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왕위 즉위식 (3)
* * *
눈송이 수 가닥이 나풀나풀 내렸다.
도착한 곳은 새하얀 얼음 왕국 뒤펜도르프의 수도, 루펜하임.
루펜하임엔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털 옷을 입은 국민들은 성문에 이르러 천 년 만에 두 번째 빙제인 나를 맞이했다.
우리는 얼음 마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길에 들어섰다. 국민들의 환호성과 갈채가 마차 안에서도 훤히 들렸다.
뒤펜도르프의 국민들은 모두 피부가 뽀얗고 새하얬다. 환경의 영향 때문인 듯했다.
나름의 독자적인 건축 양식이 발달했으며, 추위를 막아주는 아름다운 결계가 왕국 위에 덧씌워져 있었다.
루펜하임의 중심엔 높다란 성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아이작, 안 기뻐? 다들 널 반겨 주는 거라구.”
창밖을 지켜보던 중 도로시가 말했다.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소한 기분이라서요.”
날 반겨 주는 사람들과 여러 얼음 마수들.
그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게 썩 실감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웅대한 왕궁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해 있던 수많은 신하가 맞이해주었다. 다들 남색 베이스에 하얀 털이 장식된 의복 차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머리와 수염이 깔끔하게 정돈된 중년 남성 집사의 말을 따라 신하들이 “수고 많으셨습니다.”를 따라 말했다.
‘부담스럽네….’
애써 태평한 척했다.
“바로 침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직. 그것보다 군단장들부터 회의실로 불러줘.”
“군단장 말씀이십니까…? 예, 알겠습니다.”
짐은 신하들이 알아서 정리해주기로 하였다.
도로시와 앨리스, 빙설룡-힐드에겐 방에서 쉬라고 하였고, 나는 얼음 기사 모르칸과 함께 원탁 회의실에 들어섰다. 상상했던 것보다 호화로운 곳이었다.
원탁 테이블엔 4명의 존재가 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해 흐느적대는 여자 한 명을 제외하곤 엄숙한 분위기였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근육질 거구의 백호 수인이 내 앞으로 걸어와 경례했다. 제1군단장, ‘도르한 베르시오’. 레벨 179의 얼음 속성 강자.
도르한 베르시오는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었지만, 나처럼 어린 녀석이 원왕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를 따라 다른 군단장도 똑같이 경례했다. 술 취한 여자 군단장이 한번 딸꾹질했다.
군단장은 뒤펜도르프 병사들 중 가장 강한 녀석들이 아니다. 실력뿐만 아니라 리더십까지 겸비해야 군단장으로 뽑히기 때문. 괴물 같은 전력은 따로 있다.
어쨌든 이들이 각 군단의 리더라는 건 분명한 사실.
아직 군단장 4명 중 3명은 내 편이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확인차 이 자리에 부른 것이었다. 해야 할 말도 있었다.
딱 봐도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앉아줘.”
군단장들은 경례를 그만두고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어색하다. 다들 내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순한 미소를 지었다.
“오자마자 너흴 부른 건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야.”
상화의 검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상귀-메르뷸이 맡았다가 내게 준 단검이었다. 군단장들의 주의가 그 검으로 기울여졌다.
“아이작. 내 이름이야. 메르뷸한테 상화의 검을 받고 계약을 맺었어. 미안하지만, 중요한 얘길 하나 하려고 한다. 난 왕위 즉위식을 끝내자마자 바로 돌아가야 해.”
“…….”
“적어도 내년까진 제르베르 황국에 있을 생각이야.”
아리아의 비밀 연구를 도와야 하고, 화이트의 마력을 쬐며 어떤 고유 특성도 얻어야 하고, 이안의 안위도 챙겨야 하고, 아카데미를 지키며 시나리오도 클리어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년에 부활할 악신을 막아야 한다. 그게 가장 큰 목적이니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왕위 즉위식 이후, 주군의 부재는 국민들의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백호 수인, 도르한이 말했다. 이미 왔으면서 가긴 어딜 가느냐는 의미였다.
“내가 황국에 머무르는 일엔 뒤펜도르프의 존속 문제도 걸려 있어. 자세한 건 아직 못 말하지만 지금은 믿어줬으면 좋겠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
다른 군단장이 따지듯 물었다. 침잠하는 공기. 나머지 3명의 군단장과 내 시선이 불만을 표한 남자 쪽으로 돌아갔다.
제2군단장, ‘카리우스 알사브’. 레벨 177. 얼음, 물 속성.
입가에 단단한 검은 복면을 씌운 사내로, 제1군단장처럼 상당한 거구를 자랑했다. 그의 머리카락 하나 없는 맨들맨들한 머리가 밝은 조명을 반사했다.
카리우스 알사브의 목소리는 강철로 된 복면 탓에 방독면이라도 쓴 것처럼 울렸다.
나처럼 어린놈이 차기 빙제가 되었다는 사실부터 영 달갑지 않아 보였는데, 내가 맘대로 내뱉은 말을 듣고 끝내 울화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얌마, 카리우스. 주군 앞에서 무슨 말버릇이냐?”
제3군단장, ‘아자벨 실버울프’가 표정을 구기면서 제2군단장 카리우스에게 따졌다.
얼굴에 기다란 흉터가 새겨진 연파란색 단발머리 여성, 아자벨은 레벨이 178이며 얼음 단일 속성이었다. 4명의 군단장 중 나를 가장 먼저 신뢰한 신하이기도 했다.
제2군단장 카리우스는 아자벨의 공격적인 언사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딸꾹…, 으히힛, 카리우스 말도 일리가 있는뎅? 우리가 저 말을 어케 미뎌?”
“야, 에리히.”
제4군단장, ‘에리히 레버린스’는 하염없이 웃는 얼굴로 동감을 표했다.
술에 취한 탓에 새빨갛게 상기된 뺨. 어눌한 목소리엔 애교가 잔뜩 묻어났다.
다른 세 명의 군단장에 비해 체격이 왜소했지만, 일반적인 성인 여성의 체격쯤은 되었다.
얼음 기사 모르칸에게 듣기로, 제4군단장 에리히는 어떤 저주에 걸려 있다. 그나마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엔 저주의 영향이 덜하다고 하니, 상태가 저래도 이해하고 넘어가줘야겠지.
레벨은 176. 얼음과 번개 속성. 그녀도 제2군단장 카리우스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직 내가 달갑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맨들맨들 빡빡이인 제2군단장 카리우스에게 물었다.
“제2군단장 맞지?”
“맞습니다, 주군.”
“불만 있으면 솔직하게 털어놔. 뭐라 안 할게.”
차분하게 말했다. 내 부하가 된 녀석이니 잘 대하자는 심정이었다.
그마저도 아니꼬운지 제2군단장 카리우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저희는 새로운 빙제이신 주군을 오늘 처음으로 본 입장입니다. 아직 주군이 어떤 자인지 감도 못 잡은 상황이거늘, 왕위 즉위식을 끝내자마자 황국으로 돌아가 내년까지 그곳에 계시겠다는 게, 저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째서 뒤펜도르프의 존속을 위한 일이고, 왜 설명이 어렵다는 겁니까?”
“올쏘! 우리 새로운 주궁 귀엽게 생겨서 더 믿음이 앙 가…!”
동조하는 제4군단장 에리히. 쟤는 술에 취해 절제력을 상실한 건가.
‘아직 신뢰도 안 쌓았는데, 벌써 악신이 부활한다고 어떻게 말하냐.’
내 손을 떠난 정보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신중해야 했다.
내게 불만을 표하는 빡빡이 카리우스와 술주정뱅이 에리히를 향해, 제3군단장 아자벨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아자벨의 이마엔 십자 핏줄이 훤히 돋아나 있었다.
“감히 이제 막 오신 주군에게 무슨 망언을…?”이라고 중얼거리며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이 썩 든든했다.
“이유가 있어. 당장엔 답답하겠지만, 믿어 줘.”
“그렇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요청드립니다.”
제2군단장 카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눈을 찌푸렸다. 그의 깨끗한 민머리에 조명이 반사되어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저와 대련해주십시오, 주군.”
우릴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랐다.
“주군은 원왕. 주군의 권력은 강함에서 기인한다는 걸 모르시진 않을 겁니다. 주군의 강함을 이 몸에 새길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하면 더는 아무 말 않고 주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카리우스는 자기보다 약해 보이고 어리기까지 한 놈이 빙제 행세를 하고 있다는 데 거부감을 느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나라 환경 때문에 못 들었더라도, 내 이야기는 얼음 기사 모르칸에게서 전해 들었을 텐데.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믿겠다는 건가.’
애당초 뒤펜도르프에서 빙제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챈 자는 군단장이 아니라 얼음의 용녀라는 종교적 권위자였다. 군단장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1군단장 도르한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고.
제3군단장 아자벨은 “주군을 의심하는 거냐?”라며 으르렁거렸고.
제4군단장 에리히는 “으히힛, 그거 좋댜.”하고 낄낄 웃었다.
“그런 거라면, 뭐…. 좋아.”
안경을 들치고 싱긋 웃었다.
힘으로 내가 빙제의 자격이 있는지 직접 증명해 보라는 얘기잖아.
쉽고 간단해서 좋았다.
* * *
아이작과 얼음 기사 모르칸, 군단장들은 왕궁에 있는 대련장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얼음 장식으로 꾸며진 대련장이었다.
아이작과 제2군단장 카리우스는 거리를 벌리고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고, 제1군단장 도르한이 심판 자리에 섰다.
다른 군단장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에리히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아자벨은 은빛 양손 도끼 파라혼을 어깨에 기대게 한 채 벽면에 붙어 섰다.
“아까부터 하늘 같으신 우리 주군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에리히? 주군이 너그럽게 넘어가셨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내가 널 한 대 쥐어 박았을 거다.”
“으히힛. 아자벨, 주궁의 실력 기대 안 대?”
아자벨에게 아이작은 동경해 마지 않는 존재였다. 그의 이야기만 듣고도 소름이 올라올 지경이었으니.
“…궁금하단 건 인정한다.”
여기서 아이작의 전력을 구경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작이 싸우는 모습을 아자벨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대련은 한쪽이 포기를 선언하거나 기절할 때까지 진행됩니다.”
백호 수인 도르한이 엄숙하게 설명했다.
“두 분, 준비되셨습니까?”
“난 됐어.”
아이작은 몸을 다 풀고 대답했다.
“주군.”
카리우스의 부름.
“절 맨손으로 상대하실 겁니까? 아무런 마도 무기도 없이?”
“그렇다면?”
“아무리 주군이라지만, 얕보이고 말았군요….”
카리우스는 기다란 창으로 지면을 짚었다. 조명이 창날과 카리우스의 민머리에 반사되었다.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말이야.”
아이작은 웃는 얼굴로 안경을 벗었다.
“왜 이렇게 주제를 모르냐?”
“…….”
“전력으로 와라. 더 실망시키지 말고.”
“…알겠습니다.”
카리우스는 유려하고 박력 있게 창을 수 차례 회전시켰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사납게 났다.
턱. 카리우스가 창을 멈추고 전투 태세를 취했다.
“두 분. 준비되셨다면 선언하겠습니다. 대련, 시작!”
도르한이 뒤로 물러나며 대련 개시를 선언했다.
그 순간, 카리우스가 지면을 박찼다.
거구에 걸맞지 않은 날쌘 움직임. 냉기가 서린 창이 수많은 원을 그렸다. 현란하고 빠르게 회전해 얼음 마력의 잔상이 남는 것이었다.
동시에 카리우스는 맞닿는 것을 얼려 버리는 얼음 보호막까지 자기 몸에 전개했다.
근처에만 이르러도 발목이 잡히고 치명상을 피할 수 없게 될 터. 카리우스의 전투법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여유롭게 마력조차 흘리지 않으며, 그저 카리우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뿐이었다.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니십니까?!”
휘익! 차라라락!!
카리우스가 창을 휘둘렀다.
엄청난 속력의 창격과 함께 강한 냉기가 아이작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그 공격은 아이작의 몸을 통과했다.
“뭐야…?”
아자벨은 놀랐고, 에리히의 웃는 얼굴에 약간의 진중함이 깃들었다. 도르한은 침착하게 전황을 살폈다.
눈을 깜박이자 아이작의 형상이 사라졌다.
“어딜 보는 거냐?”
“……!”
아이작의 담담한 목소리가 뒤통수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카리우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눈 깜짝할 새에 아이작이 카리우스의 뒤에 이른 것이었다.
도르한, 아자벨, 에리히는 아이작의 움직임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섬보.
[대 인간 전투력]으로 능력치가 오른 아이작은 제랄드에게서 배운 그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강력한 마력이 카리우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건 내 잔상이야.”
카리우스가 곧바로 몸을 틀어 반격하려는 순간.
아이작의 오른손에 응축된 얼음 마력이 폭발했다.
콰아아아!!
5성급 얼음 원소 마법 [빙결 폭발].
마력의 폭발과 범람하는 빙결이 무자비하게 카리우스를 덮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