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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199화 (199/334)

〈 199화 〉 스승 (3)

* * *

움직일 수 없었다.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아 마법이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입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고가 뒤엉켰다. 어느덧 시야마저 흐릿해져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겨우 원소 마법을 휘둘렀다. 아직 적이 건재했으니까.

적은 오즈의 나라. 부유섬, 지괴의 카발리온.

용암이 흐르는 지면. 수많은 사람 머리가 튀어나온 채 나를 비웃었다. 이를 악물고 마력을 한계까지 긁어내 마법을 쏟아 내 보지만, 그 지랄 맞은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전부 죽는다.

도로시를 구해 내지 못한다.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악에 받쳐 떼쓰는 것밖에 더 되지 않았으나, 그러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았기에.

그리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때.

‘아이작’이라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나는 이성을 되찾고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새겨진 도로시가 보였다.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아이작.’

‘날 구하러 와줘서 고마워’.

‘…미안해.’

도로시는 겨우 회복된 미량의 마력을 쥐어 짜서 내 몸을 멀리 날려 보냈다.

주위로 별 무리가 떠다녔다. 내 몸은 무력하게 부유섬에서 떠나갔다.

당장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다. 도로시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법을 거두지 않았다.

이내, 그녀의 몸에서 찬란한 광채가 퍼져나가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폭발이 오즈의 나라를 집어삼켰다.

그 광경에 나는, 피눈물을 쏟으며 괴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돌연 포근한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눈앞의 광경이 잿가루처럼 사라져 갔다.

그리 편안한 감각에 머무르니, 이윽고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이 새겨졌다.

“…아.”

눈을 떴다. 그제야 내가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던 까닭인지, 사암의 시련에서 떠올랐던 기억이 꿈속에서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자주 꾸는 꿈이었다. 내가 잠을 통 깊이 못 자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나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건가?

‘음?’

어째선지 풍만한 무언가가 내 얼굴 반쪽을 감싸고 있었다.

아직 잠 기운 탓에 이성적인 판단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심리적 안정감이 느껴졌다.

‘뭐야?’

그게 무언가 싶어서 한번 조물조물 만져 보았다.

그것은 흠칫 떨렸다.

천의 감촉. 그리고 그 너머, 굉장히 보드라운 덩어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읏….”

이어지는 끈적한 소리를 듣고 나서 그것이 더는 만져선 안 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풍만한 것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치들었다. 뺨을 붉힌 채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루체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아이작, 변태.”

루체는 눈을 좁혔다. 신경질적인 어투였으나, 그녀 특유의 속삭이는 목소리 탓에 고막을 간질이듯 고혹적으로 들렸다.

그다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루체. 심리를 읽고서 그녀가 썩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누가 변태냐.

“미안…. 근데 뭐하고 있었어?”

“너 악몽 꾸고 있는 것 같길래.”

“아아.”

그랬구나. 고마워지네.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뻐근한 목을 돌리고 있자 루체도 몸을 일으켰다.

“그건, 고맙다. 악몽 꾼 거 맞아.”

“무슨 악몽?”

“…아쉽네.”

“뭐가 아쉬운데?”

“아쉽게도 까먹었어.”

도로시를 구하지 못했던 기억이다.

1회차 때의 내겐 원옥마수-디아칸이 없었다. 때문에 의문의 지하실 열쇠를 써서 부유섬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손에 넣는 걸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끝내 도로시는 [초신성 폭발]로 부유섬과 함께 자폭했고.

한동안 나는 슬럼프에 빠져서, 도로시의 빈 자리를 느낄 때마다 자책하며 살아가야만 했다.

멍청하고 한심한 놈이었지.

그래도 그 기억만은 제대로 되찾아서 다행이었다.

실패를 되새길수록 안주하지 않고 발버둥 치게 되니까. 다시는 그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안아줘서 고맙다. 나 지금 좀 냄새날 텐데….”

“괜찮아. 오히려 좋았어.”

내 냄새가?

루체는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흘리고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작 냄새, 좋아.”

아무리 봐도 좋을 것 같지 않은데. 루체의 후각이 이해되지 않았다.

“너 코 괜찮냐?”

“응? 멀쩡한데?”

“아니, 됐다….”

그럴 수 있지.

침대에서 내려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책상에 놓인 램프만이 어두운 방 안에 은은한 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몸에 피로가 썩 가시지 않은 느낌이었다. 악몽에 시달리고 오래 못 자서 그런 거겠지.

부스스한 머리칼을 긁적였다. 어으, 얼른 샤워나 하자.

“으, 찝찝하네. 루체, 넌 씻었어?”

“아침에 하고 아직. 아이작 안아주느라 못했네.”

“미안한데 나 먼저 씻을게. 얼른 씻고 싶다.”

“같이 씻을래?”

“……?”

“농담이야. 눈 반짝이지 마, 변태야.”

잠깐 당황했다.

루체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침대에서 내려가곤 욕실로 들어갔다.

어? 잠깐만.

“어? 야, 나 먼저 씻는다고…!”

“불만 있으면 같이 들어가든가.”

루체는 욕실 문밖으로 고개만 슬쩍 내밀더니 능청맞은 미소를 흘렸다.

내가 눈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그녀는 인사하듯 문밖으로 손을 흔들고는 문을 닫았다.

치사하지만 날 걱정해서 내내 안아줬을 테니 봐줘야지.

욕실 안쪽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살결에 부딪치며 차라락, 거리는 소리. 쓱쓱, 거리는 소리. 저 안쪽에서 루체가 나신으로 씻고 있다고 상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입은 옷이 바뀌어 있었다. 루체가 내 마법 주머니를 뒤져서 여벌 옷을 꺼내고 갈아 입혀준 듯했다.

헤겔 마탑에 오기 전, 이런 상황에 대비해 카야에게 마법 위장 복식을 맡겨둬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어이없게 튀어나왔을 테니까.

기존에 입었던 옷은 책상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그 옷의 셔츠 깃 안쪽에는 빙설룡-힐드가 작은 마력의 형태로 숨어 있었다.

‘힐드, 무슨 일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다.]

‘……?’

목소리 은근슬쩍 떨고 있는데.

‘무슨 일 있었는데?’

[진짜로 별일 없었다! 단지 이 늙은이가 오랜만에 설레본 것 말고는. 흐흐.]

‘그러냐.’

젊은 아가씨 같은 고아한 목소리로 자신을 늙은이라 칭하니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튼, 더 말 안 해도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로 별일 없었겠지.

아마도 루체는 악몽 꾸던 나를 껴안았을 때 천 살 넘은 할머니 백룡마저 설레게 할 좋은 멘트라도 내뱉었던 모양이었다.

“으어….”

일단, 빙설룡이 무슨 멘트를 들었든지 간에 지금은 무척 피곤할 뿐이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물어보자.

침대에 풀썩 나앉았다. 잠깐 자고 일어났음에도 피로가 영 가시지 않았다. 잠을 거르면서 머리를 지나치게 많이 쓴 까닭일까. 그나마 남아 있던 체력도 [빙뢰]를 처음 사용하면서 싹 달아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침대가 한 개구나.

아리아가 악의적으로 방 하나에 우리를 쑤셔 넣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설마 침대가 하나일 줄은 몰랐다. 어떻게 자냐…?

이윽고 욕실 문이 열렸다.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곳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목욕 가운 차림의 루체가 나왔다.

로즈골드색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새삼 느끼지만, 육감적인 몸매였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루체는 내 눈을 슬쩍 피하면서 물었다. 내가 왜 쳐다보는지 자기도 이유를 아는 듯했다.

“딱히?”

눈 호강했다. 역시 내 차애캐.

당장에라도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나는 루체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기분 좋게 샤워하고, 목욕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어째선지 방 안에 허브 향이 감돌았다.

목욕 가운 차림의 루체가 따뜻한 허브 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내가 나올 타이밍을 맞췄구나.

씻는 동안 루체는 화장한 듯했다. 안 해도 예쁜 얼굴이지만, 나를 의식한 모양이었다.

“아이작, 이거. 피로 회복에 좋을 거야.”

“오, 고마워.”

냉기를 흘려 허브 티를 식히고 들이켰다. 그렇게 원 샷하고 찻잔을 책상에 두었다.

아, 머리가 안 돌아간다. 개운하니까 더욱 졸려 뒤질 것 같은 감각은 처음 느껴본다.

[빙뢰]를 처음 사용해본 부작용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어서 자고 싶었다.

곧바로 침대에 앉았다. 책상 앞에 서서 허브 티를 한 모금씩 마시던 루체는 나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내 눈을 피한 것이었다.

괜히 어색해지게 만드네.

“루체, 나 연구실 가서 잘까?”

“왜?”

“침대 한 개잖아.”

“싫어, 여기서 나랑 자.”

루체는 태평하고 단호했다.

나야 좋았다. 거부감 안 느껴주니 다행이네.

나는 루체가 좋으니까, 얘만 괜찮다면 상관없었다.

“그래, 뭐….”

눈꺼풀이 자꾸만 감겨 왔다. 이제 못 참겠다.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름 침대는 큰 편이었기에 두 명이 자도 문제는 없었다.

“그럼 나 먼저 잔다.”

눈을 감자 금세 몸이 늘어졌다. 금방 잠들 것 같았다.

아, 한마디만 하고 자자. 루체가 날 악몽에서 건져줬으니까.

“루체.”

“응.”

“안아줘서 고마웠어. 정말로.”

“…응.”

루체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포근하고도 온화한 기분을 만끽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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