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스승 - 막간 (1)
* * *
“실망한 것.”
헤겔 마탑 앞.
나와 루체가 페르난도 교수의 마차에 올라탈 때, 아리아 릴리아스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페르난도 교수는 자기 스승에게 인사하려다 당황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
“내가 원했던 건 두 사람이 역사를 세우는 것이었거늘. 이런 재미없는 녀석들…. 페르난도, 네 제자마저 널 똑 닮아서 재미가 없는 것.”
“……?”
페르난도 교수는 아리아의 투덜거림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동감한다. [심리 간파]를 쓴 나조차도 그녀의 사고방식이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루체의 귀가 무척 빨개졌다. 마차에 앉자마자 자기 얼굴을 숨기고 싶은지 곧장 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 부끄러워하네.
아리아는 마차의 열린 문을 통해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어쨌든. 아이작, 루체 엘타니아. 알아서 건강하길.”
“선생님도요!”
아리아는 손을 흔들었다. 지나친 동안 외모 탓에 어린애가 인사하는 것처럼 보여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맞인사했다.
페르난도 교수도 상체를 숙여 인사한 후, 마차에 올라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마부가 마차를 끌기 시작하고, 아리아는 우리를 지켜보다 헤겔 마탑으로 돌아갔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페르난도 교수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나와 루체에게 물었다.
옆에서 루체는 고개를 흠칫 떨더니 입을 더욱 굳세게 다물었다. 내가 대신 대답해주는 편이 좋겠지.
“아마 마지막 날인데도 인사 안 하고 잠들어서 그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했어요.”
아이작표 순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런 일로 아리아는 삐치진 않는다. 페르난도 교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와 루체를 번갈아 보았지만, 이내 눈을 감고 단념했다. 중요하게 물어볼 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뭐, 그런 건 됐다. 그럼, 10일간의 훈련은 어땠나?”
페르난도 교수는 다시 눈을 뜨고 물었다.
어제까지 헤겔 마탑에서 보낸 시간은 총 10일.
예전부터 [빙뢰]를 익히기 위해 분주히 단련하고 있었지만, 마탑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이른 시기에 끝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아리아의 도움이 컸다.
일반인의 관점에선 엄청난 성과였다.
대부분의 엘리트 마법사가 평범한 7성급 원소 마법을 익히려면 평균적으로 약 30년의 세월이 소요된다.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던 헤겔 마탑주 아리아 릴리아스조차 수 년이 필요했다.
그런 걸 나는 고작 아카데미 학생 나이에 익혀 버렸으니.
이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함축적으로….
“즐거웠습니다.”
성취감을 느꼈다. 도저히 풀리지 않았던 어려운 문제가 풀렸을 때의 성취감을.
10일간 틈만 나면 척추를 타고 오싹함이 몰려왔다. 흥분돼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문제의 해답을 찾아냈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루체도 함께 있었으니. 즐거웠다는 표현이 적합하겠지.
“나도 나름….”
루체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개별 면담에서 불건전한 대화가 오간 듯한데, 그 뒤로 쭉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인다.
나와 페르난도 교수는 루체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간이 흘러 마차는 교정에 도착했다. 잠도 거의 안 자고 하루하루를 생으로 보내다 보니 꽤 긴 시간을 보내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아카데미의 풍경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수고했다. 오늘은 푹 쉬거라.”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와 루체는 짐을 챙기고 내린 뒤 페르난도 교수에게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페르난도 교수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돌아가자, 루….”
휙. 내가 시선을 주자마자 루체는 바람이 일 정도로 고개를 빠르게 돌려 버렸다. 여전히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웃는 입을 유지했지만, 당황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개별 면담에서 정확히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아리아의 음습한 의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슨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길래 요망했던 애가 이 지경이 될 수 있나.
“응, 가자….”
루체는 고개를 숙이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오늘은 쉬는 날이기에 교정에 나다니는 학생이 적었다. 그나마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죄다 사복 차림이었다.
루체는 피로가 온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기숙사에 들어가서 쉬겠다고 했다.
생활동 갈림길에 이르렀다. 루체는 최상위권 기숙사인 샤를관, 나는 중상위권 기숙사인 엘마관으로 가야 했기에 거기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루체 덕분에 어젯밤은 편안하게 푹 잘 수 있었으니까. 그리 숙면할 기회는 얼마 없었기에 몇 번이고 감사를 표현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루체는 간단히 ‘응’이라고만 대답하더니 두 마디 이상의 대화는 자제했다. 여전히 나를 심하게 의식하는지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여웠다.
그리 우리는 헤어졌다.
기숙사 들렸다 바로 나가야겠다.
‘얼른 단련에 들어가야지.’
컨디션은 최고조였고, 어제 막 [빙뢰]를 익힌 참이라 의욕도 넘쳐났다. 어서 빨리 그 마법을 숙달하고 싶었다.
잰걸음으로 엘마관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빙뢰]를 익혔으니 이제 [만년설], 더 나아가 [황천 빙하]까지 익혀야 한다.
‘특히 [황천 빙하]는 여름 방학 끝나기 전에 익히고 싶은데.’
2학년 2학기 때는 천족과 요정도 대비해야 한다.
두 종족을 한 학기만에 대비하기엔 스탯 분배에 여유가 없을 터. 즉, 스스로를 지키려면 공격을 무력화해주는 마법이나 보호 마법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었다.
공격 무력화에 최적화된 7성급 얼음 원소 마법 [황천 빙하]나, 최고의 방어력을 갖게 해주는 암철검의 고유 마도 [암식]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제 고유 특성 [멸악자]가 발동될 시 궁극의 얼음 원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9성급 얼음 원소 마법, [한빙지옥].
아직은 1학년 1학기 대련 평가에서 허상의 리파를 상대할 때 만큼의 위력은 못 내겠지만, 충분히 무시무시한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을 정리하던 중, 문득 아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초월적인 경지….’
아리아가 말한 신의 경지에 이른 존재는 내가 엮인 자들만 2명이다.
한 명은 내 최종 목표이자 이 여정의 종착점인 악신 네피드.
다른 한 명은 헨젤과 그레텔을 거두어 주었던 과자집 마녀였다.
과자집 마녀는 루체의 품 안에서 죽었다. 그 이후로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듯한데, 그리 된 경위는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사람이 그렇게 되려면…, 일단 죽는 게 조건인가?’
…과자집 마녀라는 사례 하나로 판단하기엔 너무 거창한 주제였다. 지금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오는 안건은 일단 보류해 두자.
당장에 생각해야 할 건 다음 시나리오 과제.
‘앨리스 토벌전.’
성서에는 주신 만할라가 제르베르 황국의 땅을 풍족하게 만들고자 축복의 씨앗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적파일’이라고 불리는 공휴일의 기원이다.
얼마 안 남았다. 그날이 오면 저녁에 연례 행사가 열릴 것이고.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돌연 바르토스관 위로 앨리스의 사역마, 악몽룡-재버워크가 나타나 포효하며 2학년 1학기 마지막 파트인 「9막, 앨리스 토벌전」이 시작되리라.
이제까지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었다. 앨리스가 팔라딘 데려왔을 땐 식겁했는데.
뭐, 본래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리란 기대는 조금도 안 한다. 내가 아는 게임 지식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일 뿐. 예측은 진작 무의미해졌으니까.
내 목표는 아무도 죽지 않고 시나리오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었다. 도로시가 살아 있으니 전력은 든든했다.
다만, 여전히 찝찝한 건….
‘앨리스가 왜 자살하는지.’
앨리스와 수차례 데이트하며 웃고 떠들었지만, 왜 그녀가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살하는지는 여전히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느덧 중상위권 기숙사 엘마관에 도착했다. 고민은 미뤄두자. 지금은 [빙뢰] 숙달에 매진해야 할 때다. 얼른 옷 갈아입고 나가서 단련해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문 손잡이를 잡자마자,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인.]
내 셔츠 깃 안쪽에 작은 마력의 형태로 숨어 있던 빙설룡-힐드가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내 눈이 좁혀졌다.
문 고리가 차갑다. 마치 혹한에 방치됐던 것처럼.
내 방에 누군가 있었다.
‘앨리스나 체셔, 팔라딘의 마력, 느껴져?’
[그들의 마력이라면…, 전혀. 단지 조금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안경을 벗고 품 안에 집어넣었다. 언제라도 싸울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힐드,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 봐.’
[알았다.]
형작처럼 작은 빙설룡-힐드가 문틈으로 들어갔다.
이내, 녀석이 말했다.
[주인, 들어와도 된다. 불청객은 아닌 것 같구나.]
내 방에 멋대로 들어와 놓고 불청객이 아니다? 뭔 소리야.
일단, 적이 아니라면 직접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처음 보는 존재가 내 시야에 내비쳤다.
창가 앞. 신장만 3m가 넘어 보이는 거한이 가만히 서 있었다.
검은 망토로 추정되는 것을 꽁꽁 싸맨 길쭉한 몸. 낡아 빠진 마법사 모자. 모자 챙으로 가린 기괴한 얼굴. 아침 햇볕조차 그의 음산한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놈의 연푸른빛 안광을 마주했다.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누구야?”
생김새는 괴물 같았다. [마족 감지]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걸 보니 마족은 아니었다.
놈의 상태창을 열었다.
[상귀-메르뷸]
Lv :180
종족 : 마수
속성 : 얼음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고 싶어 합니다. ]
[내 옛 동료다.]
빙설룡-힐드는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