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 아카데미 대항전 (4)
* * *
한스는 가까스로 의식을 잃지 않았으나, 격한 통증 속에서 혼란에 빠져야만 했다.
분명 상대는 빙제라는 칭호를 가진 얼음의 마법사.
그러나 방금 자신은 무엇에 이리 처참하게 당하고 말았는가.
“주먹…?”
그렇다. 단순한 주먹 한 방이었다.
한스는 자신이 마법사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단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높게 쌓아온 자존감의 탑은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무너지고 말았고.
압도적인 기량의 차이는 한스의 마음속에 깊은 회의감을 단근질하려 했다.
“바, 방금 그거 신체 강화 마법이었지…?”
“아니…, 마력은 전혀 안 느껴졌어.”
“그럼 그냥 신체 능력이 저렇단 거야? 그게 무슨 괴물인데?! 아무리 그래도 저분은 마법사잖아? 그럼 대체… 저분이 작정하고 얼음 마법을 쓰면 어떻단 건데…?”
공포란 전염병처럼 번지기 마련이다.
놀란 건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런 걸 염려했다는 거죠…?”
“이 정도는 아니었어.”
베텔 아카데미의 감독관은 혀를 내둘렀다.
“빙제의 실력을 실제로 보면, 학생들의 두려움이 다시 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남성 감독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특기인 얼음 마법조차 쓸 필요가 없을 줄은 몰랐다고.”
최고의 얼음 마법사란 자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음 마법을 티끌 만큼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저만한 강함을 지녔다니.
사람들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이작은 인간의 한계로,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명문 아카데미의 학생들이라고 한들, 이런 게임의 룰로 아이작을 이기겠다고 생각한 것부터 만용이었던 것이다.
“얼음 마법조차… 쓸 가치도 없단 건가….”
잔해를 들어 올리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한스 맥그리거.
그는 피투성이 얼굴로 다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그런 걸 내가 인정할까 보냐…!”
파앗. 한스는 신체 강화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다시 아이작을 향해 도약했다.
“반!!”
먼 곳에서 아이작을 향해 물과 화염의 줄기가 기다란 용처럼 뻗어 나갔다.
두 원소의 마법을 쏟아붓고 표적에게 부딪혀 강한 수증기 폭발을 일으키는 반 맥그리거의 원거리 공격이었다.
표적은 아이작 옆에 떠 있는 휘심석.
“얕본 걸 후회할 겁니다!!”
한스는 23번 아이템 반사 방패를 꺼내 팔에 장착하더니, 물과 불 원소 마법을 퍼뜨려 서로 맞부딪혔다.
화르르륵!! 파아아아!!
두 원소가 충돌해 희뿌연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높은 마력 운용력이 필요한 기술이었다.
한스의 목적은 시야 차단이었다.
아이작을 이기겠다는 일념이 한스의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는 한 손으로 방패를 든 채 물 원소 마법의 법진을 전개했다.
그리고 한스가 공격을 퍼부으려는 때.
“수가 뻔히 보이잖아.”
“……!”
순식간에 아이작은 수증기를 뚫고 한스의 코앞에 이르렀다.
피부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
냉기를 퍼뜨리는 아이작의 꽉 쥔 오른쪽 주먹이 찰나간 한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휘심석 주위로 얼음의 벽이 솟구쳤다.
콰가강!!
반 맥그리거의 원거리 공격은 아름다운 얼음의 벽을 뚫지 못하고 무력하게 사그라졌다.
‘늦었…!’
한스는 허공에 몸을 웅크리며 방패를 내세웠다.
동시에, 냉기가 휘감긴 주먹이 방패를 향해 쏘아졌다.
카아앙!! 콰자작!!
빛살처럼 내질러진 주먹은 철보다도 단단했다.
아이작의 주먹은 철제 방패를 가볍게 깨부수고 한스의 복부에 정통으로 직격했다.
“꺼헉!”
한스는 내장이 터지고 뒤틀리는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휘우우우!!
동시에 [빙벽]을 해제하는 아이작.
달음박질하는 냉기. 격한 풍압이 퍼져나가며 수증기가 밀려나고.
[빙벽]이 우르르 무너지며 찬란한 얼음 결정들이 풍비박산했다.
한스의 육신은 다시금 허공을 가르며 언덕 아래로 추락했고, 무서운 기세로 뒹굴며 건물 잔해 속에 파묻혔다.
한스는 멀리 떠나가려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카칵, 하고 웃었다.
“부쉈, 부쉈어…. 방패를…!”
방패를 노려주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피로 물들어 이성조차 마비된 머릿속, 한스에겐 승리를 향한 갈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스의 머리 위로 마나 알갱이가 스르르 모이더니 ‘23’이란 숫자를 나타내며 발광했다. 어떤 아이템이 사용되었는지를 나타내는 표시였다.
승리를 확신한 한스는 아이작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기대하며, 피 칠갑이 된 고개를 치들었다.
“빙제시여, 제가 이겼…?”
한스는 자신을 향한 환호성이 울려 퍼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침묵뿐.
학생들의 얼굴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마치 일말의 희망마저 잃어 버린 듯한.
그리고 한스는 보았다.
터벅터벅, 휘심석과 함께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 아이작의 머리 위에 마나 알갱이가 뭉치더니 아름답게 빛나며 숫자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17’.
한스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갔다.
“17번 열람….”
한스의 떨리는 목소리에 응답하듯 허공에 마나 알갱이들이 모여 들었다.
마나 알갱이들은 한스뿐만 아니라 ‘17번 열람’이라 말한 학생들의 눈앞에 일제히 글자 형태로 허공에 새겨졌다.
한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17번 – 수호의 부적 ]
[ 사용 가능 횟수 : 3회 ]
[ 등급 : 전설 ]
[ 효과 : 자신을 탈락시키는 효과를 무효화합니다. ]
한스와 아이작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숫자들은 얼마 안 가 스르르 바람에 스며들며 자취를 감추었다.
“메, 메르헨 아카데미에 선발대 아직 안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아이템 같은 건 아직 못 얻었을 텐데?”
“대체 언제 저런 아이템을…?”
놀라워하는 학생들 틈에서 한스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어째서…?”
눈앞의 언덕은 마치 드높은 산처럼 보였다.
치졸한 방법을 썼음에도 아이작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존감을 넘어서 가슴속 심지에 깊숙히 박혀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고.
끝내 사무치기 시작한 감정이 한스의 호흡을 거칠게 만들었다.
언덕을 내려온 아이작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잡기 위해 모였던 수많은 학생들은 이젠 양옆으로 퍼지면서 길을 터주었다.
“아아….”
자신이 이리도 보잘것없고 초라한 인간이었던가.
절망감 속, 한스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청은발의 남학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만 가라.”
아이작은 지나가던 중, 한스의 가슴께에 착용된 자격석을 떼어내고 바닥에 툭 던지며 말했다.
한스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울분이 차올랐다. 이제는 그만 현실을 마주해야만 할 때였다.
“라이젤 아카데미의 강력한 참가자, 한스 맥그리거 학생이 가장 첫 번째로 탈락했습니다!!”
진행자가 소리치자, 대기하고 있었던 주최 측의 직원들이 나타나 기절한 한스를 끌고 갔다.
학생들은 초반의 용맹한 기세를 잃어 버렸고, 더는 아이작에게 섣불리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대 인간 전투력]이 발휘된 아이작의 마력을 피부로 느끼고서, 한스 맥그리거가 허무하게 패배한 광경을 목도하고서.
심장에 새겨진 공포를 이겨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화르르르륵!! 파아아아아!!
다시 멀리서 반 맥그리거의 불과 물 원소를 합친 원거리 공격이 매섭게 아이작을 노렸다.
아이작은 허공에 얼음 마법진을 전개하더니, 원거리 공격이 습격해오는 방향을 향해 [얼음 창]을 사출했다.
휘우우우!! 차라라락!!
밀도 높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얼음의 창은 소용돌이치는 냉기 마력을 머금고 반의 원거리 공격과 맞부딪혔다.
불과 물의 협공이 [얼음 창]의 기세와 강한 냉기 마력에 밀려나며 격렬한 수증기를 일으키고 빙결했다.
[얼음 창]은 반의 원소 마법 공격을 거슬러 올라가듯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고, 끝내 라이젤 아카데미의 새로운 요격 기지를 반파했다.
콰아아앙!
울려 퍼지는 폭음이 학생들의 공포심에 새로이 아로새겨졌다.
“이럴 수가! 이어서 라이젤 아카데미의 휘심석까지 파괴되었습니다!! 라이젤 아카데미, 탈락입니다!!”
진행자의 외침과 함께 전장 위에 결과가 나타났다.
라이젤 아카데미가 탈락했다는 메시지가 빛나는 글자로 새겨진 것이었다.
학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저런 사람을, 어떻게 이기란 거야…?”
얼음 마법의 묵직함, 사정거리에 한계가 있는지 의심되는 마나 감지력, 원하는 목표에 정확히 마법을 꽂아버리는 마력 운용력.
아이작의 능력은 무엇 하나 세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느덧 아이작의 발길이 멈춘 곳은 잿빛 머리칼을 가진 한 남학생의 앞이었다.
베텔 아카데미의 열등생, 노아 바르탕이었다.
“우리 초면이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노아와 그의 옆에 서 있는 동료 학생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이작과 마주 보았다.
아이작의 흔들림 없는 적안에선 강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제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노아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찬 검에 머물렀다.
“네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
문득 노아는 실감했다.
이 청은발의 남자는 대마법사.
대마법사는 상식을 초월하는 마나 감지력을 가진다고 들었다. 그러니 노아가 여태 숨겨온 힘도 아이작에겐 들키는 것이 당연했다.
바로 철의 마력을.
“그 힘, 꺼내 봐.”
“예?”
아이작의 담담한 명령에 노아는 당황했다.
“난 그 힘에 관심이 있어. 그러니까 꺼내보라고.”
아이작이 선한 얼굴로 내뱉은 명령은 몹시 단호했고, 잔잔하나 강압적이었다.
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게임을 여기서 끝내겠다고 하신 건… 그것과 관련 있는 이유입니까?”
“좋을 대로 생각해.”
“일단, 실례지만 칼 좀 뽑겠습니다.”
노아의 어처구니없는 선언에 동료 학생이 “얌마!”하고 다그쳤으나, 아이작은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그런 건 굳이 허락 받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감사합니다.”
노아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검을 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정석적인 전투 자세였다.
“뭐야, 저 애?”
“빙제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게 있다는 건가?”
“쟤, 열등생이잖아. 노아 바르탕…. 쟤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잠재력 같은 거라도 있다는 거야, 뭐야?”
학생들은 노아 바르탕을 중심으로 소곤거렸다.
아카데미 대항전은 황국에서 손 꼽히는 명문 아카데미들의 강자들이 참가하는 자리다.
그러나 노아는 운 좋게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된 열등생일 뿐.
베텔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빙제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노아에게 관심을 보이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빙제님께서… 자세를…?”
아이작도 마력 회로를 가다듬으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노아를 경계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노아의 전투력이 측정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아 바르탕]
Lv :189
종족 : 인간
속성 : 번개,철
위험도 :최상
“와봐.”
아이작은 웃는 얼굴로 말했고.
노아의 심호흡 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렀다.
그때였다.
[이건…. 주인!!]
아이작의 머릿속에 빙설룡-힐드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아이작의 두 눈이 커졌다. 무거운 마력이 전장에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
아이작과 노아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다른 학생들도, 관중들도, 모두가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크르르, 하는 굉음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어느새 하늘은 칙칙한 먹구름으로 들어차 있었다.
곧이어 먹구름을 뚫고, 일대를 에워쌀 만한 크기의 거대한 대검이 나타나 그 압도적인 위용을 뽐냈다.
누가 보더라도 비상식적인 현상이었다.
“왜 벌써…?”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아이작의 눈은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관중석 쪽, 론자이너스 강사는 거대한 대검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11막, 요정 대전」 파트의 최종 보스.
철의 요정 라크닐이 나타날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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