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231화 (231/334)

〈 231화 〉 변화 (5)

* * *

사람 온기에 둘러싸여 잠들었다. 개운하게 잠을 푹 잔 까닭에 알 수 있었다.

아침 햇살이 비추고, 신체 알람이라도 맞춰진 듯 자연스레 눈을 떴다. 옆에선 도로시가 샤워 가운이 흐트러진 채로 잠들어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대편이 텅 비어 있었으나, 연한 금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눈에 띄었다. 앨리스는 여기서 잤구나.

‘맛있는 냄새.’

부엌 쪽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앨리스가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시계를 보았다. 등교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도로시 샤워 가운을 간단히 갈무리하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오.’

좋아, 열 떨어졌다.

어제 내 간병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슬슬 나을 시기였는지는 몰라도 천만다행이었다.

도로시의 어깨를 흔들었다.

“선배, 일어나요. 아침입니다.”

“으음, 회자앙.”

곤히 잠든 도로시는 몸을 뒤척이며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잠시간 행복감에 젖어 들었으나, 어서 도로시를 깨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성을 되찾았다.

도로시의 어깨를 좀 더 세게 흔들었다.

“아침에 징계위원회 가야 한다면서요. 지금 안 가면 애들 등교 시간 겹쳐서 몰래 못 빠져나갈걸요.”

“…아!”

그제야 도로시는 눈을 확 뜨더니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징계…! 맛있는 냄새…!”

도로시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중얼거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부스스했다. 그녀는 시시덕거렸다.

“느흐흐, 아이작 머리 뭐야. 완전 새집 지었잖아!”

“선배도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잘 잤냐고 물어보려는 때, 도로시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가 옷장이 있는 칸으로 넘어가더니 다급히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징계위원회는 아침에 열린다. 아직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을 때 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준비해야 할 터였다.

“아이작, 미안해! 샤워 가운 저기다 두고 갈게! 덕분에 잘 잤어!”

“아, 네. 조심히 가요, 선배.”

도로시는 마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별빛 마력을 휘감고는 창문 너머로 날아갔다.

징계로 근신 며칠이 떨어질지 모르겠다. 이따가 징계가 확정됐을 때 한번 보러 가자.

‘앨리스는….’

나와 도로시가 깨어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묵묵부답이었지.

침대에서 내려가 부엌으로 향했다.

내 교복 셔츠만 달랑 입은 연금발 여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헐렁한 옷차림. 앨리스 캐럴이었다.

앨리스는 스튜를 끓이는 중이었다. 그녀가 입은 붉은색 앞치마는 내 방에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마 따로 챙겨 온 듯했다.

내가 다가가자 앨리스는 기척을 눈치채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푸흐, 머리 좀 봐.”

환한 미소가 앨리스의 만면에 걸렸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아 무척 밝아 보였다.

앨리스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개판이 난 내 반곱슬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우리 애기, 잘 잤어요?”

[니옹, 아이작 좋은 아침!]

머리에 작은 중절모를 쓴 뚱뚱한 보라색 고양이 사역마, 괴묘-체셔가 허공을 유영하며 인사를 건네왔다. 나도 “좋은 아침.”하고 담담하게 맞인사했다.

“모처럼 잘 잔 것 같다.”

“일어나자마자 인사 못해서 미안하구나. 도로시가 날 싫어하니까 일단 자리를 피했단다.”

“그러냐.”

도로시가 앨리스를 싫어하는 건 잘 안다.

앨리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길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품었을 것 같진 않았다.

“근데 뭐하고 있었어?”

“스튜 끓이고 있었지. 애기 아침 먹여주려고.”

“냄새 좋다.”

평소에 아침은 가볍게 먹거나 거르는 편이었다. 스튜 정도로 끼니를 때울 수 있다면 나야 좋았다.

식탁에 앉았다. 얼마 안 가 앨리스는 스튜를 그릇에 떠서 숟가락과 함께 내 앞에 내려놓았다.

고기와 버섯 조각이 큼직하게 들어간 스튜였다. 야채도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아침인데도 식욕을 일으키는 냄새가 풀풀 났다.

앨리스도 스튜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더니 숟가락으로 스튜를 떠서 후후, 불더니 내 입 앞으로 내밀었다.

“애기야, 아.”

은근한 애교가 어린 어투.

잠시간 멍하니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루체의 ‘입 벌려’와는 비교가 안 되는 상냥한 언사였다. 흡사 신혼부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을 벌리자 앨리스는 조심스레 내 입안에 스튜를 흘려 냈다.

“오, 되게 맛있다.”

놀랐다. 내 입맛에 무척 잘 맞았다.

“그치?”

사뭇 흐뭇한 미소를 지은 앨리스를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가, 숟가락으로 스튜를 열심히 퍼먹었다. 그제야 앨리스도 스튜를 떠먹었다.

아, 맞다.

“여기서 신세 지겠다고 했지?”

“응. 아무래도 지금은 내가 갈 데가 없잖니.”

황실 기사단과 협력해서 앨리스를 다시 학사 생활로 정상 복귀시키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었다.

그간 앨리스는 아카데미 몰래 내 방에서 지낼 셈인 듯했다.

“여기선 밖에도 못 나가고 조용히 있어야 할 텐데, 차라리 내 아지트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 그 편이 자유로울 텐데.”

“애기랑 있고 싶은데?”

앨리스는 웃는 얼굴이지만 단호했다. 내 아지트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여기에 머무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애기는 시간 관리를 중요하게 여기잖니? 그런데 개인 메이드도 없으니까, 당분간이라도 애기 밥 정도는 챙겨 주고 싶구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나마 내가 부릴 수 있는 하수인들은 죄다 전투 병력이고, 아직 개인 메이드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곳이 가장 안전하기도 했고.

앨리스가 곧바로 내 눈에 띄는 곳에 있다는 점도 좋았다.

“…알았어. 그럼 일단 그렇게 지내보자.”

다만, 혼자만의 공간에 앨리스가 개입한 상황이다.

당분간 씻을 때 콧노래 흥얼거리는 건 자제해야겠지. 부끄러우니까.

또한, 자기 전까지 공부할 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일단 하루 이틀 정도는 지내보고 고민하는 편이 좋으리라. 방해된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 아지트로 보내면 될 일이었다.

“근데 옷 없었어? 그거 내 옷이잖아.”

“히, 얼마 없을 좋은 기회라 생각해서 한번 입어 봤단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애기 옷을 입어보겠니? 아…, 내 살 냄새가 좀 배었겠구나. 그건 사과할게.”

“아니…, 그건 별로 상관없는데.”

학사 메이드에게 세탁 맡기면 되니까.

이윽고, 앨리스는 턱을 괴고 특유의 자상한 미소를 머금었다.

“애기야.”

“어.”

“우리 꼭 신혼부부 같지 않니?”

순간 스튜를 잘못 삼켜 연신 헛기침했다.

생각을 읽힌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

“너, 어쩔 생각으로 정체 드러냈냐?”

쉬는 시간, 오르핀관 앞.

음료수를 사러 가는 길에 리제타 라이온하트를 만났다.

마법학부 2학년 A 클래스 4등. 주황빛 포니테일 머리.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도록 교복 셔츠 단추를 푼 건 여전한 친구였다.

뜻밖에도 리제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름 내게 정이 쌓인 걸까. 기분이 좋아져서 녀석에게 음료수를 사줬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벤치 양 끝에 앉은 건 리제타를 배려한 처사였다.

리제타는 가부좌 자세였다. 그녀의 손엔 내가 사준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나는 음료수를 들이킨 뒤 리제타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유는 많지. 원래 이쯤 정체 까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어.”

“뭐…, 빙제의 뜻을 나 같은 년이 이해하려 들면 안 되겠지. 하, 내 동기가 원왕…. 어디 가서 이런 소리 하면 미친년 소리 들을 텐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크흐, 시팔….”

“음료수 안 마실 거면 나 줘라. 맛있다.”

“줬다 뺏네, 새끼.”

리제타는 인상을 찡그리고 투덜대며 내게 음료수를 돌려주었다. 나는 그것도 마셨다.

“…학생회장은 어쩔 거냐?”

“아카데미에 계속 다니게 할 거야.”

“뭐?”

리제타는 코웃음 쳤다.

“야, 제정신이냐? 걔가 내통자였다며. 이번 테러 사건의 주범. 아카데미 털려고 아주 작정했었잖아?”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고, 속죄하게 할 방법도 정해 놨어. 대충 모두를 위한 일로.”

리제타에게서 뺏은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조만간 아카데미에서 공지할 거야. 황실도 도와주겠다고 했어.”

“허, 황실까지 지 맘대로 하네.”

“그냥 도움 받는 거지…. 뭘 맘대로 하냐. 그런 거 아니다.”

“불만 있는 놈들은 어쩔 거냐?”

“나한테 따지라 해야지. 나보다 약하면 입 다물어야 하지 않겠냐.”

“푸흐! 새끼, 그런 점 하나는 마음에 드네.”

나와 리제타는 서로를 보며 낄낄 웃었다. 그러다 리제타는 대뜸 표정을 굳혔다.

“웃지 마라. 재수 없다.”

“응, 너도.”

리제타는 다시 피식 웃었다.

오늘따라 리제타가 나를 살갑게 대하는 건, 주변 사람들이 내게 느낄 괴리감을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카데미 사람들은 나를 평범한 아이작으로 대할 수 없게 됐으니까.

고마울 따름이었다.

* * *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졌다.

아이작은 아카데미 시설 중 언덕 위에 있는 교회에 이르러 문을 열었다.

바로 보이는 건 예배당의 풍경. 교회엔 방음을 위한 결계가 전개되어 있었다.

아이작은 안경을 한번 들친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분홍빛 머리칼의 여학생이 헬리제 교단의 상징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성녀, 비앙카 앙투라제였다.

그늘 진 기둥 쪽에선 호위 신자 사일론이 두 손을 모으고 상체를 숙여 아이작에게 인사를 건넸고.

비앙카는 아이작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마찬가지로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맹인이라 두 눈을 감은 채였다. 그러나 신성력의 도움으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에 구애 받지 않고 앞을 내다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빙제님. 이렇게 대면하는 건 처음이군요.”

같은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소속. 두 사람은 교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비앙카는 성녀 대 원왕으로서 아이작을 대하겠다는 의사를 표하고 있었다. ‘아이작 선배’가 아닌 ‘빙제님’이라는 호칭이 이를 방증했다.

비앙카는 황국과 성국에서 주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므로, 아이작 또한 상체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저도 반갑습니다, 성녀님.”

“귀하신 분께 발걸음을 옮기게 해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라서요.”

“그건 괜찮아요. 근데 용건이란 게 뭡니까?”

아이작은 여전히 비앙카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심리를 읽고 비앙카가 반드시 전하려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챘을 뿐.

“전해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일론.”

호위 신자 사일론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아이작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몹시 낡은 책이었다. 책갑엔 아무런 표시도 없었고, 책의 두께는 얇은 편이었다.

“이 책을 아시는지요?”

“아뇨…. 이게 뭡니까?”

“사일론, 책을 펴주겠나?”

비앙카는 사일론에게 지시했다.

사일론은 책을 펼쳤다.

“……!”

그 순간, 아이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마치 방망이로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그는 느꼈다. 평소의 연기력을 발휘하는 것조차 애를 먹어야 했을 만큼.

이 세계에 빙의된 이후, 처음으로 자기 눈을 의심하게 된 순간이었으니.

“이건…?”

아이작은 사일론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뒤, 심장의 거친 달음박질처럼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비앙카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찢으며 웃었다. 아이작의 반응으로 그 책의 가치가 증명됐기 때문이었다.

책에 담긴 건 비가 쏟아지는 얼음 호수를 표현한 듯한 정체 모를 그림.

그리고… 한글이었다.

‘뭐야? 진짜, 뭐야…?’

마치 온 세상에 자기와 이 책만이 남겨진 것 같았다.

아이작은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여느 페이지보다도 글씨가 가장 난잡하게 휘갈겨져 있었으니. 아무래도 이 책을 쓴 사람은 첫 페이지를 맨 마지막에 쓴 듯했다.

첫 페이지에는 편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고.

아이작은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소중한 찬인에게. ]

아이작에게.

[ 당신이 이 책을 찾아 냈길 바랍니다. ] [ 사정이 있어 당신을 마음껏 도와드리지 못하는 점은 양해를 구합니다. ][ 제가 알게 된 모든 진실을 당신만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이 책에 담았습니다. ]

아이작은 파악했다.

글쓴이는 어떠한 진실을 알아냈고, 이를 아이작에게 전하려는 거라고.

즉, 글쓴이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제작한 게임사 ‘힉스’에 소속된 인물이 아닌 듯했다.

[ 제가 얼마 못 가 이성조차 잃어버리기 전에 당신이 모든 진실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

이성‘조차’.

글쓴이가 많은 걸 잃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성’을 운운하는 걸 보면 잃은 건 주로 머릿속에 담긴 개념일 터.

가령 ‘기억’ 같은 것이 그 범주에 들어가리라.

[ 이 책을 읽은 뒤엔 즉시 헤겔 마탑의 마탑주를 찾아가십시오. ][ 그녀는 분명 당신 편이 되어 줄 겁니다. ]

아리아 릴리아스가?

확실히 아리아는 아이작 편을 들어줬지만.

이런 편지에서 특정될 만큼의 도움을 준 사람인지 누군가 묻는다면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었다.

즉, 아리아에게는 아이작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에 적힌 글쓴이의 이름을 본 뒤로.

아이작의 사고는 한동안 멎어야만 했다.

[ 도로시 게일 올림. ]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