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샤를관 입주
* * *
[ 마법학부 2학년 2학기 기숙사 배정표 ]
[ 아이작 – 샤를관 ]
오르핀관 게시판에 새로 게시된 학년별 기숙사 배정표를 확인했다.
‘드디어.’
최상위권 기숙사, 샤를관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나는 샤를관의 일원이 되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플레이어 이안이 샤를관에 입주하려면 3학년은 되어야 했는데…. 부유섬과 무저갱을 잡았던 까닭에 예상했던 것보다 성과가 훨씬 빠르게 두드러졌다.
기숙사를 바꿔야 할 학생들은 소수다. 대부분 극적인 성적 변화를 겪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용인들을 부려 짐을 옮겼다.
나도 엘마관에서 짐을 꾸린 후, 바위 골렘 사역마 이든과 함께 짐을 나눠 들고 샤를관으로 향하려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작 님.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 틈에 엘마관 대문 앞에 온, 금색 장식을 단 메이드 세 사람이 날 맞이했다. 모두 학사 사용인으로, 그중 가운데에 있는 노곤한 인상의 메이드가 메이드장이었다.
“빨리 오셨네요.”
“그게 아카데미 메이드의 소양이니까요.”
직업 정신 투철하네.
이번 학기에 샤를관으로 배정된 인물은 나뿐이다. 학사 메이드들은 나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그녀들은 사역마를 소환해 짐 나르는 일을 도와주었다.
샤를관부턴 학사 메이드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준다. 전투 능력도 준수한 편. 메이드장부터 레벨 97의 실력자이니 말 다 했지. 단순히 메이드라는 명칭으로 이들을 판단해선 안 되었다.
내 어깨에 작은 백룡 형태로 붙어 있는 빙설룡-힐드가 학사 메이드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메이드 복장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생활동에서 아름다운 정원 길을 지나면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고급스러운 외관의 건물이 보인다. 루체와 카야, 도로시, 앨리스 등, 내가 아는 강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최상위권 기숙사, 샤를관이었다.
아치형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으리으리한 홀이 나를 맞이했다.
“오….”
게임에서 말고 실제로 샤를관의 홀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뒤펜도르프의 왕궁을 먼저 다녀왔던 탓에 호화로움의 뽕맛은 떨어졌지만, 이쪽엔 비교가 불가능한 정겨움과 반가움이 있었다. 게임에서 하도 많이 보았던 까닭이다.
“이쪽으로.”
우리는 고급스러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그동안 고지식해 보이는 메이드장이 유려한 말투로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여기서 왼쪽은 남자동, 오른쪽은 여자동입니다. 이동은 자유이나 교칙에 어긋나는 행위는 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네.”
“저쪽으론 여러 편의 시설이 있습니다. 필요하실 때 이용해주세요.”
“네.”
“메이드 호출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또한, 메이드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방에 들어와 특정한 업무를 보길 원하시는지 서류를 작성해서 제출해주세요. 그 서류 내용은 검토가 선행된 후 비로소 일과로 취급됩니다. 학생 여러분의 사생활은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네….”
다른 기숙사들과는 달리 샤를관은 한 건물을 남자와 여자가 같이 쓰며, 여러 편의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기숙사 내에서만 생활하는 것도 가능하단 얘기다.
“여기가 아이작 님께서 쓰시게 될 방입니다.”
학사 메이드는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백만장자나 머물 법한 초호화 방. 중상위권 기숙사인 엘마관조차 승부가 안 되는 방이었다.
작년에 얼떨결에 루체 방을 구경했었기에 신선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역시 입이 떡 벌어지는 곳이긴 했다.
“짐 푸는 거 도와 드릴까요?”
“그건 제가 할게요.”
“네, 그럼.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호출해주세요.”
사용인들이 떠나고 방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이든, 힐드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짐 풀까.”
기다렸다는 듯, 이든은 오른팔을 번쩍 들며 [구우!]하고 대답했다.
……
“카야?”
“아, 아, 아이작 님께서 입주하셨다고 하여…. 축하드립니다! 입주 선물입니다!”
“응? 어, 고맙다….”
샤를관 방에 있을 때였다.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바짝 긴장한 카야가 보였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얼굴을 확 붉히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양손에 쥔 작은 봉투를 건넸다. 흡사 처음 짝사랑을 경험하는 여자애가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고백하는 청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봉투를 받고 안쪽을 살폈다. 값비싼 다과가 안에 들어 있었다. 내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준비한 선물 같았다.
“오, 과자네. 잘 먹을게.”
“네, 넷! 맛있게 드시길! 그럼 전 이만!”
카야는 줄행랑을 치듯 잰걸음으로 도망쳤다. 화살처럼 빠르다.
남자동, 여자동이 한 건물 안에 한꺼번에 있어서 드디어 용기 내서 내 방에 찾아와 본 것 같았다.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
“루체? 야, 잠깐. 왜 들어와?”
“아이작 입주 기념, 방들이 시작.”
툭툭, 하는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담담한 얼굴의 루체가 보였다. 그녀는 다짜고짜 나를 제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가 남자 방에 들어오는 건 당연히 교칙 위반이다. 일단 소리가 빠져나가선 안 됐기에 다급히 현관문부터 닫았다.
“넌 무슨, 마탑주 된다는 애가 교칙을 밥 먹듯이 어기냐?”
“그게 중요해? 내가 네 방 구경한다는 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많지, 멍청아.
어차피 벌점 따윈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성적을 거두고 있으니 상관없다는 거냐.
아카데미 최고의 벌점 선두 주자인 도로시가 욜로족 마인드라면, 루체는 ‘교칙 따위가 뭔데’라는 ‘배 째라’식 마인드였다. 그래선지 개선의 여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얘는 뭐랄까, 누구보다도 범죄자가 되어선 안 될 타입이야. 어떻게든 선한 마법사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면 언젠가 황국 사상 최악의 범죄자가 됐을지도 모를 애라고 해야 하나.
돌연 루체는 부엌으로 향했다.
“입주 기념으로 요리해 줄게.”
“그건 고마운데, 오래 있진 마라.”
여기선 엘마관에서 앨리스와 동거했을 때처럼 사는 건 어렵다. 샤를관 내에 근무하는 사용인들의 귀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기숙사에서 지냈던 때보다 주의를 배로 기울여야만 했다. 루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턱. 갑자기 루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왜?”
“응?”
“다른 여자 올까 봐 그러는 건 아니지?”
마치 장마철의 습기처럼 루체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날 힐끗 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어느 순간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뭔 소리냐…. 메이드 많으니까 들킬 위험이 높단 거잖아. 넌 몰라도 난 벌점 받기 싫거든?”
“…그냥 해 본 말이야.”
“…….”
다시 발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들어가는 루체.
그녀는 내 이성 관계를 집착하듯 신경 쓰고 있었다. 아마 앨리스와 동거했을 때도, 나도 모르게 앨리스와 관련된 흔적들이 내게서 튀어나오긴 했을 것이었다. 그 후로 루체가 앨리스에게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낀다는 걸 알아차리기 쉬웠으니까.
갈등을 조장할 생각은 없었기에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시간이 지나, 루체가 만들어 준 고기 요리를 먹었다. 혹시라도 루체가 돌발적으로 안 좋은 약이라도 넣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딱히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순수하게 맛있었다.
……
“앨리스? 무슨 일이야?”
“애기가 입주했다고 해서 한번 찾아와 봤단다.”
깊은 밤. 샤워를 마친 뒤였다.
똑똑, 하는 정석적인 노크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자상하게 웃고 있는 앨리스가 보였다. 그녀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인사했다.
그런데 어째 은근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앨리스의 얼굴은 멀쩡한데도.
“너 술 마셨어?”
“히, 우리 애기는 예리하구나?”
“대놓고 술 냄새 나잖아.”
이 나라는 아카데미 1학년생 되는 나이부터 주류를 허가한다. 그러나 음주 후 교칙을 위반하면 징계 강도가 3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학생들은 과한 음주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3학년생 되는 나이부터 내 전생의 나라에서 성인으로 취급하는 시기다. 지금의 앨리스가 그러했다.
“오늘 학생회 마지막 회식이었지?”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얘기, 잘 끝내고 왔단다.”
“‘덕분에’?”
덕분이라니? 난 학생회랑 하나도 안 친하고, 얘들 회식을 위해 뭔가 따로 한 일도 없었다.
“나 아무것도 한 거 없잖아?”
“그렇게 생각해?”
“…응?”
다짜고짜 앨리스는 현관으로 들어와 내게 바짝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그대로 그녀는 한 발자국 더 다가와 내게 달라붙었다. 그러면서도 앨리스는 똑바로 현관문을 닫았다.
“실례할게.”
앨리스는 까치발을 들고, 내 어깨에 팔을 휘감고는 나와 배꼽을 맞추려 했다. 그럴 수록 그녀의 큰 가슴이 꾹 눌려 내 가슴에 압박감이 더해졌다.
“너 지금 뭐 하냐…?”
“애기 품에 안기고 싶은 기분이라, 히히. 애기 덕분에 내가 여기 있는 거잖니.”
마지막 학생회 회식을 하려면 일단 앨리스가 아카데미에 있어야 했으니까. 그 전제가 성립된 게 내 덕분이라는 의미였구나.
술기운 탓인지 앨리스는 평소보다 센치해진 것 같았다.
“애기야…. 나 마음대로 해도 돼. 난 애기 거잖니?”
귓가에 울리는 욕망 어린 속삭임과 애교 어린 앙증맞은 행동. 어느새 홍조가 어린 얼굴은 마치 수줍어하는 신혼집 색시 같았다.
온기 있는 숨결이 슬그머니 내 입술을 적셨다. 짙게 번지는 술 냄새가 야릇했다.
순간 이성이 날아갈 뻔했다. 앨리스의 과감한 유혹이 술기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얜 평소에도 호감 표현을 서슴지 않으니까.
가까스로 욕망을 억누르고 표정을 관리하는 데 성공했다. 욕망에 몸을 맡기면 이래저래 골치 아파진다.
“일단 좀 떨어져라…. 나 공부 좀 하게.”
“…….”
“…….”
“여보.”
“아, 제발.”
앨리스는 시시덕거렸다. 날 놀리는 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
“누나가 왔다!”
“도로시 선배?”
어두운 밤. 램프 불빛에 의지한 채 공부하던 중 쾅쾅, 하는 힘찬 노크 소리가 창가 쪽에서 들렸다. 창문을 열어 보니 밖에서 마녀 모자를 꾹 눌러쓴 채 거꾸로 떠다니는 도로시가 보였다.
그녀는 “읏차.”하고서 창가에 발을 얹고 쪼그려 앉았다.
“니히히, 너 입주했다고 들어서. 단련 끝내고 왔어!”
“오래 하셨네요.”
“누나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구?”
도로시는 자기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멋있다, 우리 선배.”
“느흐흐.”
치켜세워주니 더 좋아한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입주 선물 주려고. 잘 봐.”
도로시는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곧 문을 개방하듯 두 손을 펼치며 활짝 웃는 얼굴을 내보였다.
“짠! 누나의 미소야. 눈 호강에 효과가 좋지.”
“오…, 와아.”
“반응이 시원찮네. 팬으로서의 열의가 많이 떨어졌구나, 너?”
도끼눈으로 노려보는 도로시. 뭐라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농담이었다.
그나저나 되게 귀여웠다. 뽀뽀 마렵게 하네.
“물론, 지금 건 농담이고. 이거 주려고 왔어.”
도로시는 머리에 쓴 마녀 모자를 벗고 그 안에 든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작은 케이스였다.
케이스를 열자 안에 든 펜던트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펜던트 안엔 우주라도 담긴 것처럼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다만, 조금 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중고품이었다.
“목걸이네요?”
“마력 담아두면 효과가 나타나는 마도구야.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구. 솔직히 효과를 체감해 본 적은 없지만, 안 쓰는 것보단 나을걸?”
“피로 회복….”
마력이 건전지 역할을 하는 마도구는 많다. 이 펜던트 안엔 건전지 대용으로 별빛 마력이 담겨 있었다.
“회장 맨날 피로에 찌들어 살잖아. 다크서클 심해졌다구? 몸 보신에 도움되는 음식이라도 챙겨줄까~, 하고 고민해봤는데 그런 건 일시적이잖아. 이런 거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좀 낡았지?”
“네, 새 거는 아니네요.”
“사실 내가 쓰던 거거든. 숙모가 선물로 주셨던 거야.”
“……?”
숙모.
도로시가 사랑했던 가족.
“나름 빈티지 감성이다? 게다가 항상 내 살결에 닿아 있던 거라구? 니히히, 너한텐 포상이겠군.”
능청맞게 웃는 도로시.
“이런 추억이 담긴 걸 그냥 입주 선물로 줘도 돼요…?”
“기왕이면 너한텐 소중한 것만 주고 싶어서. 나한텐 그게 제일 소중한 물건이거든. 부적 같은 거야.”
도로시는 눈을 내리깔고 은은하게 웃었다.
“그거 나름 부적으로서 효과가 좋았어. 너한테도 부적 역할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구?”
오즈의 나라에서 벗어나 황량한 고향 땅을 바라보던 소녀다.
추억이 담긴 소중한 부적조차 내게 넘기고 싶다는 건, 그만큼 내가 소중하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뭐, 이런 게 극적인 효과를 거둬줄 거라곤 생각 안 한다. 피로 회복 효과도 당사자가 체감해본 적이 없다잖아.
위기의 순간, 가까스로 살아남았더니 ‘이게 다 목걸이 덕분인가’하는 옛날 영화의 클리셰 같은 것 또한 기대할 게 못 되겠지.
단지 나는 도로시가 이 목걸이를 주는 의미가 좋았다.
“도로시 선배.”
“왜에?”
“이거, 죽을 때까지 목에 걸고 살게요.”
“아니, 꼭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그렇다고 죽진 마라?”
내가 목걸이를 쥐고 비장하게 말하자 도로시는 당황했다.
* * *
바르토스관 교장실.
교장 엘레나 우드라인은 서류를 훑어보곤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아아아아…, 이거 어쩌면 좋니…?”
엘레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뱉는 건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다. 비서는 당연한 일처럼 넘어갔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여러 의미로 중대했다.
“왜 진짜 무녀님이 오시냐고….”
“예?”
그제야 비서가 반응했다.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큰 사건을 일으켰던 존재의 명칭, ‘무녀’가 거론되었기 때문이었다.
“견학 프로그램 말이야…. 황명이 내려졌어. 동방국의 무녀 넣으라고.”
작년부터 기획되어 이번에 처음 시행되는 메르헨 아카데미 견학 프로그램.
몇몇 우수한 청소년들에겐 수 개월 동안만 아카데미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어째선지 견학 프로그램에 황명이 내려지고, 빈자리가 하나 더 강제로 생겨나 엄청난 거물이 참가자 리스트에 들어와 버렸다.
창염의 무녀, 미야.
그녀가 메르헨 아카데미에 견학 오는 것으로 결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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