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사령왕 토벌전 (1)
* * *
드넓게 펼쳐진 어느 지하 공간.
벽면에 나열된 촛대엔 저마다 이질적인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언제부턴가 거대한 공간으로 탈바꿈된 그곳은 지하의 왕실이 되어 기이한 풍경을 자아해내고 있었다.
해골 장식으로 치장된 옥좌엔 깔끔한 로브를 차려입은 거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령의 칼가르트. 시체 병단을 이끄는 그 마족은 한때 사령왕으로 불렸던 자다.
해골의 몸으로 부활했던 칼가르트는 차츰 힘을 되찾으며 살이 붙었고, 구릿빛 피부를 지닌 건장한 남성의 육신을 갖추게 되었다.
머리 양 끝에 구부정하게 튀어나온 기다란 뿔과 온통 새까맣기만 한 안구는 칼가르트가 인간이 아님을 증명했다.
주위로는 어둠 마력을 휘감은 시체 병단이 정렬한 채였다. 그들은 지하 왕실에 돌연 백발의 남자가 들어서자 일제히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코를 찌르는 시큰한 썩은 내가 진동했으나, 백발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옥좌 앞에서 멈춰 섰다.
칼가르트는 제 앞에 선 사내를 무감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곳은 천인이 발을 디딜 곳이 아니다.]
백발의 사내는 지나치게 새하얘 오히려 섬뜩하게 보이는 창백한 피부를 지닌 성인 남성이었다.
두 뺨에도 눈이 달렸으며, 기괴한 인상인 건 여느 마족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소를 내뱉더니 신비로운 은빛 눈동자로 칼가르트의 새까만 눈을 응시했다.
[고귀한 내가 설 곳을 마족 따위가 감히 판별하려 드느냐.]
칼가르트는 백발의 남자를 향해 길쭉한 손가락을 내밀었다.
[죽여라.]
지시가 내려지자 시체 병단이 백발의 사내를 향해 검은 마법진을 전개했고.
허공에 도열된 마법진의 행렬이 어둠 마법을 쏟아부었다.
콰가가가강!!
음습한 어둠이 화염처럼, 폭풍처럼, 소나기처럼, 백발의 사내 몸을 군데군데 잡아먹으며, 베어내며, 형체조차 남기지 않을 기세로 맹렬히 몰아쳤다.
그러나 백발의 사내는 웃는 얼굴로 가만히 서서 모든 공격을 받아줄 뿐이었다.
몸집이 큰 시체 전사들도 달려들어 백발의 사내에게 사람 몸집만 한 주먹이나 무기를 휘둘렀다.
마침내 시체 병단의 피할 곳 없는 공세가 끝나자, 어둠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무스름한 먼지가 피어났고.
백발의 사내였던 것은 신체 대부분이 사라진 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사아아아아!
그때.
돌연 성스러운 빛의 힘, 신성력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백발의 남자에게 다가갔던 시체 전사들은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신성력은 어둠의 먼지를 몰아내곤 백발의 사내를 단숨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렸다.
꽈악.
[그워어억!]
백발의 사내는 기다란 팔을 옆으로 확 뻗어 자신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시체 전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 손에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시체 전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꺽꺽, 대고 괴로워했다.
[야만적인 환영 인사이지 않나.]
백발의 사내는 여유롭게 웃었다.
칼가르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성적인 사고로, 저 백발의 사내를 죽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화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상대가 죽지 않는 불사신이었기에 그러했다.
필시 불사의 가호를 내려받은 최고위 천족임이 틀림없었다.
[…네놈은 뭐냐?]
칼가르트가 묻자 백발의 천족은 시체 전사를 옆으로 내동댕이치곤 의자에 앉는 시늉을 했다.
허공에 신성력이 뭉치며 성스러운 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천상 세계의 의자로 탈바꿈되었다. 백발의 천족은 그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지하 왕실에서 오직 그만이 초연하게 빛났다.
[나는 뷔엘이다.]
백발의 천족, 뷔엘은 팔을 앞으로 뻗고 검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뷔엘은 이 세계에서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메피스토를 불러와라, 칼가르트. 할 이야기가 있다.]
……
로펜하임 남작령은 대륙을 기준으로 메르헨 아카데미와는 정반대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은 황국 변두리에 있는 공기 좋은 목초지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을씨년스럽고 까무잡잡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아드리안 로펜하임 남작이 주선하는 인신매매는 로펜하임 남작령이 통솔하는 여러 구역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아직 운송되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꽤 있었다.
로펜하임 남작의 관할 아래,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여러 지부에 아이작은 하수인들을 보내 놓았다. 목적지는 전부 술집으로 위장한 채 운영되고 있는 비밀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이미 붙잡힌 아이들의 위치는 [천리안]으로 파악해 두었다. 모두 구하면 될 것이었다.
그중 한 곳.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로펜하임 남작가까지 가는 경로로 일직선에 놓인 작은 마을.
아이작은 정보를 캐내고 아이들을 구할 겸 술집에 들어섰고.
그와 동행한 연금발 여성, 앨리스 캐럴은 술집 외벽에 기대고 서서 가만히 대기했다.
깔끔한 외관. 술집엔 2층까지 오늘밤을 즐기기 위한 사내들로 북적였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술집 치곤 손님 수가 많았다.
맛있는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자욱했다. 고막을 때리는 호쾌한 웃음소리와 걸걸한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쉴 틈 없이 술집을 메웠다.
“어서 오세….”
젊은 여직원은 아이작을 보고 헛숨을 집어삼켰다. 이 마을에서 보기 드문 미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슬쩍 웃으면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아이작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손님. 혼자신가요?”
“네, 저기 앉아도 될까요?”
아이작은 미소 짓고 중년 남성인 술집 주인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여직원은 싱긋 웃으면서 아이작이 가리킨 대로 술집 주인 앞을 둘러싼 테이블 앞으로 안내했다. 아이작은 그 자리에 앉았다.
술을 따르던 술집 주인이 말을 걸었다.
“본 적 없는 젊은이구먼. 아직 10대로 보이는데, 여행객인가?”
“네, 뭐.”
술집 주인이 보기에 안경잡이 소년, 아이작은 인상이 무척 순했다.
다만, 그가 입은 깔끔한 옷은 그다지 값비싸 보이지 않았다. 소매 밖으로 튀어나온 손엔 온갖 고생한 흔적도 엿보였다. 귀하게 자란 몸은 아닐 터.
술집에 북적이던 우락부락한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주문은?”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아이작은 웃는 얼굴로 태평하게 물었다.
“당신네 사람들, 여기 있는 놈들이 전부입니까?”
“…….”
술집 주인은 눈을 좁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먼.”
“대답은 그거면 됐어요.”
아이작은 [심리 간파]로 원하는 답을 얻었다.
“그리고 혹시, 로펜하임 남작에게 어린아이가 몇 명이나 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당신들이라면 분명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이작은 [천리안]으로 로펜하임 남작가의 대저택 지하실에 펼쳐진 결계를 뚫고 안쪽을 살필 수 없었다. 칼가르트의 힘이 개입된 것이 분명했다.
몇 명의 아이들이 그곳 지하실에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칼가르트의 권능이 발휘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었다.
빙설룡-힐드를 타고 곧장 로펜하임 남작가로 날아가 지하실을 급습하지 않은 건 신중한 처사였다. 그건 지나치게 눈에 띄는 행위니까.
아직 행방이 묘연한 칼가르트가 빙제의 접근을 미리 알아챈다면, 사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도주하거나 대비할 위험이 있었다.
술집 주인은 동작을 멈추고 한동안 아이작과 서로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 술집 주인은 아이작을 멀쩡히 내보낼 수 없게 되었다.
여직원은 놀란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심정도 술집 주인과 다를 게 없었다.
어느 테이블에서 근육질 거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찬 도끼를 빼내고는, 아이작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작은 칙칙한 적안으로 그 거한과 눈을 마주쳤다. 거한은 일부러 도끼를 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눈썹을 치켰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젊은 놈이네.”
거한은 껄껄 웃었다.
“이쪽 업계가 뭔지는 이미 아는 것 같고, 이미 배송된 애들 숫자나 묻는 걸 보니 이쪽 종사자는 아닌 것 같군.”
귀신 같이 잦아든 웃음소리, 대화 소리.
술집을 메운 이들의 명백한 적대심이 오로지 아이작을 향했다.
“꼬맹아, 너 누가 보냈…?”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잖아.”
아이작은 거한의 말을 끊고 태평한 어조로 답했다.
옆자리 거한은 “허, 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거구의 남자들도 조소를 내뱉었다.
“하하! 이야, 이거 눈치 없는 거 봐라. …나도 너처럼 어렸을 땐 겁 대가리가 없었지. 그때는 용기와 만용의 차이를 몰랐어. 꼬맹아, 어린 놈이면 어린 놈 답게 주제를 알아야 하지 않겠냐? 어디, 아저씨가 인생이 실전이라는 걸 깨우치게 해줘?”
장난스럽게 묻는 거한.
술집을 메운 남자들은 폭소하며 “자네도 어린 시절이 있었나?”, “저 어린 놈, 툭 쳐도 부러질 것 같이 생겼구먼!” 따위의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이작이 술집을 메운 남자들의 비웃음을 한 몸에 받는 동안, 여직원은 울퉁불퉁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중년 남성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저 남자를 제압하고 볼일을 마친 뒤엔 묶어서 골방에 가둬 달라고.
여직원의 성욕 가득한 엉큼한 속내를 파악한 남자는 씨익 웃으며 “좋지.”하고 대답했다.
이윽고, 아이작 옆자리의 거한은 표정을 싹 굳혔다.
“더 말하지 않는다. 편하게 죽고 싶다면 당장 불어라, 꼬맹아. 누가 너 보냈냐고.”
“사람 묻는 말에 대답할 줄 모르나?”
“흐, 이 어린 놈의 새끼가. 좋다, 팔 하나 날아가도 같은 소리 하나 보자!”
휘웅!
거한은 아이작을 향해 도끼를 거세게 휘둘렀다.
그 순간, 아이작은 가볍게 몸을 뒤로 빼 도끼를 피하더니 품 안에 있던 단검을 빗살처럼 내질렀다.
찰나간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아이작은 단검으로 거한의 손을 내려 찍어 테이블에 꽂아 버렸다.
이어진 건 거한의 귀를 찢는 단말마였다.
“끄아아악!!”
거한은 도끼 쥔 손을 움직이지 못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거구의 남자들은 웃음을 뚝 그쳤다.
거한의 손목은 단검이 꽂혀 테이블에 고정되어 버렸다. 관통된 부분에서 붉은 피가 울컥거렸다.
“아아아악!!”
아이작이 단검을 비틀자 거한은 더욱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거한은 남은 손으로 주먹을 휘둘렀으나, 아이작은 그 두꺼운 손목을 가볍게 낚아채고 꽉 거머쥐었다.
우드득, 거리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붙잡힌 거한의 손목은 짙은 멍으로 물들고 모래시계처럼 변형되며, 끝내 종잇장처럼 찌그러져 흐물거렸다.
맹수도 범접할 수 없는 무자비한 악력이었다.
“그만, 제발 그만…!!”
거한은 애원하며 테이블에 허물어졌다.
“다시 한번 물을게.”
아이작은 냉소적으로 물었다.
“아이들, 지금 몇 명 가 있어?”
여러 방향에서 의자 밀리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났다.
거구의 사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아이작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