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실피아
* * *
나는 생명의 언약이 있는 넓은 숲의 길을 온전히 알지 못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크고 복잡해서 맵 구조를 다 못 외웠을 정도인데 실제 크기는 어떠하겠는가.
[천리안]으로 구석구석 뒤지는 것보다 카야가 안내해주는 편이 더 효율적이겠지.
또한, 실피아는 카야가 있어야만 살갑게 대해줄 터.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귀여워.’
같이 있으면 힐링이 된다.
“안내해줘. 난 길 잘 모르니까.”
“저야 상관없지만. 왜, 왜 실피아를 아이작 님께서…? 아!”
뭔가 떠올린 건가.
“저희 1학년 1학기 반 배정 평가 때…. 실피아와 아는 사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 ‘실피아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네 진가는 미래에 발휘되겠지. 그때 조금은 봐줄 만한 정도가 된다면, 한번 상대해 주마.’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때.”
“네…?”
“나 실피아 어제 처음 봤어.”
카야는 잠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고가 뒤엉킨 모양이었다.
그땐 실피아와 뭐 엄청난 과거가 있는 척했지만, 이젠 말할 수 있다.
난 실피아와 모르는 사이라는 것을.
“뭐 친한 사이는 아니었단 거지, 알긴 알아.”
카야는 사고를 정리하는 듯하더니 멋대로 납득하고는 오히려 감탄했다.
“그럼…, 더 대단하신 거 아닙니까?”
응?
“실피아와 모르는 사이셨는데 실피아에 관해서 자세히 아셨단 얘기는, 분명 전지(全知)의 경지…!”
“호들갑 그만 떨어라.”
“아야얏.”
손을 뒤로 넘겨 카야의 뺨을 슬쩍 꼬집었다.
그녀가 아파하자 꼬집기는 금방 멈추었다.
“…아이작 님, 그런데 혹시 그 말, 진심이셨습니까?”
“뭔 말?”
“제 진가가 발휘된다면 한번 싸워주시겠다고….”
“나랑 붙어보고 싶어?”
고개를 뒤로 돌리고 묻자 카야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하고 카야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이작 님께 덤벼볼 만하다는 게 아니라…! 당연히 제가 간단하게 질 건 알지만…!”
무슨 의미인지 내가 못 알아들었겠냐.
‘도전 정신 좋네.’
나와 전투를 벌여 자기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다는 의미겠지.
나라는 벽을 직접 체감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고.
지금은 뭐, 카야 정도는 여유롭다. 내가 가뿐히 이길 것은 자명했다.
“카야, 아직 내가 생각했던 네 진가는 발휘 안 됐어.”
“네?”
“아직 넌 더 폭발적으로 성장할 여지가 있다.”
카야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애가 가진 힘의 성장 가능성은 굉장히 무서운 편이다.
내겐 통하지 않는 힘이라고 해도, 이 애가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엔 부정의 여지가 없었다.
“넌 내가 인정한 사람이라고 했잖아. 괜히 그랬겠냐.”
“…그랬죠.”
1학년 1학기 학기말 평가 때 내가 했던 얘기다. 카야는 기억하고 있었다.
카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가슴 벅찬 뿌듯함에 절로 전율한 것이었다.
“헤헤…. 좋네요, 많이.”
내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카야에게 큰 행복이 되어주는 듯했다.
그리 받아 들여주니 나야 고마웠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경치 구경하면서 현황이나 점검해본다.
‘「요정 대전」은 어떻게든 해결됐고, 타나토스가 토벌됐으니까 「13막」도 패스겠네.’
사실상 이번 학기에 남은 공식 시나리오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 「제12막, 반역의 천인」뿐이었다.
12막의 최종 보스는 천의 날개 뷔엘이다.
‘노아에게 철의 핵도 잘 전해줬고, 메텔은 뒤펜도르프에 구속시켜 놨고….’
어젯밤, 노아에게 철의 핵을 건네줬다.
─ ‘이게 뭐죠?’─ ‘라크닐의 핵. 삼키면 철의 마력은 온전히 네 것이 될 거다.’
노아는 당황했지만, 그래도 내 말을 따라 철의 핵을 잘 삼켰다.
그리고 내게 감사를 표했다.
─ ‘감사합니다, 빙제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었다.
노아는 부채의식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니 악신 토벌대에 가세하게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날 암살하려 했던 천족, 메텔 발렌시아는 꿈속에 가둬 둔 채로 뒤펜도르프에 보냈다.
뷔엘 사건이 끝날 때까지 일단 독방에 가둘 생각이었다.
‘이제 남은 건 뷔엘, 메피스토, 네피드….’
3학년 1학기 파트인 제14막부터 제16막까지의 보스는 메피스토를 제외하고 이미 앨리스 사건 때 일기토했으니.
남은 공식 시나리오의 보스는 반역의 천인 뷔엘, 계약의 메피스토, 악신 네피드뿐.
그들을 쓰러뜨리면 이 여정도 막을 내릴 것이다.
[주인, 다 온 것 같군.]
빙설룡-힐드의 고아한 목소리.
어느덧 우리는 아스트레앙 공작령에 있는 울창한 숲 위에 도착했다.
“아이작 님, 저기로.”
“힐드.”
빙설룡-힐드는 카야가 가리킨 방향으로 내려갔다.
[천리안]으로 생명의 언약임을 확인했다. 역시 빨리 찾았네.
빙설룡-힐드는 나무를 헤집으며 내려앉았고, 우리는 작은 섬 하나가 둥둥 떠 있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작은 섬 위론 큰 나무 한 그루가 길게 뻗은 채 아름다운 연녹빛 잎을 뽐내고 있었다.
화록청의 요정 실피아의 거처, 생명의 언약이었다.
나와 카야는 빙설룡-힐드의 등에서 내려가 호숫가에 다가갔다.
“불러줘.”
“네.”
카야는 바람 마법으로 몸을 띄워 호수를 지나 작은 섬에 이른 뒤, 생명의 언약에 손을 올렸다.
“…실피아. 나 왔어.”
스으으으.
생명의 언약의 연녹빛 잎들이 더욱 영롱하게 발광했다.
나뭇잎들은 신비로운 마나를 흘렸고, 마나는 하나로 뭉쳐 꽃의 형태를 이루더니 요정의 형상을 갖추었다.
화록청의 요정 실피아.
그녀가 웃는 얼굴로 카야에게 내려왔다.
[귀염둥이!]
“실피아!”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네?]
카야와 실피아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제는 정신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사실상 오늘이 진정한 재회의 날이라고 봐야겠지.
이윽고 그녀들은 웃고 떠들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요정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건 쟤뿐이겠다.’
카야는 어렸을 때 이 숲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 생명의 언약을 발견했고, 실피아와 마주쳤다.
실피아는 카야가 식물 속성의 적합자임을 간파하고 흥미를 보였고.
카야가 ‘예쁘다’라며 감탄하자 기뻐하더니, 카야를 많이 귀여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금처럼 허울 없는 친구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저런 수컷까지 데려와선. 자랑하러 온 거야?]
“무, 무슨 자랑? 그런 거 아닌데?”
[응? 그런 게 뭔데?]
“어으….”
실피아는 음흉하게 웃다가 날 쳐다보았다.
[얼음의 왕.]
실피아는 꽃잎을 흩날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땅이든 호수든, 그녀는 상관없이 밟고 지나다닐 수 있었다.
카야는 일부러 실피아를 따라가지 않았다.
나와 실피아가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었다.
실피아는 내게 다가오자마자, 돌연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네가 오자고 한 거지? 나한테 무슨 용무야?]
날이 서린 목소리.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카야 보고 실피아를 부르라 한 것이었다.
우린 동료 사이가 아니며, 나는 이 녀석과 생판 남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나는 평범한 놈도 아니니, 요정인 실피아로선 경계심이 들 수밖에.
“별거 아니야. 너한테 필요 없는 걸 받아가고 싶어서.”
[내게 필요 없는 것?]
“8성급 사역마 계약진. 그거 나 줘라.”
실피아는 “오호?”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은 본래 <메르헨의 마법 기사> 후반부에 가서 얻을 수 있다.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에 이곳으로 오면 화록청의 요정 실피아가 맞이해준다.
그럼 뭐 라크닐 얘기로 주저리주저리 떠들다가 자기한텐 필요 없는 것이라며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나는 겨울방학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난 시나리오에 구속 받는 처지가 아니니까.’
바로 오면 그만이었다.
[넌 요정의 주머니 사정까지 꿰차고 있니?]
“나한테 필요한 거여서. 찾다 보니 부득이하게 그렇게 됐다. 그게 어디 가서 쉽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음흉한 마법사.]
실피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녀석도 아마 내가 사멸의 타나토스를 토벌하는 광경을 몰래 지켜봤을 것이다.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이 있는 걸 내가 미지의 힘으로 알아챘다고 판단했겠지.
[…네 말대로야. 내겐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이 있어. 갖고 싶다면 줄 수 있지. 하지만.]
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
여기서 조건을 걸어 버리네….
“뭔데?”
[넌 품으려는 여자가 많아 보인단 말이지? 그러니까.]
실피아는 내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손차양으로 입가를 가렸다.
[카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펴줘. 번식해서 애기도 낳고, 저 애와 그 애기도 행복하게 해줘. 내 조건은 그거야. 저 애를 슬프게 하면 이 세계의 모든 식물의 진노를 각오해야 할 거야.]
과연, 카야를 사랑하는 요정답다.
하긴, 요정이 인간한테 뭘 바라겠냐.
“조건이랄 게 있냐.”
[응?]
“아예 네가 반대해도 카야는 쭉 좋아할 거야.”
카야가 없는 내 하렘 왕국은 상상이 안 가니까.
나는 실피아의 신비로운 눈을 태평하게 마주보았다.
[후훗…, 좋은 대답이야. 손 줘 봐.]
빙설룡-힐드 계약진이 새겨지지 않은 다른 손을 실피아에게 내밀었다.
실피아는 내 손목에 손가락을 올렸다.
스으으으.
손목에 새겨져 가는 작고 정교한 계약진.
그 와중에 실피아가 입을 열었다.
[너, 앞으로 뭐 할 생각이야?]
“요정이 무슨 인간 일을 궁금해 하냐?”
요정은 아군도, 적군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중립.
인류가 악신에게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는 처지였고, 애당초 세상사에 개입해서도 안 되었다.
[넌 카야를 품을 남자잖아.]
왠지 장모님이 늘어난 기분인데….
“그냥, 별거 없어. 모든 일 다 잘 해결하고, 행복하게 잘 살 거야. 그게 다야.”
[흠. 너처럼 강한 인간도 나름 고충이 있나 보구나?]
“세상살이 누구나 근심 정도는 하나 이상 가지는 법 아니겠냐. 요정은 안 그래?”
[글쎄? 난 유유자적하게 살면 그만이니까.]
실피아는 능청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수심에 차있었다.
지금까지 권속을 맺었던 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을 터다.
요정과는 달리 사람은 일찍 죽으니, 여태 이 녀석이 느껴왔을 이별의 상실감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냐.”
나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후로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내 시야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을 획득했습니다!]
……
실피아의 ‘또 보자’라는 인사를 받으며 카야와 함께 생명의 언약을 떠났다.
빙설룡-힐드는 우리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황국 영공을 마음껏 누비는 건 실례를 범하는 것 같아 양심에 찔렸지만.
나름대로 어제 큰 활약을 했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카를로스 황제도 날 완전히 남 취급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나와 화이트가 그렇고 그런 관계인 줄 알고 지지하는 듯했으니까.
“아이작 님.”
“응.”
“혹시 실피아와 무슨 얘기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숨길 것도 없었다.
나는 실피아에게서 받은 8성급 사역마 계약진을 보여주었다.
“고위 사역마 계약진. 선물로 받았어. 실피아가 갖고 있었거든.”
카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8성급 마수 한 마리 더 사역마로 삼으실 생각인가요?”
“그럴 것 같다.”
“헤헤, 굉장하네요!”
카야는 ‘역시 아이작 님!’하고 날 추켜세웠다.
이윽고,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아까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
이것도 숨길 필요….
─ ‘카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펴줘. 번식해서 애기도 낳고.’
아니, 숨기자.
“아이작 님?”
안 그래도 남자 면역이 약한 카야에게 너무나도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뭐만 하면 얼굴이 상기돼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심하면 기절까지 하는 애니까.
“그냥 너랑 무슨 관계인지 묻던데. 대충 친한 사이라고 했어.”
“아…, 그렇습니까.”
카야는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차피 다음 방학 때 실피아 만나면 정확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
당장 내 입으로 그 얘길 하고 싶지 않았다.
─ ‘조건이랄 게 있냐. 아예 네가 반대해도 카야는 쭉 좋아할 거야.’
사실상 프러포즈나 다름없으니까.
“가자, 힐드.”
나와 카야는 빙설룡-힐드를 타고 메르헨 아카데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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