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 앨리스 토벌전 (8)
* * *
냉기 폭발이 어둠 마력으로 이루어진 구름을 몰아냈다.
직전에 위기를 감지한 앨리스는 뒤로 물러나더니, 목에서 뻗어 나온 검붉은빛 날개로 날갯짓하며 자세를 갈무리했다.
하늘에서 두 남녀가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구름에 거대한 구멍이 뻥 뚫린 광경이 비쳤다.
냉기를 휘감은 아이작 주위로 여섯 개의 연푸른빛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그곳에서 각각 [빙제]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펼쳐지는 건 세 쌍의 냉기 날개.
온화하고도 묵직한 냉기가 선율처럼 흐른다. 이는 얼음 원소 속성 최고의 경지, [빙제]의 기운이었다.
휘우우우우.
서늘한 감각.
연푸른빛 마력이 흐르는 적적한 적안이 앨리스의 몸을 빼앗은 마족을 노렸다.
앨리스에게서 우후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여러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마치 복화술이라도 하듯 앨리스는 무표정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 뻗어 나온 양팔에서 여러 개의 입이 생겨나 깔깔 웃고 있는 것이었다. 그중 입 하나가 두툼한 입술을 움직였다.
[존경하는 이름 없는 영웅이여.]
쉰 소리로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 아이작은 그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앨리스, 아니.
계약의 메피스토가 앨리스의 몸으로 인간의 예법을 지켜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제 이름은 메피스토. 부디 본체로 인사드리지 못하는 무례는 용서해주시길.]
“…….”
[어머,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이군요?]
기괴한 팔에 입이 점점 늘어났다.
메피스토의 입은 따로따로 한 마디씩 내뱉었고, 다른 입술들은 뻐끔거리며 웃음소리를 흘리거나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저는 하트 여왕과 계약을 맺었답니다. 그녀는 계약 이행에 실패할 시 자기 몸을 내주기로 했죠.]
“그럼, 지금 그 몸은?”
[완전히 제 것이 되었답니다!]
수많은 입술이 깔깔대다 웃음을 뚝 그쳤다.
[설마, 동정하고 계시는 건 아니죠? 하트 여왕을 살리고 싶었나요?]
어느새 수십 개가 넘어 버린 입술이 쫙 찢어지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이네요…. 하트 여왕은, 이제 없답니다?]
지금 앨리스의 몸은 계약의 메피스토가 심어둔 인격의 파편과 어둠의 힘에 잠식된 상태.
[그녀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절 이 육체에서 빼내려면, 이 몸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방법 말고는 없단 말이죠?]
죽음을 뜻했다.
그렇다. 죽음뿐이었다.
악신을 부활시키는 데 실패하면 그 어디에서도 앨리스는 구원 받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쌓아온 힘과 능력을 모두 빼앗겨 재앙을 키우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이작은 입을 잠시간 열었다가 닫았다. 그가 보인 반응은 그뿐이었다.
[이름 없는 영웅이여, 아쉬워하지 마시길! 열등한 종족이 이 세계를 짊어져 봤자 열등한 세계가 될 뿐이에요. 하트 여왕의 희생은 네피드 님께서 만드실 새로운 세계를 위한 훌륭한 거름이 될 거랍니다. 이 얼마나 숭고한 일…!]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쉰 목소리로 지껄이는 메피스토의 삼류악역 같은 신념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너희 박멸할 거니까.”
바퀴벌레 잡듯 마족은 전부 짓이길 뿐.
메피스토는 다시 고개를 들고 아이작을 쳐다보았다.
[이해를 못 해주시니 아쉽네요. 그런데 말이죠.]
저 청은발의 인간은 틀림없는 인류 최고의 강자.
그런 상대를 오늘 이 자리에서 없앨 수 있으리란 생각에 메피스토는 흥분했다.
[어차피 당신은, 여기서 죽을 텐데요?]
마족들이 포효하며 메르헨 아카데미가 있는 섬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섬과 바다를 내려다보며 잠잠히 눈을 깜박였다.
메피스토는 힘의 우위를 구분 짓지 못 하는 어중이떠중이 마족이 아니다. 즉.
“…믿는 구석이 있구나.”
아이작은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그 확신과 지금의 상황, 여태 고려해 왔던 여러 변수가 머릿속에서 맞물리고.
한 가지 터무니없는 발상이 아이작의 뇌리를 스쳤다.
냉철하게 사고를 갈무리했다. 어쩌면… 앨리스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었다.
“넌….”
아이작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쓰고서 분노가 서린 냉혹한 눈으로 메피스토를 노려보았다.
전술했듯 앨리스 캐럴과 그녀의 부하들이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건 국익을 위한 탐욕 때문도, 복수를 위한 분노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협박 당해 내몰렸던 것에 불과했다.
결국엔 가장 나쁜 새끼는 따로 있었다.
그는 앨리스 캐럴의 모든 것을 이용하고, 이제는 그녀의 죽음까지도 유린하며 메르헨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학살하려고 하는, 눈앞의 마족이었다.
“내가 찾아내서 죽인다.”
본체를 찾아내서 죽음을 갈구하도록 만들 것이다.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고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게 하며, 그 끝에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갖고 논 업보를 치르게 하리라.
[어디, 한번 해 보시죠.]
메피스토의 수많은 입술이 도발했다.
그아아아아!!
검붉은 화염을 휘감은 검은 용이 날아와 메피스토의 뒤를 지켰다. 그 용은 아이작을 향해 포효했다.
메피스토의 어둠 마력으로 강화된 악몽룡-재버워크였다.
도로시는 갑자기 강해진 괴묘-체셔에게 가로 막혀 악몽룡을 곧장 뒤쫓지 못했다. 괴묘는 어둠 마력에 잠식 당해 이성을 잃은 채 도로시에게 공격 마법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작은 품 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하얀 단검이 은빛으로 번쩍였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자, 칼날에 새겨진 마법진 3개가 메피스토의 눈에 들어왔다.
서리군주의 자격. 맹세의 검이자 계약의 검. ‘상화의 검’이었다.
아이작은 그 검으로 자기 손을 그어냈고, 그의 붉은 피가 칼날을 스르르 적셨다.
─ ‘힐드, 이거 쓰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 ‘간단하다. 검에 주인의 피를 확 묻히고, 단 한마디만 하면 된다. 뭐라 하냐면….’
빙설룡-힐드에게 들었던 대로.
아이작은 상화의 검에 새겨진 ‘의식의 법진’, ‘소환의 법진’, ‘계약의 법진’을 발동하기 위한 명령을 입에 담았다.
“나를 섬겨라, 뒤펜도르프여.”
검신에 새겨진 세 개의 마법진은 그 한 마디에 반응하듯, [빙제]의 피와 공명하며 연푸른빛으로 발광했다.
[……!]
돌연 메피스토는 앨리스의 육신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 육신은 앨리스에게서 빼앗은 것. 죽더라도 본체는 멀쩡할 것이었다. 그러나 메피스토는 깊은 거부감을 느꼈다. 아이작이 행하려는 의식은 근원적인 공포감을 자극하는 압도적인 무언가였으니.
지금,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위우우웅.
아이작 밑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진이 궤적을 그려 나갔다.
망망대해 같은 막대한 양의 마력이 아이작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물리력에 버금가는 고농도의 마력. 그것은 바다에 격류처럼 번져 나갔고 격한 한풍을 불러와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순백의 광채가 하늘을 물들인 검붉은빛 마력을 몰아내 백야(白夜)를 일구었다.
서리낫의 고유 마도, [천공 지배-백야]. 상공에 급격한 추위가 몰려왔다.
[무슨…?]
위기감을 느낀 메피스토는 악몽룡-재버워크가 일으키는 불길에 몸을 맡겨 추위에 저항했고.
아이작을 향해 보팔 소드를 연속으로 휘둘러 수십 가닥의 검기를 날렸다.
악몽룡-재버워크 또한 검붉은 화염을 뿜어 아이작을 공격했으나.
“힐드.”
매서운 [서리바람]과 함께 6성급 얼음 원소 마법 [엄동의 파란]이 몰아치며 메피스토와 악몽룡의 공격에 대항했다.
아이작 뒤로 백옥빛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 마력은 거대한 백룡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얼음 원소 마력을 쏟아부어 그 백룡의 힘을 강화시켰다. 마침내 아름다운 순백의 마력을 흩뿌리며 무시무시한 냉기를 머금은 사역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초의 빙제가 다루었다고 전해지는 신화 속 마수, ‘빙설룡-힐드’.
그 백룡이 아이작 뒤에서 웅장한 백익(白翼)을 활짝 펼쳤다.
이윽고, 매섭게 너울지던 바다가 삽시간에 얼어 버렸다.
그대로 섬을 향해 진격하던 마족 군대 일부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다 얼어붙고 말았다. 그래도 대부분의 마족은 강인한 마력을 발휘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화아아아아!!
아이작 발밑에 전개된 대형 마법진이 지상을 향해 찬란한 광채를 쏟아 냈다.
아이작은 눈을 감았다.
[존엄.]
정신의 영역. 아이작은 신비로운 얼음 미궁에 발을 들였다.
망토로 추정되는 것을 온몸에 싸맨 얼음 귀신 마수가 상체를 깊이 숙여 아이작에게 예를 표했다.
상귀-메르뷸. 이 미궁의 주인이자 재해급 얼음 속성 마수였다.
[불초의 몸으로 뒤펜도르프의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상귀는 뒤펜도르프를 대표하여 아이작에게 말했다.
[우리를 이끄소서.]
쿠우우우우!!
아이작은 다시 눈을 뜨고 메피스토를 노려보았다.
연푸른빛 마력이 일대를 메웠다. 그 마력이 허공에서, 얼음의 바다 위에서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얼음 마수들과 서리종족의 후예들이 소환되는 광경이었다.
공포의 기운을 머금은 거대한 귀신 마수. ‘상귀-메르뷸’이 기이한 몸체를 드러내 냉기로 이루어진 날개를 뻗었다.
얼음 갑주가 등에 형성된 산맥 같은 몸집을 지닌 하얀 곰. ‘빙퇴웅-바르바토마’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심해 깊은 곳에서 살아가던 폭한을 내뿜는 군청색의 거대 악어 괴수. ‘태동악-투가로스’가 위협적인 거구를 드러냈다.
저마다 천변이나 지변 그 자체로 일컬어지는 강대한 얼음 마수들이었다. 그들은 천 년의 세월을 지나 지금, 한 남자만을 섬기기로 맹세했다.
무질서가 질서로, 재앙이 군세로 변화한다.
“이든.”
고오오오오!!
고밀도의 얼음 마력과 바위 마력이 얼음 바다 위에서 한데 뭉치고, 무시무시한 크기의 골렘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손에는 바위 대검이 들린 채였다.
얼음 마력이 흐르는 바위 골렘 사역마, ‘분쇄자-이든’.
그가 재해급 얼음 마수들과 함께 연푸른 안광을 발했다.
얼음 바다 위에서 존재 자체로 재앙인 마수들이 일제히 포효하며 아이작이라는 한 남자의 위광을 따랐다.
잇달아 소환된 자들은 백금 갑주의 기사단과 냉기를 휘감은 괴수 전사 무리, 서리의 마법사 군단이었다.
그들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하늘에서 세 쌍의 날개를 펼친 채 지상을 관조하는 새로운 서리군주에게 충성의 의지를 담아 경례했다.
얼음 왕국, 뒤펜도르프의 군대.
그들이 그토록 바라왔던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저 자가, 이름 없는 영웅…?”
교직원들, 학생들, 황실 기사단. 메르헨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그 광경을 목도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이름 없는 영웅의 모습은 육안으론 자세히 살필 수 없었으나.
그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이는 다수 있었다.
“아이작, 선배…?”
대피소에 있는 스노우화이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란 표정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도로시와 카야는 얼핏 신적인 존재처럼 보이는 아이작을 곁눈질하며 놀란 얼굴로 전투를 이어갔다.
“아이작…?”
뇌신조를 타고 날고 있던 루체는 뛰어난 시력으로 이름 없는 영웅을 두 눈에 새겼다. 그녀의 휘둥그레 뜨인 두 눈이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명한다.”
빙제, 아이작은 메피스토를 향해 서리낫을 뻗었다.
상화의 검에 담긴 힘이 뒤펜도르프의 군대에 그의 의지를 전달했다.
“마족을 멸해라.”
냉소적인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얼음의 바다 위. 뒤펜도르프의 군대가 함성을 내지르며 메피스토의 마족 군대와 격돌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