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9화 〉 천의 날개 토벌전 - 막간 (3)
* * *
아이작이 아직 의식을 못 찾았을 때였다.
“정말 괜찮겠어?”
“…….”
평소 아이작이 자주 단련하던 나비 정원 구석.
넓은 잔디밭 위에서 루체 엘타니아와 도로시 하트노바가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루체는 도로시의 물음에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친구가 별일이네. 이 언니한테까지 부탁할 정도면, 많이 내몰렸다고 보면 되나?”
느흐흐, 하고 입을 가리고 음흉하게 웃는 도로시.
그 모습이 루체의 신경을 건드렸으나, 그녀는 눈살만 찌푸렸다.
“쓸데없는 얘긴 됐어.”
“그래, 이제 안 놀릴게. 그럼… 안 봐줄 거야.”
“응.”
두 여학생은 서로를 향해 마법진을 전개했다.
천족 사건 때, 루체 엘타니아는 뷔엘에게 패배하고 정신을 되찾은 뒤 무력감에 사무쳤다.
강해지고 싶었다. 그렇기에 도로시에게 대련을 부탁했다.
아무리 도로시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당장에 그녀가 루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었으니.
해가 지고, 하늘에 먹물이 칠해지고, 그리 몇날 며칠이 흐르는 동안 루체는 쉬지 않고 도로시와 대련을 이어갔다.
도로시뿐만이 아니었다.
루체는 앨리스 캐럴에게도 고개를 숙여 단련에 어울려 달라고 부탁했고, 앨리스는 흔쾌히 수락하며 친절하게 대련해주기도 했다.
아무리 천재라 불리는 루체라고 해도 도로시나 앨리스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루체는 조금도 물러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더는 제 무력함 탓에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없었으니.
어떻게든 강해져 아이작과 보폭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만큼, 루체에게 아이작은 소중한 사람이며,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존재였다.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선명한 감정이었다.
“아이작, 왜 대답 안 해?”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침대 위, 루체는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남자에게 재촉하듯 속삭였다.
이미 한때 고백까지 쏟아냈으니. 굳이 답답하게 제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겠다고 루체는 판단했다.
“싫어…?”
루체는 일부러 목소리에 끈적한 숨결을 섞으며, 묶여 있는 아이작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소중한 물건 다루듯 조심히 아이작의 손을 쓰다듬고,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얄찍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부드럽게 깍지를 끼자 아이작은 움찔 몸을 떨었다.
“야, 루체….”
“아이작.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난 네가 남자로 보여.”
루체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물고기 같은 남학생들의 연심 가득한 시선을 뛰어난 시력으로 몰래 관찰해 왔고, 그리 얻은 정보들은 아이작을 살피는 데 모조리 쓰였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다.
아이작은 루체를 여자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난생 처음이라 익숙지는 않더라도, 유혹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이었다.
“넌 나, 여자로 안 보여…?”
일부러 그리 물었다. 여자로 봐 달라고 조르듯이.
아이작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눈동자가 떨리고 체온이 올라갔다. 긴장감을 느끼는지 고개의 작은 움직임이 뻣뻣해졌다.
루체는 그 모든 변화를 포착했다. 이 남자조차 욕정에 거스르지 못 하는 수컷이라는 방증이었다.
밀어붙인다.
루체는 일부러 속옷을 착용하지 않은 가슴을 아이작의 흉부에 맞붙였고, 금방이라도 입맞춤할 것처럼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따뜻한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데웠다.
남은 손으로 아이작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 그의 이마를 드러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두 사람은 타닥대는 모닥불 소리조차 잊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 마음대로 해도 돼.”
입술을 달싹이는 루체.
달콤하고도 고혹적인 속삭임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줘.”
못을 박듯 루체는 내밀한 음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철컥. 돌연 루체가 구속구를 풀자 구속구를 이루던 마력이 사그라졌다.
구속구는 어디까지나 아이작의 모든 신경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만들기 위해 설치했던 것. 이제 구속구는 효용을 다했다.
남은 건 아이작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뿐.
애틋하면서도 야릇한 눈빛이 서로의 시야를 적셨다. 연신 묘한 숨결이 루체의 입술 사이를 타고 고요히 흘러 아이작의 입술을 스르르 간질였다.
스스로 목을 내민 먹잇감처럼 제 육신을 허락한 루체를 어떻게 할지는, 이제 아이작의 자유였다.
이윽고, 아이작은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루체, 나도 너 좋아하는 거 눈치채고 있었지?”
눈치채고 있었다.
“…무슨 대답을 원해?”
“아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그러니까 이러는 거겠지.”
아이작은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루체의 눈을 피했다.
“미안한데, 일단 난 쓰레기야.”
“쓰레기.”
“아직 이유 안 말했다.”
아이작은 도끼눈을 떴다.
“여자 여러 명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알고 있네…. 어쨌든, 널 좋아하는 건 맞는데 너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알고 있어, 성욕 덩어리야.”
루체는 조금 슬퍼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내가 연애를 안 하는 건 왜겠냐. 악신 이길 때까지 이성 문제 꼬이기 싫어서지. 정신이 딴 데로 새지 않았으면 하거든.”
고시 생활로 얻은 정신적 산물이었으나, 루체가 아이작의 전생을 알 리 없었다.
“그러니까, 참겠다?”
“응. 적어도 지금은 너한테 손 못 대겠다.”
“…….”
루체는 눈을 감고 고심하더니 무언가를 깨닫고서 다시 눈을 뜨고 아이작을 살폈다.
“혹시 고자…?”
“아니야, 멍청아.”
아이작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멍청아라니, 왜 그런 심한 말을 해?”
“바보야.”
“한결 낫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다시 루체의 차례가 되었다.
루체는 고개를 돌려 모닥불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은 나랑 야한 짓 할 생각이 없다라….”
문득 회의감이 루체를 덮쳤다.
“뭔가 우리 사이…, 좀 꼬여 있네.”
“…….”
“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응.”
모닥불에 생기를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루체는 죽은 눈으로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앨리스는 예외야?”
“어?”
“너희, 몰래 동거하고 동침한 적 있잖아. 그 선배랑은 왜 그랬는데?”
살벌하게 추궁하는 루체.
잠시 제 귀를 의심한 아이작은 이내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어떻게 안 거지?
일단 그 의문은 제쳐두고. 그런 일로 추궁받는 건 아이작에게 억울한 일이었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잔 적은 있어도 잠만 잤기 때문이었다.
잠만 잤다는 것이 웃기는 말이긴 했으나, 어쨌든 아이작은 쓰레기의 범주 내에서 떳떳했다.
그는 먼저 떠오른 의문부터 입 밖으로 꺼냈다.
“그건 어떻게 알았냐…?”
“…….”
루체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대답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 시기에 도로시랑도 같이 잔 적 있는데 앨리스만 말했다는 건….’
그 뜻은.
‘…또 내 방에 몰래 들어온 적 있구나.’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리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루체는 이미 아이작의 방에 드나든 전적이 있다. 첫 방문 때는 실수했지만, 그 실수의 원인 정도는 면밀히 파악했을 터.
그녀가 아이작의 방에 몰래 침입한 뒤 이곳저곳 냄새를 맡았거나 머리카락 따위의 단서를 채취했다면, 아이작과 앨리스가 동거하며 한 침대에서 잠들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루체라면 방에서 나갈 때도 완벽하게 침입 흔적을 지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앨리스 토벌전」 이후, 앨리스는 아카데미에 복귀하기 전까지 아이작 방에서 숨어 지냈으니 그간 도로시의 흔적은 지워졌으리라.
그렇기에 루체는 아이작이 앨리스하고만 잤다고 파악한 것이었다.
“하….”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걔라고 뭐 예외였겠냐?”
“별 짓 다 했을 텐데. 앨리스가 널 가만 놔뒀을 리 없어.”
“진짜로 별일 없었어. 이상한 오해 좀 하지 마.”
루체는 아이작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고 그의 대답이 진실임을 파악했다.
“…그래?”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잠만 잤다니 내심 안심이 되었으나, 앨리스가 아이작과 동거하는 동안 여우 짓을 안 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뭔가 좀… 그렇네.”
결국, 루체의 기분은 다시 가라앉았다. 야릇했던 공기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맥빠져.”
루체는 유혹하길 포기하고 아이작 옆에 풀썩 드러누웠다.
깍지 낀 손은 그대로였다.
“뭔가 기분이 침울해지려다 그냥 짜증나졌어.”
“더 나은 거지?”
“짜증이 위험도 한 단계 아래야.”
“다행이네. 그럼 내가 어쩌면 되겠냐?”
“너 아직 나한테 결산할 거 남았잖아. 그걸로 내 기분 풀어줘.”
“그게 뭔데?”
“반년 전에, 나랑 단둘이 있으면 보답해준다고 했던 거.”
아이작은 잊고 지냈던 과거를 떠올랐다.
‘아, 맞다. 「앨리스 토벌전」 끝나고.’
앨리스 사건 때 루체가 고생해준 만큼, 단둘이 있을 때 보답해주겠다고 아이작은 직접 이야기했었다.
그 시기에 1회차 도로시가 남겼던 노트를 성녀 비앙카로부터 전해 받아서, 정신이 완전히 그쪽으로 쏠렸던 까닭에 보답해야 한다는 걸 그만 잊고 지냈다.
루체는 천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잊고 있었구나. 미워.”
“미안하다. 뭐 해줬으면 좋겠냐?”
“음…, 서로 주둥이 부딪힐까?”
“키스를 그렇게 감성 없게 표현하기도 어렵겠다.”
아이작이 보기에 루체는 로맨틱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이작은 루체처럼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시 찾아온 침묵 속에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키스 대신이라고 하긴 좀 뭐한데…. 너한테 말해야 할 게 있어.”
“응? 말해야 할 거?”
“언제 말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루체는 아이작 쪽으로 눈을 돌렸다.
“뭔데?”
“나 사실 천앙의 대마녀 만났었어.”
“…뭐?”
루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정확하게는 2번.”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천앙의 대마녀. 과자집 마녀의 이명.
루체에겐 역린이나 다름없는 이름이었다.
루체의 두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이작과 깍지 낀 그녀의 손은 미미하게 떨렸다.
“농담이지…? 아니, 그런 거면 나 조금, 가만히 못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거로 농담하겠냐.”
아이작은 루체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지막이 투덜거리고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나대로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까 얼떨결에 만났어. 처음엔 갈리아와 싸웠을 때 잠깐. 그다음엔 명계에서 만났고.”
“…그래서?”
“너한테 안부 전해 달라더라, 그레텔.”
그 이름을 듣고 루체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아이작은 더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루체의 반응을 기다렸다. 과자집 마녀의 최후까진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응어리진 트라우마가 루체의 속내를 사정 없이 두들겼다.
아이작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서 눈을 크게 떴다.
“루체?”
루체의 눈가에 모닥불의 은은한 빛이 반짝이듯 내비쳤다.
눈물이었다.
“정말이야…?”
속삭이는 음성이 공기 중에 떨렸다. 울먹임이 담긴 목소리였다.
아이작은 루체와 깍지 낀 손을 풀고 그녀를 껴안았다.
그대로 루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의 슬픔을 몰아내려고 발악했다.
“응, 정말로. 더 빨리 전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무슨 기분으로 살았는지 알고…. 그런 말 하면 나보고 어떻게 견디라고….”
한동안 루체는 아이작의 품 안에서 소리 없이 흐느꼈다.
그리 루체는 울다 지쳐 잠들었고, 그 뒤에야 아이작은 그녀를 껴안은 채로 꿈속에 빠졌다.
“…….”
깊은 새벽에 루체는 눈을 떴다. 소리를 애써 참으며 울었던 탓인지 목구멍이 따가웠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력이 쇠해 버린 까닭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품에 안은 채 곤히 잠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진짜 미워….”
루체는 허탈한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리고는 아이작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었다.
쪽, 하는 앙증맞은 소리. 그리고 잠깐의 질척거림이 이어졌다.
이튿날, 햇빛이 만연한 때 아이작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루체는 이미 방을 떠나고 없었다.
아이작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가 잠들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손을 대보니 이미 온기는 사라진 뒤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