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 철의 요정 토벌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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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의 마법 기사>는 자타공인 난도가 어려운 게임이었다.
게임에서 철의 기사 라크닐을 처음 상대할 때, ‘이 새끼는 또 어떤 괴랄 맞은 패턴을 보일까’하고 기대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이거였지.
카가가가각!!!
총알에 버금가는 속도로 무수한 검의 세례가 쏟아졌다.
저마다 마력 밀도가 높은 대검으로, 하나하나 돌파하는 건 우리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아는 철의 마력을 사용해 철벽을 전개했고, 나는 거기에 얼음과 바위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석빙]을 덧씌웠다.
우리는 쏟아지는 대검의 세례로부터 그 방어 벽을 유지시키는 데 마력을 쏟아부었다.
쿠콰과광!!
도로시는 벽 앞의 물리력을 어그러뜨려, 쏟아지는 대검의 속도를 완화시키는 데 집중했다.
아무리 도로시라도 마력 밀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요정의 대검을 어찌할 순 없었다. 속도를 줄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설령 대검이 도로시의 방해를 지나 내 [화석빙]을 뚫었다고 해도, 거기서 힘이 빠진 대검은 노아의 철벽까진 뚫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화석빙]을 수복하길 반복. 우리는 그리 철저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카야는 피와 식물 마법, [살육 풀]을 시전하며 라크닐의 생명력을 야금야금 깎아 먹는 데 치중했다. 그러다 보니 [살육 풀]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사라지는 일이 지속되었다.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는 대검이 거슬리는 [살육 풀]들을 베어냈으나, 카야는 쉬지 않고 라크닐을 향해 공격적인 식물 마법을 퍼부었다.
이안은 창명검에 신성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놈은 일격용이었다.
[겁쟁이처럼 숨기만 할 건가? 조금 전까지의 기개는 어디 갔지? 벌써 자신의 만용을 깨달은 것인가, 인간이여!]
라크닐은 가소롭다는 듯이 실소를 내뱉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게 당했던 게 여간 화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만 있어도 되는 겁니까?!”
마력을 퍼붓느라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노아가 큰 소리로 물었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방어 벽은 라크닐의 공격에 뚫릴 테고, 우리의 몸은 날아오는 대검들에 사정 없이 뜯겨나갈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노아의 숨결이 거칠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철의 마력을 라크닐에게 흡수당하고 있는 처지이니, 슬슬 한계일 것이었다.
진작 라크닐도 눈치챘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라크닐은 지금의 대치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거겠지. 결국 이 방어는 얼마 안 가 뚫릴 테니까.
“견뎌.”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었다.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무조건 올 거니까.”
우선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다.
철의 성역에서 라크닐을 이기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뿐.
그 조건을 충족하려면 지금은 저놈을 상대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라크닐에게 가능한 한 피해를 누적시키려 했던 이유는, 저놈의 상태가 좋을 수록 마법의 위력도 강해져 우리 쪽 방어가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 요정을 이길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말했을 텐데. 내가 이긴다고.”
“…믿어보겠습니다. 당신 같은 분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니까.”
노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 머릿속에 바람이 불어오는 감각이 느껴지며 시야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주변에 있는 마족을 감지했습니다!]
‘뭐야?’
마족 감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 시나리오대로라면 이번 파트에서 마족이 나타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어느 마족이 나타났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메피스토…!’
그 개 같은 새끼밖에 없었다.
머릿속에 빠르게 추론이 이어졌다.
뷔엘과 메피스토는 서로 결탁한 동맹 관계. 그리고 철의 요정 라크닐은 뷔엘의 의사에 따라 조기에 출현했다.
라크닐이 남의 명령을 들을 리 없다. 따라서 뷔엘은 라크닐의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했으리라.
뷔엘은 천위 시계가 효력을 발휘하는 때 블랙 스톤을 노리고 움직여야 하는 처지. 지금으로썬 라크닐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메피스토 쪽이 라크닐을 위해 뭔가를 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앞뒤가 맞았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라크닐은 어떤 위험 부담을 떠안았는가? 바로 인류와 요정들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혼자선 그 리스크를 온전히 떠안을 부담을 져야 한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그랬듯이.
그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으면서, 거래 관계인 메피스토에게도 이익이 될 만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타나토스.’
<메르헨의 마법 기사> 2학년 2학기 파트의 최종 보스, 사멸의 타나토스.
그놈을 조기에 출현시키는 것뿐.
‘타나토스가 전력이 된다면, 라크닐도 혹할 만해.’
게임에선 적당한 때에 사멸의 타나토스가 부활한다.
메피스토가 원하는 때, 그놈이 먼저 출현한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는 얘기다. 내가 저번 방학 때 타나토스의 조기 부활까지 상정했던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위험한데….’
무저갱이 이미 완성된 강자였다면, 타나토스는 끝도 없이 강해지는 성장형 괴물.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곤 무적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타나토스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타나토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선 강력한 마법을 쏟아야 하지만, 놈은 그 마법을 집어삼켜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놈의 공격을 막을 다른 방도는 없다.
결국, 타나토스를 내버려두면 미래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메피스토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적인 나와 빛의 아이인 이안이 요정의 성역에 붙잡힌 지금이야말로 타나토스를 부활시킬 적기일 터.
‘화이트…, 부탁한다.’
모든 건 화이트에게 달렸다.
화이트가 조금이라도 빨리 요정들을 불러 모으지 않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었다.
한편, 철의 성역 바깥.
올드렉엔 은색 마력이 느릿느릿 넘실거리며 철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이나 구조물 따위의 잔해가 둥둥 떠다녔다.
철의 바다는 잡아먹은 것을 찌그러뜨리는 강한 압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표류 중인 것들은 대부분 상태가 좋지 못했다.
뒤펜도르프의 군단장 4명은 비교적 멀쩡한 구조물 위에 착지했다.
“유의미한 피해는 입지 않았을 거다. 긴장해라.”
제1군단장 백호 수인, 도르한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4군단장 에리히가 시전했던 얼음 마법은 어디까지나 메피스토를 날려 보내기 위한 용도였을 뿐.
아직 메피스토는 건재하리라.
퍼어엉!!
이윽고, 묽은 바다 안에서 기괴한 형상이 뛰어올라 건물 잔해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군단장들은 그 생물을 향해 일제히 전투 자세를 취했다.
[역시, 이 몸은 별로네요…. 약해 빠졌달까.]
뒷목을 잡고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하는 메피스토.
철의 바다에 빠졌던 탓에 그녀의 몸은 기형적으로 변했다.
얼굴 반쪽이 심각하게 어그러져 안구 하나가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팔이나 몸통 따위는 이리저리 뒤틀리거나 뜯겨나간 상태.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이미 즉사했으리라.
[당신들은 빙제의 추종자들인가요?]
“뒈져.”
파앗!
제3군단장 아자벨 실버울프와 제2군단장 민머리의 카리우스 알사브가 메피스토를 향해 도약했다.
아자벨은 양손에 쥔 은빛 도끼, 파라혼을.
카리우스는 냉기를 휘감은 장병기를 휘둘렀으나, 메피스토는 높이 뛰어올라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메피스토는 주변에 있는 건물 옥상에 착지했다.
[뒈지라뇨. 그렇게 험악하게 말씀하시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 받는답니다?]
손가락이 뒤틀린 양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감으며 애처롭게 말하는 메피스토.
어이가 없다고 느낀 아자벨은 퉤, 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해볼까요?]
메피스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높이 뻗어 있는 철의 성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섬기는 빙제는 지금 철의 요정에게 붙잡힌 상황이죠?]
“그래서 뭐?”
[그렇다면 제가,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두고 과연 혼자 왔을까요?]
“하아, 뭔 개소리를…!”
군단장들이 일제히 메피스토를 향해 공격을 퍼부으려는 때였다.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이명이 울리며 그들 피부의 솜털이 꼿꼿이 일어났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들의 두 눈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휘둥그레 뜨였다.
모두의 시선이 똑같은 방향으로 휙 돌아갔다. 아주 멀리서, 믿을 수 없는 마력이 용솟음치며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잠시간, 세계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르르릉, 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인류의 머릿속을 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아주 먼 곳. 옛적에 부유섬이 휩쓸었던 황야에서 막대한 진녹빛 마력이 솟구치며 광범위한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이곳, 거리가 먼 올드렉에서도 그 폭발은 선명히 보였고 굉음까지 또렷이 들렸다.
뒤펜도르프의 군단장 4명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같은 감정을 느꼈다.
저건… 위험하다.
“빌어먹을 마족 새끼가, 무슨 터무니없는 걸 깨운 거냐…?”
충격에 빠진 아자벨을 향해, 메피스토는 두 손을 뒤로 모으고 정중히 대답했다.
[빙제는 굉장히 강하고 위험하신 분이죠. 그가 품은 힘은 불합리 그 자체. 압도적! 그런 인간을 상대하려면, 저도 그만큼 강력한 녀석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어요?]
마력의 압박감이 선명해졌다.
땅이 울리고, 철의 바다가 격렬히 파도쳤다.
압도적인 거구의 무언가가 진녹빛 마력의 폭풍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해골 갑주를 입은 마법사였다. 복부 아래로 이어진 하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뱀의 육신.
그 생물이 굵직한 팔로 거머쥔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법 지팡이엔 섬뜩한 마력이 흘러넘쳤다.
사멸.
죽음과 소멸의 마력이 그 생물의 눈에서 진녹빛을 띄며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군단장들과 대피한 사람들, 카를로스 황제와 메를린 아스트레앙은 그 괴물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몰아치는 생존 본능이란 본래 제 의지대로 주체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누구라도 똑같은 감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마족은 이길 수 없다고.
[어서 오십시오, 타나토스여!]
메피스토는 양팔을 활짝 펼치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아아아아아아!!!]
사멸의 타나토스.
최상위 마족의 맹렬한 포효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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