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화 〉 천의 날개 토벌전 (1)
* * *
블랙 스톤.
이 세계에서 가장 큰 흑회색 화산으로, 해발 고도와 면적은 그 어느 산과도 비교가 안 된다.
옛적에 부유섬이 휩쓸고 갔던 황야 또한 블랙 스톤의 일부에 불과하다.
만약 인간이 그 산의 한가운데에 있다면 평야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낄 것이었다. 산 자체가 지나치게 비대한 까닭이었다.
다만, 분화구에 가까워질 수록 경사가 끝이 안 보일 만큼 가파르게 증가하여 높다란 언덕을 형성해 산이라는 실감이 들게 한다.
분화구 인근은 아주 높은 상공이기에 공기가 희박했다. 일반인은 숨을 쉬기 어려웠다.
파아아아아.
메르헨 아카데미의 어딘가. 천위 시계가 빛을 발하며 새하얀 파동을 전세계로 퍼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력을 포함해 기이한 힘을 다루는 모든 것의 흐름이 뒤엉켰다.
그리 각국 도시의 순환을 이루던 온갖 마도구의 기능이 정지했다.
“시작이군.”
블랙 스톤의 분화구 인근.
아직 숨을 쉴 수 있는 고도에서 여러 나라의 연맹 대군이 대열을 이루어 전투를 준비했다.
제르베르 황국의 황실 기사단, 성국 바르디오의 신성 기사단, 뒤펜도르프의 서리 군단.
그중 제르베르 황국의 기사단장이 새하얀 오로라로 가득 찬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다.
화아아아아!
하늘이 열리고, 블랙 스톤의 분화구를 향해 광명이 쏟아졌다.
“전군! 전투 준비!!”
“전투를 준비해라!!”
연맹 대군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 ‘천위 시계가 작동하면 마법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워진다. 애초부터 마법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싸워라.’
뒤펜도르프의 군단장, 아자벨 실버울프는 빙제 아이작의 지시를 떠올렸다.
“마력이 뒤엉키고 있군. 주군의 말씀대로다.”
마력이 제 의지대로 깔끔하게 순환되지 않는다.
양손 도끼 파라혼에 냉기 마력을 전달하기가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렵게 느껴졌다.
연맹 대군은 아이작의 지시대로 순수한 육체적 능력을 중시하여 편성되었다. 마법사들은 블랙 스톤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도왔을 뿐.
“온다!! 블랙 스톤을 사수해라!!”
파닥이는 날갯짓 소리.
하늘의 광명을 타고 은빛 갑주를 입은 천족들이 내려온다.
그들은 저마다 신성력이 깃든 무기를 거머쥐고 인류 측의 연맹 대군을 향해 돌격했다.
블랙 스톤 내부에 흐르는 마나를 이용하여 롱기누스의 창을 만들려면, 방해꾼을 사전에 처리할 필요가 있었으니.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쿠우우우우!!
“지진인가!”
블랙 스톤 내부의 마나가 요동치며 땅이 울렸다.
연맹 대군의 중심이 흐트러지자, 그 틈에 천족들이 검이나 창 따위를 휘둘렀다.
기사들은 즉각 대응했다.
채앵!! 화아악!!
무기를 맞부딪치자 신성력의 범람이 2차 충격을 일으켜 기사를 밀어냈다.
천위 시계의 효과로 신성력이 뒤엉킨 건 천족도 마찬가지. 그러나 대부분 실력이 출중한 뷔엘의 반역군은 가까스로 신성력을 전투에 써먹을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기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선혈이 낭자했다.
구르르륵.
연녹빛 마력의 뿌리가 지면에서 뻗어 나와 부상을 입은 기사들을 회복시켰다.
카야 아스트레앙의 식물 마법. 그녀는 후방에서 연맹 대군의 보호를 받으며 아군의 치료를 도왔다.
천위 시계의 효력 탓에 마법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웠으나, 요정의 힘에는 그나마 영향이 덜했다.
이곳에서 카야의 역할은 힐러였다. 식물 마법은 회복 계열로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니.
차라라랑!
도로시의 별빛 마법이 천족들을 덮쳤다.
위력이 크게 약화되어 천족 군대의 갑옷에 큰 영향은 주지 못했지만, 웬만한 원소 마법에 비해선 공격이 유효하게 먹혀들고 있었다.
도로시의 역할은 보조였다. 별빛 마법은 천족들의 갑옷을 찌그러뜨리거나 움직임에 영향을 줄 수 있었으니.
“마법 쓰기 더럽게 어려워졌구만!”
도로시는 애써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요정의 권속인 두 여학생은 아이작의 지시에 따라 연맹 대군에 합류한 채였다. 그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채앵!!
아자벨은 한 천족의 참격을 커다란 도끼 날로 막아냈다.
[네놈들은 뭐냐? 전부 얼음의 왕, 그놈의 작품인가?]
“주군을 ‘그놈’이라? 뚫린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구나, 이 빌어먹을 년이!”
아자벨의 이마에 십자핏줄이 퍼뜩 돋아났다.
아이작은 위대하며,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다. 그를 주군으로 모실 수 있어서 아자벨은 큰 영광을 느꼈다.
그런 분을 속되게 칭하다니. 아자벨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힘을 쏟아 얼음 마력을 쏟아부었다.
“주제를 알아라!!”
카앙!!
아자벨은 거세게 파라혼을 휘둘러 천족을 밀어냈다.
냉기가 매섭게 퍼져나갔으나, 천족에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자벨은 송곳니가 튀어나온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며 늑대처럼 위협했다.
“정말로 마법이 안 먹히는군. 번거로운 새끼들.”
천족의 갑주는 원소 저항력을 극대화한다. 아이작이 연맹 대군에게 알려준 정보였다.
“밀리지 마라!! 블랙 스톤을 사수해라!! 빙제를 위하여!!”
아자벨은 천족들을 향해 파라혼을 휘두르며 소리를 내질렀다.
뒤펜도르프의 군단은 일제히 기합을 내지르며 천족들과 싸워나갔다.
한편, 뒤펜도르프의 독방.
한 천족이 호위병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독방 문을 열었다.
어두웠던 독방에 빛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방. 메텔 발렌시아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악몽에서 빠져나왔다. 천위 시계의 효과로 보팔 소드의 힘마저 뒤엉켜 악몽의 감옥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수없이 반복된 전쟁의 악몽 탓에 정신이 멀쩡하지 못했다.
[뷔엘 님의 명이시다. 메텔, 당장 무장하고 날 따라와라.]
열린 출입문 쪽, 은빛 갑주를 차려입은 남성 천족의 말을 듣고 메텔이 그를 쳐다보았다.
[뷔엘 님…?]
얼떨떨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메텔은 그 이름을 읊조리고는 두 눈에 생기를 되찾아갔다.
천족들은 천신의 명령 아래 수많은 종족과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없이 반복했다.
수많은 동료의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천신은 모두 소모품 취급할 뿐이었다.
자신들의 신은 끌어내야 한다. 오늘이 바로 그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메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역의 천군으로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이었다.
세계 어디서든, 사람들은 새하얀 오로라가 춤추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론자이너스 강사는 메르헨 아카데미를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성력이 뒤엉켜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불사의 힘도 이제는 무용지물이다.
오늘,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라.
지금쯤 블랙 스톤에서 부단장을 따르는 반역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으리라.
괜찮았다. 빙제 아이작 같은 괴물만 상대가 아니라면 천족은 인간에 비해 월등히 강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 가 블랙 스톤의 마나가 터지면 원왕들도 출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또한 상관없었다. 뷔엘은 그들 모두를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
콰앙!
두 명의 천족이 외벽을 뚫고 들어왔다. 론 강사의 사무실에 새하얀 깃털이 흩어졌다.
그들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뷔엘에게 예를 표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뷔엘 님.]
한 명의 천족은 피 칠갑이 된 괴묘-체셔를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괴묘는 뷔엘을 감시하던 중, 방심한 틈에 천족에게 기습을 당한 것이었다.
[니오옹…, 너무 아프잖니….]
[이 마수는 어떻게 할까요? 죽이면 되겠습니까?]
천족이 괴묘를 보이며 묻자 론 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놔줘라.]
[예.]
어차피 천신을 끌어낼 창을 만들면 이 세계의 모든 생물이 목숨을 잃는다.
어찌할 수 없는 방해를 받거나 불가피한 희생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뷔엘은 굳이 살육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러니한 태도를 천족들은 이해했다. 그들은 전쟁에 질려 천신을 끌어내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앞으로의 살육을 끝내기 위한 싸움이었다.
천족은 괴묘를 벽에 던졌다.
쿵, 하고 괴묘는 벽에 부딪히곤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니오옹…. 앨리스, 아이작….]
괴묘는 스스로를 역소환하고 싶었으나, 천위 시계의 효력 탓에 역 소환의 연산식을 구축해도 마력이 뒤엉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보고 싶은 주인들의 이름만 읊조렸다.
[가지.]
론 강사, 즉 뷔엘은 자신을 본모습으로 바꾸며 뚫린 외벽 쪽으로 걸어갔다.
두 명의 천족이 뷔엘을 뒤따랐다.
뷔엘은 네 쌍의 날개를 펼쳤다. 신성력으로 빛나는 깃털이 사방에 휘날렸다.
그들은 바닥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부웅!!!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이 사라지며 소닉 붐이 일었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공기를 가로지르며 블랙 스톤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 메르헨 아카데미를 떠난 순간.
화르르륵!!
상공에서 악몽의 힘이 화염처럼 퍼부어지며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뷔엘은 반사적으로 신성력을 휘둘러 자신과 부하들의 몸을 보호한 뒤,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날갯짓하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적자색 화염을 휘감은 검은 용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몽룡-재버워크였다.
그 흑룡을 타고 보팔 소드를 쥐고 서 있는 자는, 원더랜드의 지배자 앨리스 캐럴이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매가 뷔엘을 노렸다.
[방해인가. 처리해라.]
[예!]
천족 부하 한 명이 앨리스를 향해 솟아올랐다.
그 순간.
퍼엉!!
[……!]
다른 한 명의 천족이 바람 마력을 머금은 발차기에 걷어 차여 지면에 처박혔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뷔엘이 당황하며 눈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건 처음 보는 금발의 소년이었다.
[넌 뭐냐?]
몸에 휘감은 평범하디 평범한 바람 마력.
마력 감지조차 안 됐거늘, 어느 틈에? 감지가 늦었나?
아니다. 마력 감지가 늦은 것이 아니었다.
그 소년은 마력을 발산하자마자 천족에게 이르러 공격을 내지른 것이었다.
뷔엘조차 놀라움을 느낄 만큼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소년은 쏘아진 탄환처럼 단숨에 뷔엘에게 이르러 바람을 휘감은 주먹을 날렸고.
뷔엘은 가볍게 그 주먹을 잡고 공격을 막아냈다.
퍼어엉!!
소년의 주먹에 응축돼 있던 바람 마력이 터졌으나, 뷔엘에겐 무용했다.
하지만 뷔엘은 눈앞의 소년이 거슬린다고 느꼈다.
온전히 바람 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 천위 시계의 효력이 발휘된 지금도 마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마력 효율.
거기서 육탄전으로 위력을 커버하기까지 한다.
평범한 마법사의 전투 방식이 아니었다. 마법 기사와도 결이 다르다.
A 클래스 학생들이 정석적인 방식으로 두각을 드러냈던 자들이라면, 눈앞의 소년은 독단적인 길을 개척하는 마법사였다.
“하! 이젠 하다 하다 강사까지 적인가?”
금발의 소년, 트리스탄 험프레이는 거만한 목소리로 실소를 내뱉었다.
“질리지도 않는구나!”
연이어 트리스탄은 뷔엘을 향해 발차기를 내질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