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사령왕 토벌전 (6)
* * *
[위우우우우우!!]
흉린-몰리카르테가 울부짖었다.
검은 기린의 형상을 띤 그 생물은 한때 검성 제랄드 아스트레앙의 검에 베여 목숨을 잃었던 흉포한 마수였다.
지금은 부활해 마족이 되어 있었다. 칼가르트의 힘에 의해 살이 붙은 외형은 살아 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흉악했다.
뒤펜도르프의 3군단이 마족들과 격돌했다.
서리의 마법사들은 마족 군대와 마법을 맞부딪혔고, 얼음 기사들은 냉기 마력이 스민 무구로 적들을 기민하게 베어나갔다.
팔라딘 4명은 여러 원소 마법을 부리며 적들을 유려하게 처리해 나갔다.
전투를 벌이던 카르네다스 가문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뒤펜도르프 병사들의 전투 능력에 감탄했다.
“저건 뭐야?!”
소리치는 기사 한 명.
돌연 하늘에 맞닿을 법한 흉린의 기다란 목에 틈틈이 틈새가 생겨났다. 그 모든 틈새가 주위를 강력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휘우우우우우!!!!
목에 스민 어둠 마력은 흡입력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태풍이라도 들이닥친 것처럼 주위의 나무들이 뽑혀 나가며 흉린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어둠 장막이 씌워진 마족 군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무기를 땅에 꽂거나 마법에 의지해 버텨야만 했다.
그때, 한 여성이 망설임 없이 흉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뒤펜도르프의 제3군단장, 아자벨 실버울프였다.
“흐읍!”
그녀는 양손에 쥔 커다란 은빛 도끼, 파라혼에 냉기 마력을 실었고.
흉린의 흡입력을 역이용해 속도를 드높여, 괴물 같은 근력으로 파라혼을 거칠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
파라혼의 도끼 날이 흉린의 목에 파괴적으로 꽂혔다.
냉기 마력이 폭주하며 흉린의 목을 차라락, 얼려간다.
흉린의 목은 웬만한 철강보다도 단단해 단번에 베어내지 못했으나, 그 목에 깊숙한 생채기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위우우우우우!!!]
비명을 지르는 흉린.
흉린이 거칠게 목을 휘저으며 저항하자 아자벨은 녀석의 목을 박차고 뒤로 빠졌다.
그러나 부유감을 느끼기도 잠시. 새하얀 사역마가 날아와 그녀를 등에 태웠다.
독수리의 머리. 냉기가 휘감긴 날개. 네 개의 다리. 커다란 몸체. 하얀 그리핀 사역마였다.
흉린의 거대한 목 절반이 꽁꽁 얼어버려, 많은 틈새가 굳센 얼음으로 가로막혔다.
뒤펜도르프의 병력과 카르네다스 가문의 병력이 다시 중심을 잡고 마족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간만에 재미있네!”
아자벨은 큭큭 웃으며 그리핀 사역마를 타고 다시 흉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흉린은 더욱 강렬한 어둠 마력을 뿜어내며 기다란 목을 휘둘렀다.
묵직한 파공성이 울려퍼졌다.
저 휘두르는 목은 경도가 드높은 둔기와도 같다. 한 번이라도 타격을 허용하면 그 어떤 튼튼한 몸이라도 금세 으스러지고 말 터.
목에 난 여러 틈새가 주변 공기를 강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이기까지 하므로, 자칫 실수하면 중심을 못 잡고 빨려 들어가 흉린의 먹이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자벨은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서리군주를 위하여!!”
아자벨은 그리핀 사역마를 박차고 다시 흉린의 흡입력으로 도움을 받으며 속도를 높였다.
흉린을 이기는 법은 간단했다. 저놈의 빨아들이는 힘을 이용해 가속도를 받으며, 철강조차도 넘어서는 힘을 쏟아부으면 된다.
아자벨은 전신의 근육을 실어 다시 한번 은빛 양손 도끼, 파라혼을 휘둘렀다.
“승리를!!”
콰아아아아앙!!!
파라혼의 도끼 날과 흉린의 목이 맞부딪치며 차가운 풍압이 터져 나갔다.
흉린의 단단한 목이 깊게 파이고, 남은 멀쩡한 부위마저 꽁꽁 얼어갔다.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위태롭게 뒤뚱거리는 흉린.
카르네다스 가문의 병력은 놀라워했다.
저 검은 기린과 싸우는 아자벨은 이미 인간을 넘어선 괴수나 다름없다. 저런 여자가 어떻게 이제까지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는가.
얼음 왕국, 뒤펜도르프는 혹한의 땅에 처박혀 있다. 지리적 문제 탓에 통상수교에 소극적인 면모를 보여 조용한 국가라고도 불리는 곳.
하지만 그 나라는 마치 폭탄과도 같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왔다. 비록 군사들의 수는 많지 않으나, 무시무시한 전력이 집약되어 있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카르네다스 가문의 병력은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실감했다.
저들은 괴물이었다.
한편, 메르헨 아카데미.
메르헨 아카데미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먹구름을 몰며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마족 무리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대적하기 위해 아카데미 전투 병력과 황실 기사단은 연륙교를 지나고 있었다.
전투 병력이 출동한 후, 아카데미가 있는 섬에 거대한 결계가 전개되었다.
섬을 통째로 에워싸는 단단한 결계를 구축하려면 상당한 재화와 수준 높은 마법사 무리가 필요했다. 황실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투자자 재유치에 성공한 메르헨 아카데미로선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저들은…?”
황실 기사단 4번대 펜리르 기사단 부단장, 마그리오는 연륙교 앞에 있는 두 여학생을 발견했다.
마녀 모자를 쓴 연보랏빛 머리칼의 여학생. 도로시 하트노바. 그녀는 연륙교 난간에 앉아 있었다.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몰포나비 머리 장식을 한 여학생. 루체 엘타니아. 그녀는 가만히 선 채로, 아카데미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눈에 담았다.
그녀들이 누군지 못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둘 다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손꼽히는 천재이자 강자였으니.
“거의 다 왔구만.”
도로시는 마녀 모자를 눌러쓴 채 난간에서 폴짝 뛰어내려 루체 옆에 나란히 섰다.
“스토커 친구야, 이 언니 방해하면 안 된다?”
“시끄러워.”
번개 마력을 예열하던 루체는 도로시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방학이 시작하고 얼마 뒤, 그녀들은 아이작에게 부탁받았다. 자신은 마족을 찾으러 가야 하므로, 만일의 경우 아카데미를 지켜 달라고.
루체는 다가오는 적 무리를 살폈다.
인간의 시체로 이루어진 검은 용. 악룡-오르키스가 날개 달린 마족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악룡 외의 마족 무리도 한때는 시체였던 모습이었다.
처음엔 그 광경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랐지만, 지금은 감정을 갈무리해 둔 채였다.
“정말 끈질긴 놈이네….”
분노를 느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루체.
악룡이 부활해 다가오는 모습은 아직 그레텔이었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헨젤 오빠의 잔혹한 죽음이, 과자집 마녀의 애달픈 최후가, 뇌신조의 사나운 폭주가, 모두 저 빌어먹을 악룡 때문이었으니.
다만…, 악룡의 몸을 이루는 수많은 인간 시체가 입으로 어둠 마력을 흘려내는 모습이 보였다.
마족.
이미 죽었던 악룡은 마족으로 부활했다.
루체는 눈을 내리깔았다. 로즈골드색 머리칼이 한 가닥씩 흘러내리며 그녀의 눈가를 가렸다.
차라리 잘 됐다.
저 저주스러운 용을 자기 손으로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기회이므로.
“…….”
도로시는 루체의 감정을 읽고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그럼 이 언니는 잡졸들을 먼지처럼 쓸어 버리겠다!”
도로시는 양손으로 허리를 잡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뭐?”
루체는 냉담한 표정으로 도로시를 쳐다보았다.
“저 괴상한 시체용은 기분 나쁘니까 네가 잡아줄래?”
“…….”
“싫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능청맞게 웃는 도로시.
루체는 도로시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말 안 해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니히히, 이 새침데기 녀석! 무사해라!”
도로시는 배시시 웃고는 형형색색의 별빛 마력을 휘감고 빠른 속도로 마족 군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윽고, 아직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휘황찬란한 별빛 폭발이 공중을 메웠다.
퍼어어어어엉!!!
별빛 폭발이 마족 군대를 휩쓸었다. 그 여파로 강풍이 불어와 루체의 머리칼을 뒤흔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아이작 다음으로 가장 강한 희대의 천재 다운 화력이었다.
악룡이 반격했으나, 도로시는 그 공격을 피해가며 다른 마족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
루체가 할 일은 이제 하나였다.
저 망할 악룡을 쓰러뜨리는 것.
루체는 왼팔을 위로 뻗어 번개 마력을 흘려 냈다. 손목에 새겨진 소환진이 자색으로 발광했다.
“갈리아.”
쿠우우우우!!
루체가 그 이름을 담담히 읊조리자 순식간에 하늘에 먹구름이 생겨나 소용돌이쳤다.
황실 기사단은 강한 마력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콰과광!!
매서운 굉음. 뇌운에서 자색 전광이 명멸했다.
뇌운을 뚫고 전격을 휘감은 검은 뇌조 한 마리가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뇌신조-갈리아. 그 사역마가 루체의 머리 위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며 포효했다.
[키아아아아!!!]
뇌신조-갈리아는 루체의 차갑게 정제된 분노를 느꼈다.
뇌신조가 느끼는 감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오오오오!!]
악룡-오르키스는 도로시를 견제하던 중, 뇌신조의 번갯불을 발견하고 살아 있을 적의 원한을 본능처럼 되살렸다.
악룡의 몸을 이룬 수많은 인간 시체가 입으로 어둠 마력을 흘려내며 복수심에 찬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곧, 악룡은 기다란 몸을 쭉 뻗으며 뇌신조를 향해 맹진했다.
루체의 머리 위로 7개의 번개 마법진이 전개되어 갔다. 마력이 끓어오른다. 왼팔을 앞으로 뻗자 약지에 낀 흑해 여제의 반지의 마석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효과는 시전자의 물 속성과 번개 속성 마법 강화. 루체는 마력 회로를 순환하는 마력의 농도가 증강했음을 느꼈다.
악룡이 어둠 마력으로 일군 구름과 뇌신조의 뇌운이 격돌해 하늘을 어둡게 물들였다.
두 구름에서 검은 번개와 자색 번개가 반발해 서로를 물어 뜯었다.
콰과과과과광!!!!
이곳은 연륙교를 잇는 절벽.
등 뒤는 연륙교와 바다.
뇌운이 비를 쏟아내듯 바다 곳곳에 자색 전격을 흩뿌렸다. 낙뢰가 내리칠 때마다 강한 마력이 강풍처럼 퍼져나가 지면과 바다를 휩쓸었다.
거칠게 너울지는 파도.
연륙교를 지나던 이들은 멈춰 서서 강풍을 견뎌야만 했다.
“이런, 크윽…!”
마그리오는 감탄했다.
이게 정녕, 고작 학생 수준의 마력이란 말인가.
황실의 고위 마법사 수 명을 불러와야 루체와 맞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천재란 자가 얼마나 불합리한 존재인지 새삼 느껴진다. 빙제라는 그늘에 가려졌을 뿐, 루체 엘타니아도 만만찮은 괴물이었다.
“오랜만이네.”
어느새 다가온 악룡.
코를 찌르는 악취.
루체가 담담한 인사와 함께 팔을 가볍게 휘두르자 수 개의 번개 마법진이 자색 전격을 사출했다.
파지지지직!!! 츠파파파팟!!!!
전격이 나무 뿌리처럼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허공을 갈랐다.
마치 사슬의 형상을 띤 그것이 악룡이라는 표적을 쫓았다.
5성급 번개 원소 마법 [사슬 번개].
루체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악룡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목소리로 소리치며 어둠 마법을 뻗어냈다.
검은 뇌광이 번쩍이고.
루체를 향해, 악룡의 몸에서 어둠의 번개가 수십 갈래의 사슬처럼 뻗어나갔다.
콰아아아앙!!!
검은 번개가 자색 번개와 격돌하고, 폭발했다.
루체는 싸늘한 조소를 내뱉었다.
“약해졌네.”
어둠 마력에 집어 삼켜진 악룡은 과거의 압도적인 강인함을 잃고 말았다.
한번 죽기 전, 뇌신조에게 저주를 내리며 진정한 힘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루체는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진정한 힘을 지닌 악룡과 맞붙지 못해서 화가 났고.
끝내 악룡이 어둠 마력으로 추하게 부활한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루체는 다시 악룡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자색 번개 마력이 주위에 일렁이며 그녀의 로즈골드색 머리칼을 아름답게 흔들었다.
[사슬 번개]는 예비 동작에 불과하다. 다음 공격이 진짜다.
허공을 메운 전격의 잔흔이 경로를 일구었다. 순간, 마법 전투를 지켜보던 모든 이의 시야가 섬광으로 들어찼다.
루체의 마법진은 엄청난 폭음을 터뜨리며, 거대한 전격을 쏘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앙!!!!!
피할 곳 없이 쏘아진 전격이 광선처럼 뻗어나가 악룡을 집어삼켰다. 귀를 때리는 굉음 속에서 악룡은 비명을 내질렀다.
7성급 번개 원소 마법 [만뢰].
빛줄기의 기세가 줄어든다. [만뢰]는 서서히 실선이 되어 사그라졌다.
그러나 악룡은 죽지 않았다. [만뢰]에 당한 탓에 길쭉한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고 연기만 피워 올릴 뿐.
새까맣게 타버려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 시체들이 살점 떨어지듯 악룡의 몸체에서 투둑투둑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체는 차고 넘쳤다.
돌연 악룡의 몸을 이루는 시체들 앞으로 각각 검보랏빛 마법진이 궤적을 그렸다. 온통 마법진으로 둘러싸인 악룡이 루체와 뇌신조를 향해 날아들었다.
루체가 다시 한번 [만뢰]를 쏘아내자 악룡이 전개한 대량의 마법진이 일제히 검은 전격을 수백 갈래로 뽑아냈다.
두 전격 마법이 맞부딪혔다.
콰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과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
강력한 충격파가 퍼져나가고, 주변 나무들이 통째로 뽑혀 날아갔다.
루체는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 위력적인 전격 폭발의 여파에 고스란히 휩쓸렸고, 그 가냘픈 육체는 바다 쪽으로 멀리 날아갔다.
뇌신조가 날아들었다. 루체는 기초적인 번개 원소 마법을 써서 자력을 발휘해 뇌신조에게로 끌려가 그의 등에 올라탔다.
“끄으…!”
루체는 가슴 아래를 붙잡고 헛기침을 반복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전격의 예리하고도 얄찍한 갈래가 몸을 일부 꿰뚫었다는 걸 루체는 그제야 눈치챘다.
다행히 튼튼한 [기초 보호 마법] 덕분에 의식이 멀어질 만큼 피해를 입진 않았다.
다만, 몸 안쪽이 터진 것 같은 감각과 피부를 타고 감도는 검은 전류 탓에 온몸이 연신 경련했다.
[루체, 괜찮나?!]
“괜찮아….”
고통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뇌신조를 타고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루체를 향해, 악룡이 다시 마법진을 휘감고 돌격해 왔다. 약해졌어도 끈질긴 건 여전한 용이었다.
과자집 마녀와 뇌신조가 악룡-오르키스를 상대로 고전했던 이유는 악룡이 더럽게 끈질겼기 때문이었다.
콰가가가강!!!
뇌신조는 바다를 가로질렀고, 악룡은 뇌신조를 뒤쫓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전격을 쏘아내고 막아 내며, 바다 위에서 격렬한 공방을 펼쳤다.
연륙교를 지나던 전투 병력 중 하늘을 날 수 있는 사역마를 가진 마법사들은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공격 마법으로 악룡을 요격했다.
악룡의 몸을 이룬 시체가 점점 바다로 떨어져 갔다. 유효타가 들긴 했으나, 악룡은 신경 쓸 수준도 아니라는 듯 오로지 뇌신조만을 노렸다.
본능적인 집착.
악룡의 눈에는 오로지 뇌신조만이 담겨 있었다.
악룡은 뇌신조에게 자신을 죽인 대가를 치르게 만들 셈이었다.
“기세 좀 높여봐. 재미가 없잖아?”
루체는 확성 마법을 쓰고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악룡을 도발했다.
멀리서도 썩은 내가 났다. 과자집 마녀가 죽었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다. 루체는 그날의 고통을 되새기며, 악룡을 향해 전격 마법을 들이부었다.
낙뢰가 셀 수 없이 내려치는 바다.
검은 번개와 자색 번개가 격돌할 때마다 묵직한 마력의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아카데미의 전투 병력과 황실 기사단을 밀어냈다.
드넓게 도열된 수많은 보랏빛 마법진을 운용하며, 루체는 오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피가 섞인 아쿠아마린빛 눈동자가 악룡을 담아내고, 진득한 살의를 머금었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미친 듯이 순환하는 마력이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꾸역꾸역 마력을 끌어올려 번개 원소 마법을 무리해서 쏟아 내길 반복할 수록, 루체의 머릿속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새로운 술식을 구축해 나갔다.
헨젤을 잃었던 기억, 과자집 마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눌어붙은 회한은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미래.
루체는 과거,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일상을 추억했다.
회한을 끔찍한 구속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다.
루체는 그저 회한을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을 추억하며, 기어이 미래를 맞이할 것이었다.
“고마워.”
루체는 왼팔을 위로 뻗었다.
“내 손으로, 널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줘서.”
번개 마법진과 물 마법진이 거대한 궤적을 그리며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천재라 불리는 자들은 감각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성취해내곤 한다.
이 순간, 루체의 의지는 새로운 고위 마법의 술식을 구축했다.
푸아아아아아!!!!!
낙뢰가 내려치는 하늘에 응답하듯, 바다에 수많은 용오름 현상이 일어났다.
뇌신조의 뇌운에 맞닿은 모든 물회오리에 수백 갈래의 자색 전격이 몰아치며 아름답게 융화되었다.
루체가 전개한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고.
형용할 수 없는 마력이 하늘과 바다를 유린했다.
“떨어져.”
루체는 위로 뻗은 팔을 아래로 떨구었고.
뇌운이 소용돌이치며, 전격을 휘감은 거대 회오리가 하강했다.
콰가가가가강!!!!! 파아아아아아아아!!!!!!
검푸른 섬광.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퍼지는 뇌성.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바다 회오리가 악룡을 집어삼키고, 수백 갈래의 굵직한 자색 전격이 바다를 갈랐다.
물, 번개 속성의 8성급 원소 마법 [레비아탄].
묵직하고 위력적인 수류가 악룡을 산산이 쳐부수고, 강력한 전격이 그 용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악룡은 순식간에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며,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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