팀원들끼리 신체 접촉이나 마법을 쓰는 행위는 반칙이니까. 독주를 막기 위한 규칙이었다.
반면에 팀원들끼리가 아니라면?
‘서로 줘팰 수 있지.’
세이프 라인만 지난다면 말이다. 진로 차단만 아니라면 1성급부터 2성급까지의 마법으로 경쟁자들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겠지.
아. 경쟁자들끼리는 서로 붙잡는 게 아닌 이상 신체 접촉도 가능한데, 이는 세이프 라인과 상관없다.
아무튼.
‘팀플레이가 중요해.’
그래서 다들 서로 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도로시 팀의 작전은 한눈에 훤히 보였다. 굳이 [심리 간파]를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저 녀석이 빠른 속도로 선두를 치고 나갔다는 건 그 팀원들도 앞서 나갈 것이라는 뜻.
나중에 나올 세이프 라인을 지날 때까지 도로시 팀이 아크볼을 차지한 채 앞서 나간다면, 경주는 저 녀석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여기 놈들은 호락호락한 바보가 아니지. 이미 도로시한테 선수를 뺏겨서 분한 참인데, 녀석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둘까.
도로시는 소수인 A 클래스라 클래스 상관없이 섞인 팀에 소속되었다. 즉, 다른 팀원들은 도로시 급에 못 미친다는 뜻.
역시나 도로시와 같은 복장의 3학년 학생들 주위로, 다른 참가자들이 달라붙어 견제하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무섭지만 그녀의 팀원들은 만만한 것이었다.
이래서 초반에 나서는 건 좋지 않다.
“어, 어쩌지…?”
별빛 마력으로 날아가던 도로시는, 수많은 학생의 견제 탓에 아무것도 못 하는 자기 팀원들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치익.
“헉!”
2분이 경과해 도로시의 뜰채에 흐르던 전격 마력이 사그라지고, 아크볼은 제 기능을 되찾아 빠르게 도망쳤다.
날파리처럼 쉬이익, 잽싸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아크볼.
아크볼은 높게 점프하기만 하면 손이 닿을 만한 위치에서 트랙을 따라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도로시는 다급히 아크볼을 뒤쫓았으나.
“우오오오오!!”
“그야아아악!!”
기다렸다는 듯, 도로시에게서 해방된 아크볼을 향해 많은 학생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당탕탕. 서로를 밀치거나 태클을 걸어대며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기사학부 학생들이 앞섰지만, 바람 원소로 날아드는 학생들도 엇비슷하게 빨랐다.
“전부 비켜라아아악!”
쿠우웅!
지면에서 바위기둥이 솟구치고.
A 클래스의 불량아, 리제타 라이온하트가 바위기둥을 타고 치솟았다가 금방 뛰어내렸다.
그녀는 바위 속성 마도무기, 방망이 록타를 어깨에 걸친 채 남학생들의 머리를 밟고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무기는 다른 참가자들에게 휘두르지만 않는다면 뭐든 허용되지만, 뜰채까지 든 채로는 불편해서 대부분 쓰지 않는 편이었다.
‘중요한 건 빠른 행동력과 기동력이니까.’
게다가 록타 같은 마도무기를 다루려면 복잡한 마력 운용이 필수다. 전투가 주요소가 아닌 아크볼 레이스에선 신경만 분산될 테니 그다지 어울리진 않는다.
그러나 리제타는 록타가 손에 안 쥐여 있으면 마음이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불쌍하게 짓밟힌 남학생들은 리제타의 추진력이 되어 주고는 뒤로 자빠졌다.
쟤도 마법학부에서 운동꾼 중 한 명이었지. 몸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주황색 체육복 상의를 절반 정도 풀어헤쳐, 자기주장이 강한 흉부를 도드라지게 한 꼴이 영락없는 리제타였다.
치직. 아크볼은 리제타의 뜰채에 붙잡혔다. 녀석은 지면에 턱, 착지하고는 카칵 웃어대며 자기 팀원들과 함께 트랙을 내달렸다.
참가자들은 탄식을 터뜨렸다.
“개판이군.”
트리스탄 험프레이의 담담한 어조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우리 팀은 유유자적 달리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한 초반부엔 관망하다가, 초중반부 세이프 라인을 지났을 때부터 치고 나가는 것이 우리의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작전은 작전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피에르 플랑체에게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다. 그래, 난 한 놈만 조진다.
에이미가 아크볼 레이스 진행 상황을 중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전달꾼을 통해 관객들에게 경주 현황이 실시간으로 보여지고 있겠지. 경기장에서 곧바로 야외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구조상 가능했다.
상공에선 마나 알갱이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도가 펼쳐져 있다. 거기서 각각의 참가자들 위치가 GPS처럼 찍히고 있을 터.
곧 여러 참가자가 내달려 리제타 팀을 포위하려 했다.
“야! 받아라!”
“흐얏!”
앞서 나간 리제타는 팀원을 향해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듯 뜰채를 휘둘렀다. 그러자 아크볼이 야구공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리제타의 팀원은 깜짝 놀랐으나, 날아오는 아크볼을 뜰채로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전격 마력이 삽시간에 튀어 올라 아크볼을 붙잡았다.
드드드드!!
리제타는 자기 발 밑으로 바위를 끌어 올렸다. 바위기둥이 정면을 향해 사선으로 솟구쳤다. 미처 견제하지 못했던 학생들은 당황했다.
팀원은 곧장 뜰채를 휘둘러 리제타를 향해 아크볼을 던졌고.
테니스공처럼 날아가던 아크볼을 리제타는 여유롭게 뜰채로 받아 내려 했으나.
턱.
도로시가 단숨에 날아들어 아크볼을 낚아채 갔다.
리제타는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곤 “아앙?!”하고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니히히! 어디,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
삐익!
“응?”
도로시가 성급하게 높이 날아오르자, 뜰채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앗! 도로시 하트노바 선수! 높이 제한을 위반했습니다! 으아아, 이건! 안타깝지만 실격이네요!”
“…엥?”
진행자 에이미의 외침.
실격 처리가 된 탓에 도로시의 뜰채는 강제로 기능을 상실했다. 곧바로 그녀의 뜰채에서 아크볼이 떠나갔다.
“아아…!”
사태를 파악한 도로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떠나가는 아크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안타깝네.
아크볼 레이스에선 자력 혹은 팀원의 능력으로 일정 높이 이상 올라가면 안 된다.
이 또한 독주를 막기 위한 규칙이며, 아크볼 레이스의 본질적인 재미를 해치는 중대한 문제라 아예 실격 처리가 되고 만다.
도로시는 아크볼을 지켜내는 데 집중한 나머지 높이 제한을 가늠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쯤 관중석에서 절규하고 있을 마법학부 3학년생, 도로시 팬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레이스 끝나면 위로해줘야겠네….’
도망치던 아크볼은 한 남학생이 낚아챘다. 그는 자기 팀원들과 함께 키득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그들 또한 얼마 안 가 다른 팀에게 아크볼을 빼앗겼다.
그리 아크볼을 둘러싼 쟁탈전이 이어지고.
문득 지면에 그어진 연두색 선, 세이프 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슬슬 전투를 준비해야 할 때였다.
앞서서 쟁탈전을 벌이던 녀석들은 세이프 라인을 지나자마자 서로에게 1, 2성급 원소 마법을 휘둘러 댔다.
고작 1, 2성급에 불과하다 보니 대련 때 만큼의 살벌함은 없었다.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할 뿐.
참고로 세이프 라인을 벗어나지 않은 학생을 향해 마법을 휘두르거나 진로를 차단하는 행위는 반칙이다. 그래서 앞에 있는 녀석들은 자기들끼리만 싸우는 것이었다.
이제 곧이다. 세이프 라인이 가까워져 간다.
클로버 팔라딘인 피에르 플랑체도, 내 멘티인 스노우화이트도, 점차 세이프 라인에 다 와 가고 있었다.
피에르를 제외하고, 녀석의 팀원들이 앞서나가기 시작하자 나는 내 팀원들과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몸 안에서 마력 회로를 순환시켰다. 얼음 마력을 그러모으고 오른손을 펼쳤다.
내 주위에서도 학생들의 마력이 점차 퍼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세이프 라인을 넘어선 순간.
“……!”
“뭐…?”
화아아아.
막강한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자 학생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그 근원지는 역시나 단 한 명뿐. 실격 당한 도로시를 제외하고 현 참가자들 중 가장 강한 놈.
베이지색 고운 머리칼. 연초록 눈동자의 사내.
피에르 플랑체였다.
푸아아아아!!
“으아아악!!”
“꺄악!!”
피에르에게서 물 원소 마법이 튀어나와 무서운 기세로 소용돌이쳤다. 대규모였다. 고작 1성급 기초 원소 마법인 [물 생성]임에도 많은 학생이 무력하게 휩쓸려 나갔다.
동시에 트랙을 따라 높은 파도가 밀려들고.
놈의 기초 물 원소 마법은 단숨에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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