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 아카데미 대항전 (1)
* * *
햇볕이 밝게 내리쬐는 낮.
올드렉에는 넓은 반경의 벽으로 가려진 분리된 구역이 있었다. 아카데미 대항전을 위해 건설된 곳으로, 여러 구조물이 가득했다.
바로 아카데미 대항전의 무대였다.
무대를 감싼 벽 위로 즐비한 관중석들. 많은 관객이 관중석을 차지하고 무대를 살피고 있었다. 각 아카데미에서 온 관중들은 아카데미별로 나뉜 구간에 몰아서 앉은 채였다.
위쪽에 따로 설치된 건물에는 황국의 거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중 가장 상석에 앉은 자는 카를로스 황제였다.
“이 자리를 빌어 귀빈 여러분들께 환영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대 위, 하늘.
공중에 잔잔히 떠 있는 화려한 부유 기구에 한 남자가 탑승해 있었다. 아카데미 대항전의 진행자였다.
그의 쾌활한 목소리가 확성기의 힘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는 벽 위에 전개된 시야 확대 마법 덕분에 진행자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오늘 아카데미 대항전! 제르베르 황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다섯 곳의 명문 아카데미가 바로 이곳에서 자웅을 겨룰 것입니다! 그럼, 룰을 설명해 드리죠!”
진행자 옆에 아카데미 대항전의 무대가 마력으로 간단한 지도처럼 형상을 갖추었다.
무대의 끝엔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건물이 총 다섯 곳 있었다.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그 건물들은 참가 아카데미 다섯 곳의 거점으로 취급되는 곳이었다.
“보시다시피 전장의 각 끝에는 각 아카데미별 거점이 위치해 있습니다! 거점마다 ‘휘심석’이라는 큰 보석이 하나씩 맡겨져 있죠.”
아카데미의 거점 다섯 곳에 빛나는 표시가 나타났다.
“총 네 개의 휘심석이 부서지면 아카데미 대항전은 종료! 자기 팀의 휘심석을 사수한 아카데미 한 곳만이 우승을 차지합니다! 즉, 휘심석은 각 아카데미의 심장인 셈이죠!”
즉, 목표는.
자기 아카데미의 휘심석을 지키면서 상대 아카데미의 휘심석을 부수는 것.
“단, 휘심석에 보호 마법을 걸거나 조작을 가하는 행위 따위는 탈락 사유입니다. 편법 방지를 위해서이니 모두 유념해주시길!”
진행자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각 아카데미의 참가자 중 한 명은 ‘파수꾼’으로서 반드시 휘심석과 붙어 다녀야만 합니다. 이동할 때든, 잠을 잘 때든, 무슨 경우에든, 반드시!”
휘심석을 지키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는 ‘파수꾼’.
“그들은 저희의 재량으로 선정되었으며, 평가 기준은 ‘가장 강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참가자들은 각자 눈에 보이는 위치에 이 펜던트를 붙여 놨을 겁니다.”
진행자는 자기 왼쪽 가슴에 착용된 펜던트를 가리켰다.
“이 대회에선 ‘자격석’이라고 칭합니다. 이 자격석이 부서지거나 떨어지면 해당 참가자는 즉시 탈락입니다! 최상급 치유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이 항시 대기 중! 신속한 치료를 약속 드리며, 참가자 여러분의 멋진 투쟁을 기대하겠습니다!”
진행자는 “아차!”하고 깜박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듯한 연기로 관중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다고 적들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전장엔 여러 함정이 설치되어 있으니 조심해주세요! 물론 함정이 있는 만큼 여러분께 도움이 되는 아이템도 많으니 잘 찾아보시길!”
이어서 진행자는 대항전 무대의 정중앙에 있는 호수를 가리켰다.
그 위론 12개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모든 다리는 중앙에 있는 작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육지 위엔 특이한 구조물이 있었다.
“그리고 특수 승리 조건! 전장의 중앙엔 금고가 있습니다. 그 금고를 열기 위해선 총 세 개의 열쇠가 필요하죠. 전장엔 열쇠를 찾기 위해 준비된 여러 가지 단서가 있으니 보물찾기 기분도 물씬 나겠군요! 금고를 여는 데 성공했을 시, 그 아카데미는 즉시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겁니다!”
관중들이 술렁였다.
특수 승리 조건이란 아이디어는 이제까지의 아카데미 대항전에서 처음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한 시간은 모레 자정까지! 그때까지 결판이 나지 않으면 살아남은 학생들의 수가 더 많은 쪽이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탈락 조건이 충족된 학생은 즉시 탈락이므로, 탈락 직후에 벌인 행위는 모두 무효 처리가 되니 부디 민폐는 끼치지 말아주세요!”
진행자는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우승한 아카데미와 그곳의 참가자들에겐 에펠토 황실에서 호화로운 선물을 하사할 것입니다! 뛰어난 인재들의 치열한 결전, 모두 기대해주십시오!”
진행자의 룰 설명이 끝났다.
한편, 내가 있는 메르헨 아카데미 거점.
“아자! 아자아!!”
“꺄악! 까, 깜짝 놀랐잖아!”
“거물들이 모인 자리라고, 에이미! 기합 넣고 가야 해!”
우리의 주인공 이안 페어리테일이 호기롭게 기합을 넣자 옆에 있던 에이미 할로웨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참 기운 넘치는 놈이다.
이안은 기사단에 입단하는 게 목표다. 즉, 검술 실력으로 관중석에 있는 거물들의 눈에 띄고 싶을 터였다.
나는 창가 앞 벤치에 앉은 채 눈만 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들 이안을 일별하고는 자기 루틴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심호흡하며 긴장감을 푸는 마테오 조르다나.
눈을 감고 명상하며 마력 회로를 가열시키는 트리스탄 험프레이.
검을 휘두르는 아벨 카르네다스와 그를 지켜보는 로앤나 셸턴.
팔굽혀펴기 중인 리제타 라이온하트.
달콤한 간식을 먹는 케리드나 화이트클락.
시종 묵직한 분위기였다.
학생들은 각자 눈에 보이는 부위에 펜던트, 즉 자격석을 붙인 채였다.
우리는 아카데미 대항전의 룰을 사전에 고지 받았기에 진행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개막식도 끝났고, 룰 설명도 끝났고…. 곧 시작하겠네.’
창밖을 내다보았다.
호화로운 설비,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대, 수많은 관중들을 위한 대규모의 시야 확대 마법 등.
얼마나 많은 자금이 고작 하루 이틀 벌어질 아카데미 대항전에 투입된 걸까. 실제로 현장을 목도하니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뭐, 이 정도의 무대를 갖출 만한 자금이 확보되는 건 당연했다. 아카데미 대항전엔 황국의 거물들이 후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재 관중석엔 제르베르 황국에서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즐비했다. 양질의 젊은 인재들을 탐색하는 게 그들의 주된 목적이니까.
“불공정하지?”
굽이치듯 내려오는 청색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남색 베개를 왜소한 품에 끌어안은 채 나다니는 모습. 졸린 표정. 시엘 카르네다스였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뭐가?”
“주최 측이 아카데미별 참가자 심사에 개입해서, 가장 강하다고 판단된 사람을 파수꾼으로 뽑았다잖아.”
내 왼쪽 가슴에 착용된 자격석은 다른 학생들의 것과는 달리 금색을 띠었다. 파수꾼이라는 증표였다.
아카데미 대항전이 시작되면, 나는 메르헨 아카데미 측의 파수꾼으로서 휘심석과 붙어 다녀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게 왜?”
“룰이 왠지 괴상하달까.”
시엘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부유 기구에 탑승해 있는 진행자를 쳐다보았다.
“파수꾼 제약, 특수 승리 규칙…. 이번 룰, 딱 봐도 널 의식하고 짠 것 같은데.”
“그런가?”
예리하네.
시엘 말대로였다. 내가 아는 <메르헨의 마법 기사> 「제11막, 아카데미 대항전」의 룰과 미묘하게 다르니까.
게임에선 휘심석을 지키는 역할인 파수꾼이란 개념도 없었고, 특수 승리 조건도 없었다.
아마 주최 측이 날 의식해서 탄생시킨 룰이겠지.
‘의도가 훤히 보여서 놀랍지도 않다.’
애초에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기도 했어.
“근데 넌 이런 거 귀찮아하지 않았냐? 왜 참가했어?”
“빙제가 우리 편이면 꿀 빨 수 있으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생각은 없어.”
시엘은 하암, 하고 하품했다.
“모쪼록 내가 꿀 빨기 위해 희생해줘.”
“못하는 말이 없냐, 너는….”
이 녀석의 머릿속엔 그냥 낮잠 푹 자면서 우승 상품이나 받아 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키킥…. 이거야 원, 필승법이 바로 보이잖아?”
갑자기 사마귀처럼 생긴 남학생, 잭 슈나이더가 얄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보고 자기 말을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키운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다 같이 휘심석을 지키다가, 나중에 출전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아~? 그럼 우린 안전하게 전력을 보존할 수 있고, 다른 아카데미들은 지들끼리 치고 박으면서 알아서 전력을 약화시킬 거 아니야아? 그때 녀석들을 다 족쳐 버린다면….”
“무식한 놈이군. 네놈의 지능은 지나가는 벌레 수준에 불과한가.”
“뭐?”
명상하고 있던 트리스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잭을 노려보았다.
“주최 측이 그런 보잘것없는 행태도 예상 못 했을 거라 생각하나?”
“무슨…?”
“네놈은 도움되는 ‘아이템’이 많다고 한 말을 벌써 잊었나 보군.”
무슨 아이템이 많다는 건지 아는 사람은 참가자들 중 나뿐이겠지. 내겐 게임 지식이 있으니까.
다만, 누구든지 아이템을 많이 확보할 수록 유리해지리라는 건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전략은 반드시 불리해지도록 설계되어 있을 거다.”
트리스탄의 말대로였다.
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저마다 게임 규칙과 관련된 효과를 가진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아이템 차이가 큰 적 팀을 상대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즉, 잠자코 기다릴 수록 불리해진다는 얘기다.
“재수 없는 놈….”
잭은 나지막이 트리스탄을 욕했으나, 차마 적극적으로 대들지는 못했다.
실력 측면에서 트리스탄은 잭을 한참이나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대뜸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페르난도 프로스트 교수가 중앙에 있는 방에서 튀어나왔다.
“앞으로 10분 뒤에 아카데미 대항전이 시작될 거다. 모두 준비해라.”
공기가 바뀌었다. 학생들에게서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노파심에 한 번 더 말하마.”
베텔 아카데미의 거점.
감독관은 참가자 학생들을 모아 이야기했다.
“이번 아카데미 대항전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단연 메르헨 아카데미의 빙제야. 청은발과 적안을 가진 남학생이지. 그라면 분명 파수꾼 역할을 맡았을 거야.”
감독관은 비장하게 말했다.
“빙제와 싸워서 이길 생각은 하지 마라. 명심해라, 휘심석을 부수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겠나?”
학생들은 일제히 “예!”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처럼 다른 참가 팀들도 전술을 확립하고 의기투합하고 있었다.
모두의 공통적인 의견은 하나였다.
이 게임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은 메르헨 아카데미의 빙제라는 것.
모두 빙제에 대해선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이었다. 소문은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지만, 빙제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했다.
한편, 메르헨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교직원이 모인 관중석 쪽.
스노우화이트는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옆자리에 앉아 있는 호위 기사, 메를린 아스트레앙이 물었다.
“그냥 궁금해져서요. 함정…이란 게 뭘까요?”
진행자가 주의하라고 말한 함정.
“아무래도 아이작 선배도 위험해질 수 있을 만한 거겠죠?”
“그럴 겁니다. 이건 정해진 규칙에 의해 진행되는 게임이고, 주최 측은 게임의 밸런스를 위해 아이작 공을 의식했을 테니까요. 예를 들어 밟으면 탈락되는 발판 같은 게 있으면 아이작 공이라 해도 쪽도 못 쓰겠죠. 하지만 화이트 황녀님, 아이작 공은 분명 잘하실 겁니다. 그 분을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시간 낭비도 없어요.”
“그, 그렇겠죠…? 아이작 선배라면 물론 잘하시겠죠?”
“예. 단지….”
“단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거는 없었지만, 메를린은 아카데미 대항전이 독특한 양상으로 흘러가리라고 추측했다.
“보십시오! 지금 막 시작의 불꽃을 피어 올릴 도화선에 불이 붙었습니다!”
진행자의 외침에 관중들이 전부 똑같은 지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을 따라 내려오는 크고 길쭉한 도화선에, 한 명의 마법사가 화염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불길은 스파크를 튀기며 도화선을 태워갔고, 얼마 안 가 도화선의 끝에 이르렀다.
그곳엔 화려한 성화대가 있었다.
콰앙!
화르륵!
폭음과 함께 성화대에 폭발적인 기세로 화염이 피어올랐다.
“자아! 지금부터 아카데미 대항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대항전의 무대엔 커다랗고 투명한 방음 결계가 생성되었다. 참가자들이 진행자의 중계를 못 듣게 만들기 위해 전개된 마법이었다.
대회 시작 후, 다섯 곳의 거점에서 일제히 여러 명의 학생들이 튀어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선발대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 두 아카데미의 선발대가 마주쳤다.
“오, 벌써 두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마주쳤습니다!”
아카데미 대항전의 무대는 작은 도시나 다름없을 만큼 거대한 면적을 자랑했다.
그러나 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고, 끝내 빠르게 경로가 겹쳐 버리고 만 것이었다.
관중들은 당연히 그들이 전투를 벌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상황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 갔다.
“…역시 그런가.”
메를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탐색전일까요? 전투를 벌이지 않고 그대로 떠나갑니다!”
진행자가 상황을 중계했다.
두 아카데미의 선발대는 처음부터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치더니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메를린, 저 사람들….”
화이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카데미 대항전에서 메르헨 아카데미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빙제라는 무시무시한 전력을 가졌으니까. 다른 아카데미들과는 힘의 차이가 극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승할 수 있는 아카데미는 단 한 곳뿐.
그렇다면 메르헨 아카데미 이외의 아카데미들은 무슨 선택을 하는 편이 득이 될 것인가.
“민물에서 서로 다투던 물고기들은, 갑자기 메기가 출현하면 힘을 합친다고 합니다.”
가장 위험한 공동의 적을 우선 처치하는 것.
“아마… 비슷한 양상이 될 것 같군요.”
메를린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번 아카데미 대항전은 아이작 토벌전의 양상을 띄게 될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