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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232화 (232/334)

〈 232화 〉 변화 (6)

* * *

교회를 나섰다. 중천에 달이 휘영청 걸려 있었다.

달빛에 비친 낡은 책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카를리관, 비밀 서재….’

성녀 비앙카 앙투라제에게 책을 어디서 구했는지 묻고 받아 낸 대답이었다.

도움될 만한 것이 없으리라 생각한 그곳에 낡은 책이 놓여 있었다고 했다. 비앙카가 찾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그 책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었다.

신성력으로 확인해본 결과 그 책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시공간마저 그 책 앞에선 무의미하다고 비앙카는 설명했다. 한글로 적혀 있다는 점에서 그 책이 범상치 않은 것임은 당연했다.

이어 비앙카는 책을 건네준 대가를 요구했다.

─ ‘빙제님, 마족을 토벌하는 일에 저를 동료로 삼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날 동료로 받아 달라.

비앙카는 성녀로서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며 자기 뜻을 숭고하게 치장했지만.

나는 그 속내에서 마족을 때려 죽이고 싶다는 음습한 가학심과 잔인하게 목숨을 앗아갈 때 느끼는 쾌감을 읽어냈다.

비앙카는 내가 동료로 삼는 데 조금도 상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성격적 결함이 크고 전투 능력도 좋지 않으니까.

물론 없는 것보단 나았기에 다음에 긍정적으로 얘기하자고 했다.

─ ‘빙제님,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시네요…. 네, 다음에 얘기하죠.’

비앙카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내주었다.

나비 정원 구석으로 향하는 중, 새끼 용처럼 작게 소환된 빙설룡-힐드가 날아왔다.

아직 상태창엔 마력 고갈 상태라고 표시되고 있지만, 이 정도로 빙설룡을 다루는 데 무리는 없었다.

[주인, 물어보고 왔다.]

“아리아 선생님 어디 있대?”

[황실 마탑에 학술 포럼 같은 게 있다고 출장을 갔다더구나.]

“출장?”

타이밍 더럽게 안 좋네.

아니…, 원래 아리아는 출장을 자주 가는 편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인가.

“언제 돌아온대?”

[그건 잘 모르겠다고 하더구나.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고 해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라고 하였다.]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천리안]으로 헤겔 마탑에 아리아 릴리아스가 없다는 건 알아챘다. 그래서 빙설룡을 보내 마탑 마법사에게 아리아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라 시켰던 것이었다.

내가 빙제라는 사실이 공론화되었기에 사람들은 빙설룡을 ‘빙제의 사역마구나’하고 이해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아리아와 연이 있다는 것도 마탑 마법사는 모두 아는 사실.

어쨌든… 황실 마탑까지 [천리안]을 발동하기엔 지금 상태로는 부담이 컸다. 거리가 너무 멀어 소모 마력량이 크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황실 마탑은 일종의 도시나 다름없는 수준이라 아리아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데 애를 먹을 터.

또한, 황실 마탑의 고성능 방어 체계면 [천리안]도 감지될 위험이 컸다.

황실 마탑은 특히 폐쇄적인 집단인 데다 정보 보안에 엄격한 곳이니, 황제조차도 마탑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고만 받을 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철칙이 있다.

훔쳐보거나 황실에 아리아와의 연락을 요청했다가 괜히 쓸데없는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은 들여주지도 않을 테니 하수인을 보내 봤자 소용없겠지.

황실엔 서신을 전할 수 없다.

그러면 일단….

“힐드, 도로시 좀 불러와 줘.”

[맡겨라, 주인.]

빙설룡-힐드를 작은 마력 덩어리의 형태로 바꾸었다. 녀석은 생활동으로 날아갔다.

……

“이거 뭐야? 무서워…!”

징계위원회가 도로시에게 내린 징계 수위는 무척 낮았다. 근신 일주일에 불과했으니까.

징계는 내일부터 시작이었기에 도로시를 부를 수 있었다.

여전히 어두운 밤. 나비 정원 구석에서 도로시와 만났다.

도로시는 나와 앨리스가 한동안 동거하는 게 우려됐는지 “아이작, 앨리스 있잖아.”라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나, 나는 곧바로 낡은 책을 내밀어 급한 용건을 꺼냈다. 이 책 아느냐고.

도로시는 이 책이 뭔지 전혀 짐작 가는 게 없다고 답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그 낡은 책을 살폈다. 휴대용 램프를 꺼내 책을 비추었기에 내용을 살피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이미 예상했지만, 도로시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내가 첫 페이지 마지막 줄에 ‘도로시 게일 올림’이라고 적혀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식겁하기까지 했다.

“진짜 전혀 감 안 와요?”

“응…. 장담하는데 오늘 이거 태어나서 처음 봤어. 진짜로 내가 쓴 책 아니야. 애초에 난 네가 전에 살던 세계의 언어를 모르잖아.”

도로시는 책을 훑어보며 확답했다.

“그리고 내가 썼으면 ‘도로시 하트노바 올림’이라고 적었겠지. 지금 내 이름은 그거니까.”

“기억을 잃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 이름으로 쓴 걸 수도 있죠.”

“누난 기억 잃은 적 없는데? 술을 진탕 마신 날에도 기억은 안 잃어 봤다구?”

“그래요…?”

생각이 많아졌다. 여러 가설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가설도 명확히 확정 지을 수 없었다.

“음….”

문득 도로시 폭주 사건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의 요정이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선배, 별의 요정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요?”

“아무렇게도 안 생겼어.”

“예?”

뭔 소리지?

도로시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야. 그 애는 외형이란 게 없어.”

“옛날에 스텔라 손에 끌려갔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것도 그냥 내 표현일 뿐이야. 걔는 ‘어떻게 생겼다’라는 개념이 성립 안 돼. 별빛 좀 달고 다니면서 그냥 존재하고 있어. …미안, 내 머리론 그렇게밖에 표현 못 하겠다.”

“…….”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질색이다. 별의 요정 스텔라는 대충 별빛 좀 나는 투명 인간처럼 상상하기로 했다.

그 후로 책에 관해 도로시와 여러 추측을 주고받았다. 합당한 추측도 꽤 있었지만 명쾌한 해답이 되지 못했다. 아무런 물증이 없으니까.

“후우.”

한숨을 푹 내쉬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낡은 책에 담긴 내용을 정확히 알아내는 일은… 지금은 보류해둬야 할 듯했다.

“무슨 생각해?”

도로시도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결국 해야 할 일은 같구나, 하는 생각요.”

뭐가 어찌 되었든 이 여정의 끝에선 반드시 악신을 해치워야만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단순해서 좋네요.”

“니히히, 그래?”

도로시는 나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별빛이 형형했다.

[ 1 ]

안녕하세요, 찬인이여.

애석하게도 저는 당신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저와의 기억을 잊어 주길 바랍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해주었다는 사실이 선명히 기억나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제게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해졌습니다.

저는… 당신이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밑바닥, 얼음 호수에 있습니다.

[ 2 ]

이 위의 세상에서 살아가던 예전의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살던 곳의 언어를 익혔습니다.

당신이 즐겨 들었던 노래를 자주 떠올리고 흥얼거리곤 해요. 정말 좋더라고요.

[ 3 ]

이곳엔 쉴 틈 없이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추락할 때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그것이 구름을 이루고 한없이 쏟아지고 있는 거라고 하네요.

그는 고결해지고 싶어 합니다.

훗날, 이 밑바닥에서 벗어나 정화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악신에게 봉쇄 당했기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네요.

[ 4 ]

당신을 그 세계로 보낸 이들은 이 위의 세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왜 당신이 찬인으로 간택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당신에겐 아주 무거운 책임이 떠맡겨져 있다는 걸요.

당신에겐 모든 이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저도.

당신을 그 세계로 보낸 이들의 운명조차도요.

[ 5 ]

그들이 당신을 직접 도와주지 못 하는 건 악신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이 있는 세계에 개입하면 악신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고, 악신의 승리가 확정된다고 하네요.

할 수 있는 건 관측뿐이라고 합니다.

제 사정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혹시 몰라 이 책만을 그 세계의 비밀 공간에 보냅니다.

부디 당신에게 이 책이 닿기를 바랍니다.

[ 6 ]

그 세계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좋을 게 없을 거예요.

[ 7 ]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직관적인 형태로 당신을 돕는 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존재를 절대로 악신에게 들켜선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녀를 맹신하진 마세요.

[ 8 ]

이 책에 담긴 내용을 당신의 동료에게 공유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오로지 당신만이 알아주세요.

카야 아스트레앙은…………….

* * *

제르베르 황국, 변두리에 위치한 로펜하임 남작령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시작은 한 남자였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 밤 거리를 걷던 중 한 여자를 보았는데, 그게 걸어 다니는 시체였다고 했다.

이후로도 걸어 다니는 시체를 목격한 사례가 2건 더 생겨났고.

어린아이들이 연달아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고작 변두리 남작령에서 벌어지는 일 따위가 세간에 알려지거나 황실에 전달될 일은 없었다. 황국 전체에 위협이 될 만한 큰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말이다.

깊은 밤. 로펜하임 남작가, 대저택.

로펜하임 남작가의 가주, 아드리안 로펜하임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물자를 실은 마차 두 대가 정원을 지나 지하 통로로 향하고 있었다.

아드리안 로펜하임은 씨익 웃으며 레드 와인을 한 모금 홀짝였다.

지하 통로로 들어선 마차엔 부모가 없는 소년, 소녀가 묶인 채로 실려 있었다.

마족, 사령의 칼가르트에게 바치고자 모으는 제물이었다.

칼가르트는 최근에 새로 탄생한 얼음의 원왕, 빙제를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그 원왕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황국 영토에서 출현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아드리안은 빙제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주 은밀히 어린아이들을 모아야만 했다. 애당초 그 역할을 맡기기 위해 칼가르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으니.

칼가르트의 특수한 마법진 공정도 앞으로 한두 달 안에 끝나리라.

아드리안은 계속 어린아이들을 모으다가, 마무리로 괜찮은 질의 마력을 지닌 인간을 더 얹어 전부 제물로 바치면 되었다.

아스라이 빛나는 달빛이 와인잔 속 레드 와인에 작게 자리매김했다. 떠오르는 얼굴은 청은발을 가진 제 딸이었다.

“그 애면 되겠지.”

이브 로펜하임.

이미 한번 버린 적 있는 혈육이다.

괜찮은 마법적 재능을 갖추었기에 로펜하임 남작가의 이익을 위해 들여왔을 뿐. 딱히 그 애에게서 깊은 정이나 연민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로펜하임 가문을 떠날 생각으로 가득했던 아이다. 내버려둘 리가. 아직 단물도 빨아 먹지 못했거늘.

그런 아이라면 마지막 제물로서 아주 적당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브에겐 이부동생이 있었다.

세상엔 하등 쓸모가 없는 인간이 많다. 이브의 허약했던 이부동생, 아이작처럼. 이곳 영지에 서식했던 별 볼 일 없는 아이 중 하나였다.

그나마 외모는 봐줄 만했던 친모가 목숨을 잃자 돌연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그 후로 행방불명이었다.

갑자기 아이작이 떠오른 연유는 녀석도 제물로 바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브라면 아이작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쓰레기라면 불을 피우는 데 쓰이는 장작 역할이라도 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아드리안은 그리 생각하며 와인을 마셨다.

자, 얼마 남지 않았다.

신은 자신을 택했고 축복을 내렸다. 아드리안 로펜하임은 ‘그날’을 고대했다.

모든 건 로펜하임 가문의 부흥과 자신이 쟁취할 새로운 권력을 위해서였다.

* * *

며칠 뒤,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든 저녁. 나비 정원 구석.

한 손으로 지면을 짚고 물구나무 서서 팔굽혀펴기를 하던 중, 어떤 생각 하나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

계약의 메피스토는 내 존재를 알아채고 미리 대비했다.

그렇다면 다른 놈들은?

‘주의해서 나쁠 건 없겠지.’

사멸의 타나토스가 깨어나면 전세계가 알아챈다. 즉, 녀석은 아직이다.

하지만 사령의 칼가르트는 아니었다. 그놈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도 여기서 알아챌 수 없었다.

[천리안]으로는 칼가르트가 출현하는 교회까지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체셔.”

[니옹.]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에 연기가 일렁이고, 그 안에서 보라색 고양이 마수 괴묘-체셔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지면에 발을 붙이고 쪼그려 앉은 채로 괴묘를 바라보았다.

“귀신 같이 나타나네.”

[왜 불렀니? 일 때문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부탁 좀 하자.”

괴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니오옹! 얼마든지! 아무도 안 놀아줘서 심심해 죽을 참이었거든. 난 뭘 하면 되니?]

“어디 좀 들렀다 와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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