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 비밀 연구 (3)
* * *
소리를 죽였다.
본능이 기억을 끄집어냈다. 자주 보았던 악몽 속 도로시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여인과 겹쳐 보였다.
부유섬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끝내 지켜내지 못했던.
내가 처음 만났던 도로시가 이 여자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움직였지만, 내가 발을 옮기면 풍경은 그만큼 멀어질 뿐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눈에 재생되는 환각이었으니.
[안녕하세요, 찬인이여.]
환청이었다.
“도로시….”
도로시 게일이 얼음 호수를 가로지르며 다가온다. 한 발짝씩, 서늘한 냉기조차 얼리지 못한 잔잔한 호수에 파문처럼 물결이 번져간다.
늘어뜨린 하얀 드레스는 피의 비가 쏟아져도 티 없이 맑았다. 별빛 마력이 도로시의 피부에 둘러져 비를 막는 까닭이었다.
지고했고, 성스러웠다.
평소에 도로시를 여신님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부르곤 했지만, 눈앞에 있는 도로시는 정말로 여신이란 개념에 가까워 보였다.
도로시는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나이가 들어 보였음에도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붉은 연지라도 발랐는지 입술의 색채는 또렷했으며, 두 눈엔 별이 창조되는 신비로운 별 구름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당신에게 닿길 바라며 이 메시지를 남깁니다.]
“……?”
[대화는 아니니까 말을 거셔도 저는 제 할 말만 하게 될 거예요. 악신이 살아있는 이상, 그 세계에 제가 전할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에요. 제대로 돕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렇겠지…. 예상했다.
도로시 게일이 쓴 책엔 그녀가 ‘이성을 잃기 직전’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즉, 눈앞에 있는 도로시는 과거의 그녀일 터.
도로시가 아리아를 찾아가라고 한 이유 중 하나는 이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진리에 도전하는 아리아의 오만한 연구를 명계에서 못 알아챘을 리 없겠지. 그 명계와의 틈새를 이용한 모양.
미지의 책 5페이지에서 보았던 내용을 떠올린다. 여느 신이건 이 세계에 개입하면 악신의 ‘승리’가 확정 난다고 했었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탓에 이런 메시지라도 남긴 듯했다.
가만히 도로시와 얼굴을 마주보았다.
[전 당신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절 구하려 했다는 건 알아요. 당신이 절 여자로 봐주셨다는 것도, 절 사랑해주셨다는 것도. 그래서 조금 꾸며봤어요. 어때요…?]
도로시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쑥스러워했다.
어떻긴.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큼, 그건 차치하고….]
도로시는 헛기침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여긴 얼음 호수. 모든 곳의 끝. 모든 곳의 가장 밑바닥. 당신이 있는 곳과는 아득히 먼 어딘가예요.]
빙괴가 가득한 얼음 호수의 정경. 하늘엔 가늠하기 어려운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위론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얼음 호수는 자체적으로 빛나는 마력을 뿜고 있었기에 한낮처럼 환한 것이었다.
피의 비는, 푸른 하늘처럼 맑고 청아한 얼음 호수를 더럽히지 못했고 떨어지는 족족 호수 아래로 침잠했다.
섬뜩한 하늘과 아름다운 호수의 대조적인 조합은 신비감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그건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도로시는 다시 날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슬픈 얘기지만, 이대로 가면 당신은 악신을 쓰러뜨릴 수 없어요.]
뭐?
[아마 당황하셨겠죠…. 이 이야기를 먼저 해드릴게요. 강한 마족은 권능을 타고 나요. 악신도 마찬가지죠.]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악신이 무슨 권능을 가졌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막강했고, 게임 속 전투 내내 드러나지도 않았으니.
마족의 정점, 악신 정도면 무슨 권능을 갖는가.
[악신이 가진 권능은 ‘신살의 권능’. 신이 그 세계에 발만 내디디면, 단번에 목숨을 앗아가고, 흡수하고, 강해지는 능력을 가졌어요. 신은 모두 악신에게 상성이 안 좋아요. 누구도 당신을 직접 돕지 못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
그게 뭔데.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납득은 간다. 악신 토벌전에서 신이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애당초 게임에서 신과 관련돼서 언급된 건 주신, 천신, 악신뿐이었지. 심지어 주신은 그냥 종교였잖아. 악신의 권능이 발휘될 기회가 없었다.
그리 얘길 들으니 알 수 있었다. 왜 모든 세계가 멸망할 때 신적인 존재들이 가만히 있었는지, 왜 신이 개입하면 악신의 승리가 확정된다고 한 건지.
[악신은 부활하면 모든 게 끝장날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는 악신을 쓰러뜨려야 했고, 그 자는 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여야 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선택된 거예요. 선별 기준은 모르겠지만요.]
도로시는 오른쪽 검지를 위로 뻗었다. 그 위로 별 무리가 일어나며 형형한 악신의 형상을 작게 이루었다. 마치 작은 인형 같았다.
[하지만 신들이 본 무량대수의 미래에서 악신을 쓰러뜨릴 방법 같은 건 없었어요. 처음에 당신이 악신을 쓰러뜨리지 못 하는 건 필연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신들은 이런 방법을 떠올렸죠.]
이어 왼쪽 검지도 위로 뻗어 별 무리를 일으키는 도로시.
왼쪽 검지 위, 별빛 마력은 작은 악신의 형상으로 조각되었다. 오른쪽에 만들어 낸 악신은 주먹을 쥐어 없애버렸다.
[시간을 통째로 뒤집고, 필연적인 실패로부터 도움 받는 방법을.]
시간을 뒤집는다?
[이곳엔 시간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해요. 지금은 악신한테 봉인 당해 못 움직이고 있지만, 악신이 모든 걸 멸망시킬 때 봉인이 풀려요. 이미 한번 시간을 되돌린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시간을 되돌리는 존재.
사암의 시련에서 보았던 시스템 창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초기화될 때까지 살아남으라는 내용이 시스템 창에 담겨 있었지.
이를 가능케 한 존재가 지금 얼음 호수에 있다는 얘기였다.
[당신이 악신에게 패배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커다란 리스크가 있었지만, 다행히 일은 잘 풀렸다고 해요.]
1회차, 2회차.
그 표현은 그저 내가 이해하기 쉽게 부르는 방식에 불과했다.
시간을 뒤엎는 것조차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루트였다는 것. 리트라이가 아닌, 여전히 컨티뉴였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앞뒤 사정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연이은 도로시의 말이 내가 품은 의문을 일부 해소해주었다.
[돌아간 시간의 흐름은 저 같은 사람에게 간섭할 수 없어요. 제가 죽어서 좀 엄청난 사람이 돼 버린 것 같거든요…. 아니, 사람이라는 것도 안 맞는 표현인 것 같네요.]
도로시는 헛웃음을 냈다.
모두의 시간이 돌아갔어도 도로시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가 보았던 도로시의 능력을 떠올린다면, 그녀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초월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가, 끝내 그 경지에 닿기 위한 조건 중 하나. 죽음.
[초신성 폭발]을 사용하여 목숨을 잃었던 도로시는 그레텔이 사랑했던 과자집 마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죽고 나서 누굴 만났던 기억이 나요. 제가 지금 하는 모든 이야기, 그리고 당신의 사정은 모두 전해 들은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해준 게 누군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네요….]
‘힉스’겠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 개발사. 걔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왜 도로시가 대화 상대를 떠올리지 못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힉스가 일부러 도로시가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든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망각한 걸까.
만약 전자라면 무슨 이유로?
[어쨌든, 결과적으로 당신을 돕기로 약속했어요. 그리고 제가 깨어났을 땐, 이미 그 세계의 시간이 한번 되돌아간 후였죠.]
도로시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신에게, 얼음 호수에 서식하던 원옥마수를 보낸 건 저예요. 그 애는 무엇에든 구애 받지 않아 자유롭거든요. 당신의 힘이 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그 애도 당신을 주인으로 삼겠다고 스스로 선택했죠.]
1회차에선 부유섬을 토벌하지 못했다.
그러나 2회차에선 원옥마수-디아칸이 날 주인으로 섬기게 된 덕분에 부유섬을 토벌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리할 수 있었는가.
그 의문의 답이 자신이라고, 도로시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로시를 구하려 했던 나는 되려 눈앞에 있는 도로시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었다.
이길 수 없는 적을 이길 수 있도록.
[저는 잘 구하셨죠?]
도로시는 게임 말에 불과했다.
[사실 실례지만…, 한 가지는 꼭 알고 싶네요.]
도로시는 모든 걸 잃었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를 사랑하고 있나요?]
그러나 기어이 능청맞게 웃으며 내게 묻는다.
주먹이 바들거리고, 목이 메어온다. 도로시의 그 물음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내 가슴속을 난도질했다.
[니히히. 어차피 대답은 영영 못 듣겠지만….]
도로시는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원옥마수가 있어도 당신은 악신을 이기지 못할 거예요. 강한 동료들을 아무리 데려가도, 빛의 아이가 아무리 강해져도.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수록 상황이 나아지는 건 맞지만, 그래도 그대로는 악신을 이기기엔 부족해요.]
결국, 날 이 세계에 빙의시킨 힉스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지?
“그럼 어쩌란 건데?”
눈앞에 있는 도로시를 희생시키고, 별별 지랄을 다 떨어도 악신을 못 이긴다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이안이 악신을 이겼잖아. 게임은 뭐, 악신 난도를 다운 그레이드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답답한 감정이 밀려왔다.
[희망이 없다는 얘긴 아니에요. 당신이 이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 두 가지 있다는 걸 얘기하려는 거예요. 제가 전해 들었던 방법. 그 방법을 전하는 게 제 사명일 거예요.]
도로시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책으론 남길 수 없는 내용이었어요.]
책으로 기록을 남겨두면 누군가가 볼 수 있다.
만일의 가능성조차 차단했어야 할 만큼 중요하거나 잔혹한 얘기를 하려는 듯했다.
잠시 뜸을 들이고, 도로시는 말했다.
[그 두 가지 방법 중 첫 번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에요. 성공하면 승률이 꽤 올라갈 거예요. 제가 당신에게 또 하나의 저를 구해낼 힘을 준 이유이기도 하구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건, 악신에게 [초신성 폭발]을 부딪치는 것.]
“안 돼.”
단호하게 넘겼다.
9성급 별빛 속성 마법 [초신성 폭발]의 시전 조건은 도로시의 목숨이다.
어떻게든 살려 낸 지금의 도로시를 최종 국면에 가서 희생시켜라?
애초에 도로시를 최종 국면에서 희생시킨다는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 원옥마수라는 힘을 내게 내려 준 거라고?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마 안 된다고 하시겠지만.]
도로시는 이미 내 심정을 짐작했던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기억나진 않더라도, 내가 자길 좋아했다는 건 기억난다고 했었으니.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불가능에 가까워요.]
“말해.”
도로시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방법은 무조건 논외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할 건 두 번째 방법.
[두 번째 방법은, 당신이 얼음 호수에 찾아오는 것.]
지금 시야에 비치는 이곳 말인가?
[살아서, 여기까지 와서, 얼음 원소 마법의 궁극을 손에 넣는 것.]
이어서 도로시는 이야기했다.
살아 있는 육신을 갖고, 진리를 거슬러 명계로 향하라.
명계의 모든 것이 날 노릴 것이며.
명왕조차도 내 앞길을 막을 것이다.
지옥에 몸을 던져라.
수문장, 태초의 빙제 베로니카 아슬리우스까지 쓰러뜨려 얼음 호수에 이르러라.
그곳에서 악신에게 봉인된 초월자를 만나, 궁극의 얼음 마법을 습득하는 것.
그것이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악신을 이길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두 번째 방법.’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은 이 정도예요. 부디 당신에게 이 메시지가 전해졌길 바랍니다.]
도로시는 뒷걸음질로 내게서 떨어지고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어차피 환각이라 상태창은 뜨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도로시의 신비로운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럼.]
이윽고, 도로시는 손을 흔들며 인사하곤 등을 돌리더니 작은 집을 향해 걸어갔다.
상념에 잠긴 채 가만히 도로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도로시는 “아.”하고 발을 멈추었다.
[하나만 강조할게요.]
도로시는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을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도와주고 있는 그녀를, 절대로 믿지 마세요.]
“뭐?”
역시 대답은 없었다.
도로시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고.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과 함께 시야에 내비치던 얼음 호수의 풍경이 순식간에 멀어지며 사그라졌다.
연이어 시야를 메운 건 새까만 어둠.
“…이작!”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아이작!”
“……!!”
나는 눈을 떴다.
시야엔 날 내려다보는 아리아 릴리아스의 걱정 어린 얼굴이 내비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