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체스 (2)
* * *
“그건 왜 갑자기?”
“그냥 궁금해져서.”
그냥 궁금해진 것 치곤 내 이상형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다.
상관없나.
“내 이상형….”
사춘기 이후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A 클래스 강의실까지 가는 길에 고민해 보기로 했다. 잠시 후, 고민을 마쳤다.
“당연히 예뻤으면 좋겠고. 아마…, 잘 챙겨주는 여자 같은데.”
“잘 챙겨주는?”
“누가 날 잘 챙겨주면 기분이 좋아. 네가 나 생각해서 도시락 가져왔을 때처럼.”
“응….”
루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를 비죽거렸다. 은은한 미소가 어여뻤다.
“그리고 저돌적인 여자. 예측불능의.”
“애 같네. 그런 여자는 금방 질릴걸.”
“어?”
도로시를 생각하며 말하자 루체는 극적으로 표정을 굳히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넌 이상형 뭔데?”
“…없어, 난.”
“재미없네.”
“그러게.”
다른 사람 같았으면 구라 치지 말라고 했겠지만, 대인기피증을 앓아온 루체이니 납득이 갔다.
단조로운 대화를 마치고 A 클래스 강의실에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나는 중간 자리에 앉았다.
“……?”
어째선지 루체는 내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왜 거기 앉아?”
“오늘은 여기 앉고 싶어서.”
원래 이상한 애긴 하지만 그녀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벌일 땐 숨겨진 의미가 있다.
아무래도 내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고자 뒷자리에 온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 뒤통수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크릉…, 흠?”
아침부터 누구나 기절하는 베개를 껴안고 잠자던 시엘이 벌떡 고개를 일으켰다. 마치 나와 루체가 자리에 앉는 걸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쪽을 쳐다보는 시엘. 녀석의 졸린 눈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루체가 내 뒷자리에 앉은 이 상황에 오만가지 상상이 다 들었는지 흥미진진해하는 눈치였다.
카야는 루체 쪽을 일별하곤 수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루체가 내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수업에 집중할 셈인 듯했다.
“아이작.”
“왜…, 에억!”
돌연 루체는 내 어깨를 잡더니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책상에 뒤통수가 맞닿자 날 내려다보는 루체가 보였다.
루체는 내 입에 무언가를 넣었다. 혀끝에 달콤한 맛이 감돌았다.
“…뭐야?”
“초콜릿 주려고.”
“그건 알겠는데…. 너무 박력 있게 주는 거 아니냐?”
루체가 입에 넣은 초콜릿을 우물우물 씹었다.
뭐랄까, 전생의 인터넷에 나돌던 웃기는 짤에서 이런 상황을 본 것 같았다. 아기가 새 뒤통수를 잡고 확 잡아당겨서 강제로 먹이를 먹이는 거였다.
스르르 흘러내리는 로즈골드색 머리카락이 내 뺨을 간질였다. 루체는 우아하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녀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저돌적이었어?”
“…….”
고혹적인 목소리로 그런다.
얘 또 왜 이러냐….
“자, 잠깐!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카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끈했다. 그러게. 얘 지금 뭐 하는 걸까.
루체는 카야를 힐끗 보곤 다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이런 식으로 날 바라보는 게 행복하다는 듯이.
“무시하지 마세요!”
카야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도록 소리쳤지만 루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또 난리냐…. 지겨운 년들.”
맨 뒷자리.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불량하게 앉아있던 리제타가 질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성 교수가 들어섰다.
“교수 데이지, 강림.”
카야는 교수의 등장에 헛숨을 들이마시더니, 잠시간 루체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나도 루체에게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왜 저분이 오셨지?
“오자마자 못 볼 꼴을 다 보는군.”
데이지 교수는 카야와 나, 루체를 싸늘하게 번갈아 보더니 한탄하며 교탁에 이르렀다.
“다들 내가 왜 왔는지 의아해하는 눈치군. 설명하지.”
데이지 교수는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필립 멜트런 교수님은 개인 사정이 생겨서 당분간 못 볼 거다.”
“그럼 데이지 교수님께서 대신 강의하시는…?”
카야의 물음에 데이지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좋은데?’
저 사람 수업을 재밌게 잘 가르친다. B 클래스를 떠날 때 가장 아쉬웠던 게 데이지 교수의 수업을 더는 못 듣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필립 교수가 못 가르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근데 게임에서도 이랬던가? 데이지 교수가 임시로 A 클래스 맡는 건 금시초문인데.’
알 수 없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이안은 2학년 2학기 파트까지 B 클래스였으니까.
“참고로 나 혼자선 그 교수님의 모든 수업을 커버할 순 없다. 몇몇 수업은 다른 교수나 시간강사로 대체될 거다. 그리고….”
데이지 교수는 나를 째릿 노려보았다.
“내 눈앞에서 연애 행위 비슷한 거라도 하는 순간 자비 없이 벌점을 내리겠다. 조금 전의 만행은 처음이니 봐주겠지만, 다음부턴 주의하도록.”
참고로 데이지 교수는 노처녀였다.
……
쉬는 시간,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중 졸음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까딱거리고 눈이 깜박거렸다.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려는 때였다. 낭창낭창한 손이 내 이마에 맞닿았다.
“……?”
어느새 내 옆에 루체가 암살자처럼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내 뒤통수를 슬쩍 밀더니 책상에 자기 손을 베개 삼게 해주었다.
…이건 또 뭔데?
“손 베개 해줄게.”
팔 베개면 몰라도 손 베개는 처음 베봤다.
“자장, 자장….”
루체는 내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곱상한 음색으로 속삭였다.
“…뭐 하냐?”
“아이작 졸려 보여서.”
“보통 팔 베개 아니야?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루체의 손 베개가 불만이야?”
슬쩍 눈을 돌렸다. 주변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곁눈질하는 게 느껴졌다. 잠 확 깨네.
‘챙겨주는 건가.’
아까 초콜릿을 줄 때도 그렇고.
내 이상형을 자기 멋대로 재해석한 것 같았다.
뒤통수에 맞댄 루체의 손을 밀어낸 후 고개를 들었다. 루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책상에 놓인 손 베개를 거두었다.
“고맙다. 잠 깨는 데 효과 탁월하네.”
“…….”
루체는 내 말이 얄미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볼을 부풀렸다. 자기 배려가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귀여워서 그 볼을 꾹 누르자 복어처럼 루체의 입에서 푸우우, 하고 바람이 새나갔다.
점심시간. 루체는 아카데미 식당 말고 벤치에서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음습하게 날 훔쳐보는 이브 누나가 보였다. 루체가 있어서 섣불리 다가오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이따 시간 나면 찾아가야겠다.
“먹여줄게. 입 벌려.”
“…….”
루체는 굳이 내게 음식을 먹여주겠다고 했다.
그냥 먹겠다고 하자 루체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길래 결국 녀석이 내민 음식을 먹어주었다.
남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친 뒤였다.
“잘 쌌어?”
남자 화장실 입구, 벽면에 서 있는 루체가 날 반겼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루체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뒤이어 남자 화장실을 나서던 몇몇 남학생들은 루체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떠나갔다.
“화장실에 좀 오래 있더라. 건강에 안 좋아. 이거 챙겨 먹으면 나아질 거야. …아이작?”
“…….”
할 말을 잃었다.
마냥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딱 봐도 내 이상형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으니까.
“그, 고맙다….”
루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A 클래스 강의실, 마지막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루체는 여전히 내 뒷자리에서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마는 루체는 친구나 연인 등,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를 잘 몰랐다. 인간관계를 기피해온 까닭이었다.
‘예전엔 연인처럼 행동해대서 곤란했는데.’
이젠 자기 마음을 확신하더니 곤란할 정도로 날 아껴준다. 그렇다 보니 루체의 미숙함이 여실히 와 닿았다.
‘챙겨주는 걸 좋아해도 이 정도는 아니지….’
뭐든 과하면 부담이 된다.
학창 시절에 루체 같은 애가 이랬으면 바로 고백을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부담감만 커질 뿐이었다.
“아이작, 어디 불편해?”
“아니, 왜?”
“그래 보여서.”
이런 건 또 귀신같이 알아챈다.
어느덧 수업 시간 직전. 강의실 문이 열리고 두 성인이 들어왔다.
“……?”
한 명은 데이지 교수였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로브를 말끔히 차려입은 갈색 머리 성인 남성. 트러블 하나 없는 하얀 피부.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입이 길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귀까지 닿을 것 같았다.
“…….”
그를 본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인사하지. 이쪽은 시간강사로 초빙된 ‘론자이너스 홀란드’ 강사님이다. 유능한 분이시지. 한동안 필립 멜트런 교수님의 법진분석학 수업을 대신 가르치게 될 거다. 잘생겼다고 딴 맘 먹으면 내가 가만 안 둘 거다.”
데이지 교수는 엄숙하게 갈색 머리 남자, 론자이너스 홀란드 강사를 소개했다.
론 강사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더니 A 클래스 학생들, 그리고 나까지 눈으로 훑었다.
이후, 옆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A 클래스 학생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반갑다, 황국 최고의 우등생들아.”
양팔을 가볍게 들고 호기롭게 인사하는 론 강사.
“날 만난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법진분석학의 어려운 이론도 너희들의 머리에 콕콕 쑤셔 박아줄 테니. 내 수업을 경청한다면 최고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언하지.”
A 클래스 학생들은 론 강사를 쏘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자고 있던 시엘도 고개를 슬쩍 들어 그리했다.
이곳 A 클래스에 소속된 학생들은 죄다 좋은 재능을 타고난 녀석들이다.
마법 이론과 노하우에 빠삭한 아카데미 교수들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려고 수업을 듣는 거지, 전투에 있어선 저마다 강한 무력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교수들은 이들 앞에서 그 누구도 자만하지 않는다.
그러니 론 강사의 자만심에 불쑥 위화감이 들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빙제….”
발을 멈추는 론 강사.
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입장상 편하게 불러도 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론 강사는 계단을 올라 내게 다가왔다.
“왜 이런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한동안 잘 부탁한다?”
“…….”
내게 손을 내미는 론 강사.
나는 가만히 론 강사의 눈을 바라보았고.
“예…, 잘 부탁드립니다.”
선하게 미소짓고서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천의 날개 뷔엘]
Lv :0
종족 : 천족
속성 : 빛,불사
위험도 : ?
심리 : [ ■■■ ]
우리는 그리 평범하게 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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