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 철의 요정 토벌전 (10)
* * *
“힐드, 앨리스!”
콰아아앙!!
라크닐의 뒤편. 약해진 바닥을 뚫고 두 여성이 뛰어올라 냉기를 휘감은 대낫과 악몽의 힘이 담긴 검을 휘둘렀다.
빙설룡-힐드와 앨리스 캐럴이었다.
조금 전, 학생들은 1층의 금고를 열어 승리 조건을 하나 달성했다. 빙설룡-힐드가 머릿속으로 보고했기에 아이작은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메르헨 아카데미의 거점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들의 안전이 확보된 후, 힐드와 앨리스는 적당한 위치에서 아이작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아앙!!
순식간에 생성된 두 자루의 대검이 힐드와 앨리스의 기습 공격을 막아냈다.
[같잖군.]
라크닐은 힐드와 앨리스가 공격을 이어갈 줄 알았으나, 어째선지 그녀들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뒤이어 성스러운 광조(光鳥) 한 마리가 라크닐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안이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탄생한 5성급 빛의 힘, [빛의 사도]였다.
라크닐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따위로 날…!]
라크닐은 철의 마력이 스민 대검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그가 [빛의 사도]를 향해 대검을 휘두르려는 때, 돌연 주변에 식물 속성의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차아악!
마법진에서 연녹빛을 발하는 굵직한 넝쿨이 튀어나와 단숨에 라크닐을 휘감았다.
라크닐조차 곧바로 대응하기 어려울 만큼 넝쿨에 담긴 마력의 밀도는 어마어마했다.
카야의 마법이 아니었다.
“실피아…?”
카야는 대번에 알아차리고 깜짝 놀랐다.
곧, 옴짝달싹 못하게 된 라크닐에게 [빛의 사도]가 명중했다.
채애애애앵!!!
무지갯빛 광원이 반짝이고.
콰아아앙!!!
신성력의 폭발이 라크닐을 뒤덮으며 해 질 녘의 어스름한 빛을 강하게 퍼뜨렸다.
라크닐은 비명을 내질렀다.
‘황혼의 요정이 내린 축복.’
아이작은 그 힘의 정체를 알았다.
페어리테일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요정의 힘. 황혼의 요정, 누릭스의 축복.
밤의 요정 닉스의 힘이 성역을 통제하고 요정을 집결시키는 지휘권을 갖는 것이라면, 황혼의 요정 누릭스의 힘은 불사와 종언이다.
그 힘은 마족 이외의 누군가가 이안을 살해하는 극적인 순간에 발동된다. 상대는 종언의 저주를 받게 되며, 이안은 죽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요정의 힘이든 디폴트는 요정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카가가각!!
강력한 철의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일제히 아이작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들이…!]
신성력의 폭발이 잦아들자, 라크닐은 분노에 찬 얼굴로 아이작을 향해 사방에서 묵직한 철의 기둥을 뻗어냈다.
그때, 기묘한 기운이 철의 성을 뒤덮고.
네 덩이의 유성이 성의 외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콰아아앙!!
네 덩이의 유성은 각각 제 형상을 갖추었다.
저마다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들은 철의 성에 침입하면서 철의 기사들과 라크닐의 마법을 모조리 부서뜨렸다.
간단하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벌어진 일이었다.
[안녕, 라크닐.]
[네년….]
라크닐의 두 눈에 살의가 끼었다.
카야 앞.
지고의 존재가 연녹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고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듯 그녀의 맑은 피부는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꽃으로 꾸며진 녹색 옷차림. 길쭉한 신장. 그녀는 활짝 웃었다.
“실피아…!”
카야는 놀라움을 느끼며 감격했다.
눈앞에 나타난 자는 카야 아스트레앙을 권속으로 삼은 화록청의 요정, 실피아였으니.
[카야, 오랜만이네.]
“왜 네가 여기에…?”
[라크닐이 수상한 낌새를 보여서, 힘을 조금 비축하고 있었거든.]
아이작은 실피아와 함께 도달한 요정들을 살폈다.
무지개의 요정, 엘레인.
투쟁의 요정, 아레스.
구름의 요정, 클라디.
전부 레벨은 200으로 책정되었다.
[날 방해하러 온 거냐…?]
아이작 일행과 요정들에게 포위 당한 라크닐이 철로 이루어진 이빨을 바득바득 갈았다.
[우린 말이야, 누가 이 세상을 지배하든 관심이 없어. 인간이 멸망하고 마족이 득세하든, 아무 상관 없다고.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면 흘러가는 대로 놔둘 뿐이야. 하지만.]
실피아의 한쪽 눈은 붉은 장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반대쪽 눈은 신비로운 안광을 발했다.
[우리끼리 이러면 안 되지. 그것도 사적인 이유로.]
[망할 새끼들이….]
요정에게 있어서 세상의 질서는 인간이 주축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저 현시대에 득세한 종족일 뿐.
차후 마족이 세상을 지배하든 또 다른 종족이 세상을 지배하든, 요정은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뿐이었다.
다만, 요정이 직접 질서를 어지럽히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용납될 사안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밤의 요정 닉스의 추종자. 닉스의 힘에 응답하여 모인 자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내 성역을 넓히겠다. 그리고… 스텔라와 같은 경지에 올라 그 자식을 무너뜨릴 거다.]
[스텔라는 이제 요정이….]
[닥쳐.]
카카카카각!!
철의 바다와 심장을 이루고 있던 철의 마력이 순식간에 라크닐의 몸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묵직한 마력의 충격파가 사방에 떨쳐 울렸다.
라크닐의 몸은 광택을 내비치며 비대해졌고, 아이작 일행은 황급히 몸을 피하거나 요정들의 방어 마법으로 보호를 받았다.
[날 방해하지 마라.]
라크닐은 높다란 천장까지 맞닿는 철의 거인이 되어, 아이작 일행과 요정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형상은 마치 갑옷을 싸맨 기사와도 같았다.
그 손에 철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크기의 대검이 쥐어졌고.
수많은 대검이 다시금 허공에 떠올라 인간들과 요정들을 겨냥했다.
키리리리릭!
성의 천장이 열리고, 먹구름에 둘러싸인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검이 추락할 준비를 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마력이 아이작 일행의 오감을 사정 없이 두들겼다.
그 웅장한 경치에 아이작은 단조롭게 웃었다.
“2 페이즈냐.”
아이작은 오른손에 냉기 마력을 뭉쳤다. 그 위로 연푸른빛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대가 새로운 얼음의 원왕인가?]
“그렇다면?”
[받아라.]
“뭐?”
투쟁의 요정 아레스의 말을 따라 요정들은 아이작에게 팔을 뻗더니 마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전신에 감도는 신묘한 마력을 느끼며 당황했다.
이는 요정의 힘을 체화시키기 위한 목적의 마력이 아니었다.
아이작의 몸속에 흐르는 마력에 섞여 들어 일시적으로 힘을 불어넣는 마력. 일종의 버프.
<메르헨의 마법 기사> 「11막 3장, 요정 대전」 파트의 승리 조건이었다.
[잠깐이지만, 네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질 거다.]
“왜 이걸 나한테?”
본래 이안이 받아야 할 마력이었다.
[우린 그대가 이 힘을 다룰 적합자라고 판단했다. 이유는 그뿐이다.]
“…….”
애초에 의아해할 필요도 없었다.
해피 엔딩을 맞이하고자 직접 제 발로 악신을 해치우기 위한 여정에 뛰어들었으니.
여태 별별 오지랖을 부려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지금은, 자신이 전부 쳐부수기로 아이작은 다짐했다.
“고맙다.”
아이작 주위로 형형색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전신을 뒤덮는 기이한 압박감. 시린 빛의 마력이 그의 얼음 마력에 혼화한다.
언제든 무시무시한 출력으로 마법을 쏟아부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새겨졌다.
오감이 울부짖는다. 마력이 격렬하게 용솟음친다.
썩 상쾌한 기분이었다.
쿠우우웅!!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의 대검이 대기를 갈라내며 철의 성을 표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합!]
투쟁의 요정, 아레스가 거인이 된 라크닐을 향해 날아들었다.
라크닐은 철의 마력이 스민 대검을 휘둘렀다. 그 검격만으로 일대가 갈려나갈 것이었다.
그에 대항하여, 아레스는 거세게 주먹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투쟁의 요정 아레스는 요정들 중에서 순수한 무력으론 최강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아레스의 주먹은 라크닐의 대검을 튕겨냈다. 라크닐의 중심이 흐트러지자 그의 발밑에 식물 속성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그르르르르!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굵직한 연녹빛 넝쿨 무리가 뱀처럼 기어올라 라크닐의 몸체를 꽉 붙들었다.
실피아의 식물 마법이었다.
동시에 상공에 무지갯빛 결계가 전개되었다. 무지개의 요정 엘레인은 결계 중심에 뜬 채 하늘에서 추락하는 대검을 가로막았다.
[웃흥.]
엘레인의 상큼한 웃음소리.
추락하는 대검이 무지개 결계에 맞닿자 끼이이익, 거리는 굉음이 울리며 사나운 불꽃이 튀겼다.
충격을 받는 즉시 돌려내는 힘. 엘레인의 특화 능력, ‘반사’였다.
대검과 무지개 결계의 격돌이 이어지는 때, 구름의 요정 클라디가 날아올라 라크닐 머리 위로 마법진이 새겨진 커다란 적란운을 구축했다.
천고를 일으키는 요정의 구름은 불합리할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 뭉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은백색 소나기가 쏟아지며 라크닐을 적셔나갔다. 스으으, 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며 부식되어가는 철. 욕망의 비가 철의 거인을 탐했다.
휘이익!!
허공을 나도는 무수한 대검들이 요정들을 노리고 거세게 휘둘러졌다. 요정들은 각자의 마법으로 이를 악물고 대검들의 연격을 막아냈다.
“후우.”
아이작과 빙설룡-힐드, 그리고 적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빙결 차단막]이 씌워졌다. 이로써 그들은 아이작의 얼음 마법으로부터 보호 받으리라.
빙설룡-힐드가 희뿌연 [서리바람]을 퍼뜨렸다. [서리바람]은 [밤의 칼날]의 힘이 깃들어 라크닐을 잠식해 나갔다.
아이작은 암철검을 집어넣고, [빙제]의 힘으로 세 쌍의 냉기 날개를 전개했다.
부우우!
그리고 비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