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견학 (1)
* * *
제르베르 황국 어딘가에 위치한 베텔 아카데미. 훈련장.
2학년생 기사학부 학생들은 교관의 지시에 따라 번갈아 가며 약식 대련을 진행했다.
약식 대련은 테스트의 일환으로, 보통 순식간에 끝이 난다.
상대의 허점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찌르는가, 그리고 내 허점을 파고드는 상대의 공격을 어떻게 피하고 막아 내어 반격하는가, 짧은 순간에 벌어지는 치열한 수 싸움에서 얼마나 합리적인 판단을 했는가, 자기 전술을 얼마나 실현 가능케 했는가가 중점적인 평가 요소였다.
잿빛 단발머리를 뒤로 묶은 남학생, 노아 바르탕은 목검을 쥐고 모래바닥을 박찼다. 목표는 상대 여학생.
노아는 재빠르게 목검을 휘둘렀지만, 상대 여학생의 재빠른 발재간과 등 뒤를 노린 반격에 당해 퍽 고꾸라졌다.
“으헉!”
바닥에 자빠지는 노아.
여학생은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마리안 승!”
교관의 선언.
노아를 이긴 여학생, 마리안은 “수고했어.”라고 한 마디 툭 던지곤 학생들 틈으로 들어갔다.
노아는 몸을 일으키고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반쯤 뜬 동태 같은 눈이 교관을 향했다.
교관은 피드백을 작성하고 있었다.
“들어가라, 노아.”
“예에….”
노아는 대충 대답하고 학생들 틈으로 들어가려 했다.
“넌 어째 영 성장을 못 하는구나.”
“…….”
교관이 한숨과 함께 작게 덧붙인 말이 들렸으나, 노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노아는 샤워 시설에서 몸을 씻고 탈의실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베텔 아카데미의 식당가로 향했다.
“…….”
아카데미 식당은 학생들이 모여 떠들썩했다. 저런 곳에서 식사하는 건 영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노아는 간편식을 산 뒤, 사람이 없는 건물 뒤편에서 홀로 식사했다.
친구 따윈 없어도 상관없었다. 노아는 딱히 외롭지 않았다.
청춘 에너지로 가득한 이 배움의 터전에도 자신처럼 칙칙한 잿빛 인생을 보내는 이도 있는 법이었다.
이 그늘진 건물 뒤편처럼 서늘하고 고요하며 어두침침한 곳이 자기에게 잘 어울렸다.
노아는 식사를 마친 후, 썩은 동태 같은 눈으로 높이 솟아 있는 시계탑을 쳐다보았다.
“…내일이었나? 모레였나?”
황국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아의 친동생은 메르헨 아카데미의 견학자로 선정되었다. 때가 되면 그곳으로 견학 갈 것이었다.
헬리제 교단의 교회에서 하층민 생활을 전전하던 노아 남매다.
그들 중 노아는 명문 아카데미 중 하나인 베텔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고.
여동생은 노아 자신과는 다르게 빼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헬리제 교단 소속이자 교회에 소속된 하층민이라면 베텔 아카데미에서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남은 학비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야 했지만.
노아는 이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한계를 체감했다. 명문 아카데미답게 학생들의 수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이 상상되지 않았다.
반면에 동생은 앞길이 창창한 천재다. 최고의 아카데미인 메르헨 아카데미 견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재능도 출중하니까. 노아는 자신 같은 결점이 동생과 함께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청춘을, 창창한 미래를 맞이해야만 했다.
“……!”
식사하던 중, 노아의 손가락을 타고 회색 마력이 흘러나왔다. 마치 고체 같기도, 액체 같기도 한 묽은 마력이었다.
깜짝 놀란 노아는 다급히 손가락을 가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 자꾸, 뭐냐….”
철의 마력.
요정 라크닐로부터 강제로 물려받은 힘으로, 노아는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힘을 사용하면 자제하지 못했고, 한때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으니까.
기사학부는 마력에 신경 쓰지 않는다. 덕분에 속성 조사도, 마력량 측정도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여태 철의 힘을 숨길 수 있었다.
어째선지 요즘 철 마력이 시도 때도 없이 박동하곤 했다. 요정 라크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자기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노아로선 알 수 없었다.
……
메르헨 아카데미 교문 앞에 마차 한 대가 이르렀다.
“와아!”
꾸민다고 꾸몄지만, 평범한 인상착의의 소녀였다. 그녀는 짐을 양손으로 끙끙 들고 다니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감탄했다.
학기 중에 위병소를 통과할 수 있는 건 물자 운반책이나 섬 주민 정도다. 이런 시기에 평범하게 메르헨 아카데미에 들어올 수 있는 아이라면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었다.
견학 프로그램.
소녀는 그 대상자 다섯 중 한 명. 타린 바르탕이었다.
“끙차….”
타린 바르탕은 호화로운 교문을 지나 메르헨 아카데미를 살폈다.
황국 최고의 아카데미가 가진 풍경은 타린이 꿈에 그리던 화려함을 한참이나 넘어서 있었다.
“와아! 우와아!”
타린은 양팔을 양옆으로 뻗더니 팔을 휘적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자기도 모르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타린. 온갖 구조물이나 자연경관, 예술작품에 버금가는 건물들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반복하길 어느덧 30분째.
“…여긴 어디지?”
길을 잃었다.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편지 봉투는 처음에 메르헨 아카데미의 인장이 찍힌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지만, 타린이 이미 뜯어 놨기에 간단히 열렸다.
편지 봉투 안에서 편지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이런저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충, 바르토스관 행정실에 오라는 내용이었다.
다만, 와야 할 날짜가 오늘이 아닌 이틀 뒤라는 게 문제였다. 타린은 메르헨 아카데미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몰라 여유롭게 출발한 나머지,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렸다.
아카데미가 워낙 넓기 때문에, 이렇게 관광만 하다간 바르토스관에서 한참이나 멀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바르토스관으로 가자.
“바르토스관…. 아, 저기요!”
타린은 지나다니는 사람 아무한테나 길을 물어보기로 결정했고, 마침 교복 차림의 청은발 남학생이 지나갔기에 말을 걸었다.
남학생은 멈춰 서서 타린을 쳐다보았다. 타린은 짐을 들고 영차, 하면서 그에게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바르토스관에 어떻게….”
타린은 흡,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안경을 쓴 그 남학생은 외모가 준수하다못해 출중하기까지 했다. 미모라고 일컬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순한 눈매에 담긴 칙칙한 적색 눈동자를 마주 본 타린은 눈을 비비적거리고서 그 남자를 잘못 본 건지 재차 확인했다.
“…….”
“……?”
아니다. 제대로 봤다. 무지막지하게 잘생긴 남자였다.
‘이런 명문 아카데미는 언니오빠들 외모부터 차원이 다른 건가?!’
귀족들은 대부분 외모 관리에 충실하다는 얘길 언제인가 들어 본 적이 있다.
이곳은 황국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인 만큼 귀족의 비율이 높을 터. 아마 눈앞의 남자도 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타린은 청은발 남학생이 자신과 같은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견학 프로그램?”
“그걸 어떻게…?!”
남학생이 툭 내던진 말에 타린은 깜짝 놀랐다.
“이 시기에 너 같은 나이에 사복 차림이면 뻔하지.”
“아…! 저기, 저, 저…! 타린 바르탕이에요!”
“아이작이야. 바르토스관에 가고 싶은 거지? 따라와.”
청은발의 남학생, 아이작은 선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 사춘기가 한창인 타린에겐 치명적인 미소였다.
타린은 헤벌쭉 웃었다.
“녜에….”
“녜에?”
자기도 모르게 혀가 꼬여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타린은 아이작을 따라 아카데미를 가로질렀다.
‘이 녀석도 왔네.’
얼굴을 붉힌 채 나란히 걷는 타린을 바라보며, 아이작은 생각했다. 자기한테 연애 감정을 느낀 것 같지만, 한창 사춘기가 심할 때니 이해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타린 바르탕. 그 소녀는 철 속성인 노아 바르탕의 동생이며, 하층민 중에서도 좋은 재능을 타고났다.
[ 타린 바르탕 ]
Lv : 90
종족 : 인간
속성 : 물, 바람
위험도 : X
그렇다지만 아이작에게 도움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견학 프로그램으로 올 아이들 중 아이작의 여정에 필요한 전력은 무녀 미야뿐.
아이작은 간단히 선의만 베풀고 타린을 떠나보내기로 했다.
“짐은 나한테 줘.”
“네? 그럴 수 없어요!”
“무거워 보이잖아.”
“아니, 진짜 괜찮은데…!”
가방을 가져가려던 아이작을 만류하던 때, 타린은 순간 그의 팔을 힘껏 만지고 말았다.
‘단단해?’
굉장히 단단했다. 근육이 많다는 느낌이 아니다. 쇳덩이라도 만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옷 안에 무언가를 겹쳐 입은 게 분명했다.
타린은 집중해서 아이작을 살폈다. 그가 교복 안에 입은 무언가는 마도구의 일종 같았다.
마력으로 무게감을 크게 늘린 내복인가. 자기가 그 옷을 입었다면 그 자리에서 더는 움직이지 못했으리라.
‘기사학부인가?’
필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제약을 받을 터. 그러나 아이작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타린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아,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멍 때리고 생각에 잠겼던 타린에게서 가방을 가져가 대신 들어 주었다. 가방이 무겁긴 무거웠기에 타린은 고마워했다.
“소집일은 이틀 뒤였을 텐데.”
“아, 하하…. 여유롭게 오다 보니 그만 일찍 와 버렸어요. 어서 오빠처럼 아카데미 생활을 해 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고요.”
“오빠?”
“되게 멍청하게 생긴 유기체가 있어요. 베텔 아카데미 소속이라 모르실 거예요. 그, 저희 오빠는 기사학부인데, 혹시 아이작 씨…는 무슨 학부세요?”
“그냥 선배라고 불러. 견학 프로그램으로 뽑힐 정도면 여기 올 능력이 충분하단 거니까.”
“아, 네. 선배님…!”
“난 마법학부야.”
타린은 말없이 놀랐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이 마법학부?
그럼 그가 계속 손에 쥐고 있던 저건 마력기였나?
“그랬구나…. 저기, 저도 그거 한번 써봐도 돼요? 마력기 맞죠?”
“써봤어?”
“네, 옛날에 잠깐.”
교회에서 싸구려 마력기만 몇 개 사용해봤을 뿐. 아이작이 쥔 것처럼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 만져본 적도 없었다.
아이작은 “여기.”하고 타린에게 마력기를 건넸다. 타린은 “감사합니다!”하고 그것을 쥐고 마력을 순환시켰다.
“……!!”
마력이 기어들어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교회에서 사용해봤던 마력기와는 난도가 비교조차 안 됐다. 마치 높은 산이 눈앞을 가로막은 듯한 기분. 그 산을 뚫는다는 감각으로 마력을 순환시켜야만 할 터였다.
‘이 아카데미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거야?’
타린은 나름 천재라 추앙 받아왔다. 자신이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어렵네요….”
“그러냐.”
의기소침해진 채로 아이작에게 마력기를 돌려주는 타린.
아이작은 돌려받은 마력기를 쥐고 수월하게 마력을 순환시켰다. 타린은 그 모습이 경악스러웠다.
점점 아이작을 향한 존경심이 짙어졌다. 이 남자는 외모와 능력, 어느 쪽이든 우수했다.
의욕이 타올랐다. 타린은 아이작 같은 학생들이 많을 터인 메르헨 아카데미에 점점 입학하고 싶어졌다.
“혹시, 아이작 선배님은 유명한 분들 다 아세요?”
“유명한 분들?”
“네. 별의 마녀 도로시 하트노바 선배라든지, 뇌해 여제 루체 엘타니아 선배라든지, 화록청의 마법사 카야 아스트레앙 선배라든지…! 헬리제 교단의 비앙카 앙투라제 성녀님이라든가, 세계 최고의 미모를 지닌 데다 자애롭고 지혜로우며 이지적이라고도 유명한 스노우화이트 황녀님이라든가…!”
타린이 메르헨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계기였다. 지금의 메르헨 아카데미는 전설의 한순간을 누비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으니.
마법사에 뜻을 품은 소년 소녀에게 있어서 그만큼 피가 끓는 사실은 또 없을 것이었다.
“자애롭고, 뭐…?”
여러 호칭은 넘어간다 쳐도, 아이작은 ‘흐아앙’하고 울어대는 화이트가 떠올라 그녀의 소개문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굉장한 건 단연 빙제님이고요. 그분 지금 여기 계시잖아요! 완전 엄청나다니까요, 이 아카데미!”
타린은 콧김을 훅훅 뿜으며 흥분했다.
“뭐, 당연히 다 알긴 하는데.”
“정말요?!”
“너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도로시 선배는 내년 되면 졸업하겠지만.”
“와아! 와아…, 아….”
타린은 감탄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돌연 기운이 확 빠져 버렸다.
“왜 그래?”
“아이작 선배님을 보니까, 뭐랄까, 자신감을 잃은 기분이에요. 밖에선 저도 나름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왔거든요. 근데 저도 그분들처럼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이작은 안경을 한 차례 들치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괜한 오지랖일지도 모르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타린에게 전하기로 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는데.”
“네?”
“열심히 하면, 뭐든 되긴 하더라.”
아이작은 타린에게 상냥하게 미소를 건넸다.
타린에겐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마침 그들은 궁전 형태의 건물, 바르토스관에 이르렀다.
“저기가 바르토스관.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행정실이 어딘지 물어보면 알아서 답해 줄 거야. 조심히 가라.”
“앗,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간단히 손을 흔들고 인사한 후, 그 자리를 떠나갔다.
타린은 그의 뒷모습을 향해 상체를 휙휙 숙인 뒤 바르토스관을 쳐다보았다.
“예쁘다…!”
바르토스관은 심미감이 넘쳐흐르는 곳이었다. 타린은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으리으리한 홀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여럿 보였다. 타린은 가만히 멈춰 서서 한동안 감탄하더니 접수대로 향했다. 말끔한 복장의 직원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행정실이 어딨을까요?”
“견학생이시죠?”
“네.”
“예정보다 훨씬 일찍 오셨네요. 행정실은 이곳에 있습니다. 저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직원은 안내도를 보여 주며 설명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아, 혹시!”
타린은 눈을 반짝였다.
“여기에 그분들 계시나요? 별의 마녀 선배라든가, 화록청의 마법사 선배라든가, 빙제님이라든가…! 그런 유명하신 분들이요!”
“여긴 학사 행정을 전담하는 곳이라서요. 그분들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한 분은 이미 보시지 않았나요?”
“네?”
직원은 바르토스관 벽면에 마련된 기다란 창문 여러 개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통해 아이작과 타린이 함께 온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빙제님과 함께 계셨을 텐데요?”
“……?”
침묵이 내려앉았다.
타린의 두 눈은 점차 커져갔다. 휘둥그레지다 못해 찢어질 기세였다.
“으으으응…?!”
이윽고, 타린의 앙 다문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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