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스승 (5)
* * *
아리아의 심리를 읽었다.
그녀는 내가 마족을 해치우고 다니는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모든 걸 커버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 안 했지만…, 어디서 꼬리가 잡힌 걸까. 아리아가 확신까지 할 정도로.
“무슨 말씀입니까?”
“작년에 엘트섬에서 벌어졌던 마족 출현 사건.”
수렵 평가 때의 얘기인가.
“엘트섬 중앙에서 땅을 깊이 파내고 마나 잔흔을 발견했던 것. 마나 잔흔은 공기와 접촉하면 금방 사라지지만, 땅속에 묻힌 건 긴 시간 유지되니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마나 잔흔을 수집해 보관하고, 아카데미 시험에서 채취한 네 마나 잔흔을 여기서 비교해본 것. 결과는 말 안 해도 알 터.”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었다.
부정하고 싶었으나, [심리 간파]는 지금 아리아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고 내게 일러주고 있었다.
그런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이미 작년부터 나와 있었단 말인가.
…납득은 간다.
엘트섬. 땅속 거인에서.
나는 악식의 카야를 쓰러뜨리고 무상의 엘페르트를 처치했다. 그 직후 거인의 몸은 사라져갔고, 그 몸이 있던 자리는 원 상태로 복구되었다.
즉, 악식의 카야와 싸우고 남은 마나 잔흔은 즉시 흙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나는 리제타 라이온하트와 같이 도망치느라 뒤처리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니.
결국, 아리아 릴리아스는 진작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이번이 좋은 기회다, 싶어서 날 부른 거였나.’
7성급 마법을 가르치기 위한 만남이라면 내게 호의적인 접근이 가능해지니까.
아리아는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 말을 멈추고 잠시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복잡해진 머릿속을 갈무리했다.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증거가 있었음에도 여태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 누군가 증거를 은폐했음을 뜻했다.
그 당사자가 아리아 릴리아스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 귀결되니 자연스레 의문이 떠오른다.
‘왜?’
왜 날 지켜줬던 건가?
아리아는 내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눈을 지그시 깜박이고 책상 위에 놓인 납작한 상자에 손을 올리며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몹시 차분하고 침착해 보였다.
“순순히 대답할 거란 생각은 안 했다만, 걱정하지 말 것.”
아리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네 편이니까.”
내 편?
“치명적인 증거는 은폐해둔 것. 공개적으로 남겨둔 건 누가 이름 없는 영웅인지 고민하다 끝내 답이 안 나올 단서들뿐.”
“그건 불법….”
“쓸데없는 말 할 거면 아가리 여물 것.”
걱정돼서 한 말이었는데. 황실 기사단 상대로 배짱도 좋구나.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마 아리아하고는 긴 이야기가 필요할 듯했다.
“…나와, 힐드.”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이 손목에 새겨지며 연푸른빛을 발했다.
그 위로 빙결 마력이 뭉치더니 작은 백룡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빙설룡-힐드였다.
[주인?]
빙설룡은 내 어깨 위에 안착하고는 나와 아리아를 번갈아 보며 곤란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내가 정체를 드러낸 까닭이었다.
빙설룡-힐드. 태초의 빙제가 다루었다고 전해지는 신화 속 마수.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내 최대 전력 중 하나였다.
“대답은 이걸로 된 것 같네요.”
아리아의 두 눈이 잠시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저 사람도 놀랄 줄 아는구나.
“당신 말고 또 누구 있습니까? 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느그 교장…, 아니, 너희 교장.”
차분하게 말을 바꾸는 아리아.
“널 의심하는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건 우리 둘뿐. 그리고 너희 교장 또한 네 편인 것.”
엘트섬에서 채취한 마나 잔흔과 내 마나 잔흔을 비교하려면 아카데미의 도움이 필요했겠지. 내 마나 잔흔을 채취하기 위해서.
따라서 메르헨 아카데미를 통솔하는 교장, 엘레나 우드라인이 개입해 있다면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왜 제 편입니까?”
“마족과 싸우고 인간을 지키는 대마법사. 황국도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지닌 강대한 존재. 그리고 그가, 내가 모르는 지식을 갖고 있으리란 기대감. 내가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이유는 차고 넘친다고 본다만. 엘레나도 비슷한 것.”
이름 없는 영웅은 부유섬까지 해치우고 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따라서 이름 없는 영웅을 두고 이해득실을 고려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매우 많을 것이었다.
아리아도 그중 한 명이리라.
“아이작, 너.”
아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만한 힘을 가졌으면서 왜 연기해온 건지? 내가 보기에…, [빙뢰]를 익히려고 했던 네 모습은 전혀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뜸을 들였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아리아는 비중이 거의 없었으니, 그녀가 어떤 사람 됨됨이를 갖추었는지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정리했다. 전부 까발리지 말자.
내 편이라고 한 말은 분명 진심이지만, 그녀를 온전히 믿어도 될지 알아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터.
사람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또, 내 비밀을 전부 고분고분하게 드러내는 행위는 내 약점을 상대방 손에 쥐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힐드, 다시 들어가.”
[알았다, 주인.]
빙설룡-힐드는 다시 마력의 형태가 되어 연기처럼 사그라졌고.
내 손목에서 빛나던 사역마 계약진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거라면 지금은 괜찮은 것.”
이해해주는 분위기라 다행이었다.
아리아는 책상 위에 놓인 납작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어 염동력으로 상자 안에 든 책을 손 안 대고 들어 올렸다. 그 책이 내 앞으로 날아들었다.
책은 공중에 뜬 채로 펼쳐졌다. 상당히 낡은 페이지엔 흉측해 보이는 생물 그림과 읽을 수 없는 언어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역사 속 마족을 다룬 고서(古書).”
이게 옛날 마족을 다룬 책인가. 이런 건 게임에서 본 적이 없었다.
염동력으로 페이지가 넘겨졌다. 내가 아는 마족으로 추정되는 놈이 삽화로 그려져 있었다. 이건… 딱 봐도 부유섬이네.
“어떤 생물을 마족이라고 부르는지는, 알고 있는지?”
그냥 게임 속 시스템에서 마족이라 나오고 다들 마족이라고 부르니까 ‘아, 마족이구나’하고 이해한 것뿐이었다.
물론 학술적인 구분법은 있었다.
“어둠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악하고 위험한 생물. 마물의 상위종.”
마물은 몸 안에 마법 회로가 없기에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 해악만 끼치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마수하고는 다르다. 마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 외의 생물을 지칭하며, 몇몇 사악한 마수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간혹 어둠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특이한 마물이 출현하는데, 그 생물이 바로 마족으로 분류된다. 위험도는 마물과는 확연히 차이 나며, 예외없이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그렇다면, 그 마족이란 생물도 대마법사보다 뛰어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예?”
“아니, 마족뿐만이 아닌 것. 마족이든, 천족이든, 심지어 요정이든, 어쩌면 인간까지도… 신의 경지에 가까울수록 공통점이 있는 것.”
“…그게 뭡니까?”
고서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졌다.
그 페이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나는 눈을 좁혔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으니까.
마치 밑단이 긴 드레스를 입은 듯한 마족. 그 또한 녀석의 신체 일부였다.
그 부분엔 굉장히 많은 눈이 박혀 있어 기괴하고도 혐오스럽게 보였다.
서리의 시련에서 보았듯, 악신 네피드를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초월적인 힘을 발현할 수 있고, 신비로운 힘을 지닌 눈이 많다는 것.”
아리아는 자기 눈을 가리켰다.
악신에 이어 떠오르는 건 사암의 시련에서 보았던 진실.
악신이 종말을 불러오는 때, 대한민국 땅에서 튀어나오는 미지의 생명체 또한 눈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
의문인 건… 아리아가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으며, 정보의 출처가 어디이며, 왜 그 이야기를 내게 꺼내느냐는 것이었다.
마탑은 지식과 정보에 폐쇄적인 경향이 있다. 이는 곧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아만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마족과 관련된 것일 줄은 몰랐다.
“눈은 외형 얘기 같은데, 초월적인 힘은 뭡니까?”
“말 그대로 초월적인 능력. 정교한 생물을 창조하거나, 생물의 영혼을 바꾸거나, 또 하나의 해와 달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세계에 개입하거나.”
“…….”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저 나는 굉장하다고 칭송만 할 뿐, 일부러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고 있었다.
내가 애정을 품은 애잖아.
‘도로시….’
예정된 죽음을 회피하고, 맞이할 수 없었던 미래를 맞이한 도로시다.
그녀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능력을 발휘한 적이 있다. 다른 세계를 관측하고 그곳에 개입하는 능력이었다.
마치 생사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린 내 하수인, 원옥마수-디아칸처럼 초월적인 능력을 갖춰가는 것이었다.
10년 안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천재. 그런 전망은 평범한 인간들이 내놓은 것일 뿐.
도로시는 그 이상의 존재였고.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아마도….
‘별의 요정이겠지.’
별의 요정, 스텔라.
2학년 2학기 파트, 「요정 대전」에서도 스텔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녀석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메르헨의 마법 기사> 플레이어들은 아무도 몰랐다.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했던 것이다.
녀석은 도로시에게 별빛 속성을 선물해주었다. 그 힘이 도로시를 더욱 높은 경지로 이끌어주고 있는 거겠지.
“방금 전의 이야기는 헤겔 마탑에서 마법사들을 파견 보내 정보를 수집하고, 고서를 구해내고, 전설을 연구하며 알아낸 것. 내가 마탑주가 되기 이전부터 쭉 그래왔던 것.”
오랜 시간을 들여 알아낸 정보였던 건가.
역시 이상했다. 왜 이런 사람이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별다른 비중이 없었는지.
“그래서 묻는데.”
그녀는 팔짱을 책상 위에 올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본론이 나올 차례였다.
“너, 눈 많은 존재한테 힘을 부여 받은 건 아닌지?”
이건… 뭔 소리냐.
“초월적인 존재가 너를 선택한 건 아닌지, 묻고 싶었던 것.”
나를 이 세계에 빙의시키고 ‘상태창’을 준 존재가 눈이 몇 개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다만 나를 빙의시킨 배경에는 대한민국에 있는 게임사 ‘힉스’가 관련되어 있으리란 점은 분명했다.
내가 보는 시스템창 UI는 그 게임사가 만든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애초에 그놈들이 날 이곳으로 보낸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다만 그놈들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만약 마탑주님 말씀처럼 그런 존재에게 힘을 받았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거래를 하고 싶은 것.”
아리아는 손가락으로 자신과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나는 네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네 행보에 도움이 되어줄 것. 대신, 너는 내가 알아낼 수 없는 지식을 제공할 것. 나는 마법사.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 지식의 바다를 항주하는 항해자. 그런 내게 있어 너는, 그야말로 신이 내려준 지식의 축복, 일확천금보다 탐나는 선물 보따리니까.”
이 세계에서 온갖 책을 다 읽어도 내가 가진 지식을 찾아낼 순 없을 터.
가령 피자핫의 립스테이크피자가 맛있다는 정보를 여기서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게임사 ‘힉스’, 시대를 앞서 나갔다고 평가 받는 초고퀄리티 명작 게임 <메르헨의 마법 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겠는가.
그 게임이 이 세계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침묵 속에서 아리아와 눈을 마주 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감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제자 놈이 온 것.”
페르난도 교수 왔구나.
“루체 엘타니아도 면담해야 하니,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끝내야 할 터. 내 제안은 천천히 고려해주길 바라는 것. 그리고, 만약 네가 날 신뢰할 수 있게 된다면 네 목적을 알려주길 바라는 것.”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길.”
아리아의 눈은 마치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생각했다.
아리아 릴리아스. 그녀는 ‘나는 네 편이다’라는 말을 굳이 돌려서 하지도 않았고, 목적도 분명했다. [심리 간파]로 그녀의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당분간 그녀를 눈여겨보는 편이 좋으리라. 호의적으로 고려해볼 가치가 있어 보였다.
“네. 그간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선생님.”
마지막 호칭은 선생님으로.
어쨌든지 간에 그녀는 내게 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주었으니.
나는 상체를 숙이고 작별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흥.”
아리아는 코웃음 쳤다.
“살다 살다 대마법사한테 선생님 소릴 다 들어보는 것.”
어이가 없어서 웃긴 모양이었다.
* * *
아이작 다음으로 루체 엘타니아는 개별 면담에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는 루체. 중립 속성 마법, [음파 차단]이 집무실에 전개되어 있었다. 방음 용도로 자주 쓰이는 마법이었다.
“중요한 질문을 할 테니 잘 들을 것.”
아리아는 진중한 표정으로 첫 질문을 던졌다.
“어젯밤에… 둘이 했는지?”
눈빛을 반짝이는 아리아.
루체는 만면에 혐오감을 내비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