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는 누나-3화 (3/98)

〈 3화 〉 3. 속옷

* * *

엘리베이터는 두 층 위에서 섰다.

문이 열리자 아늑한 느낌의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몇 개의 입원실이 보였다.

그리고 입원실 사이로 좀 더 안쪽에는 데스크를 갖춘 사무공간이 보이는게 간호사실 같아 보였다.

“정우야. 아까.. "

발그레한 표정으로 소희가 뒤 돌아서 정우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아니겠지? 내가 잘못 본 거일거야. 정우가 설마.'

소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 후 말을 이었다.

"아니.. 저기 503호로 들어가서 잠깐 기다릴래? 조심하고 천천히 움직여.”

소희가 말하려 한게 뭔지 궁금했으나, 내심 가책이 느껴지던 정우는 묻지 않고 그냥 소희가 알려준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방은 3인실 병실이었는데, 여느 병원의 병실과 같이 깔끔했는데, 다만 화사하고 따스한 분위기여서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병실 안의 침대 세 자리는 모두 비워져 있었다.

어느 침대 옆에 짐을 둬야 하나 고민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데 곧 소희가 환자복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이 침대에 누워있어. 나는 좀 있다가 올 테니까 천천히 갈아 입어.”

어느새 소희의 표정은 평상시와 같이 밝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소희는 병실 문에서는 보이지 않는 외진 침상으로 정우를 안내했다.

정우가 보기에는 햇빛 잘드는 창가의 자리가 더 좋아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아직 거기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옷장이 열린 채 비어 있는 걸로 보아 빈자리인 듯 했다.

“여기 이 자리는 안 돼 누나?”

“거기는 조금 전에 퇴원한 환자 자리인데, 아직 수납 중 일거야.

그래서 환자를 바로 받을 수가 없어. 그냥 병원에서 배정해준 대로 이 자리에 누워..”

철부지 같은 동생의 응석에 소희가 핀잔과 함께 웃으며 대답했다.

병실을 나가려던 문득 소희는 정우의 깁스와 허리의 통증이 마음에 걸렸다.

옷을 갈아 입는다는게 성인인 정우가 못 할 일은 아니었지만, 다친 상태이니 어렵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 참, 너 깁스했는데 혼자 옷 갈아 입을 수 있겠어? 누나가 도와줄까? “

정우는 민망하기도 했고, 누나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지금 몸이 조금 안 좋긴 하지만, 혼자서 못할 일은 아니었다.

“걱정 마. 이 정도 쯤이야. 금방하지~”

정우의 너스레에 소희는 방긋 웃으며 병실을 나갔다.

“알았어. 급하게 말고, 천천히 갈아입도록 해”

정우는 환복한 후 침대에 올라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환복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팔에 깁스를 했을 뿐더러, 허리에 통증이 오니 움직이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선 하의부터 갈아 입어야겠다 싶어 청바지를 벗으려 했는데, 청바지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 있는 자세에서 한 팔만 써야 하는데다, 허리와 몸의 여러 곳에 비록 경미하지만 다소라도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 게다가 바지에 밀착된 청바지를 벗는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혼자서 갈아 입어야 했던 지라, 어쩔 수 없이 균형을 잡기 위해 침대 옆의 옷장에 등을 기대어 의지한 채로 통증을 참아가며 노력한 끝에 겨우 청바지를 내릴 수 있었다.

간신히 청바지를 벗자, 정우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입원이란 것을 처음 하는 정우는 환자복을 입을 때 속옷을 벗어야 할지 입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 누나는 갈아 입으라고 했는데, 도대체 팬티와 런닝은 어쩌란 말이지? 그냥 누나한테 물어볼 걸 그랬네.'

정우는 지금 소희를 불러서 물어보기에는 늦기도 했고, 번거롭기도 해서 스스로 판단하기로 했다.

방금 한 팔로 청바지를 벗느라 생사(?)의 고초를 겪은 정우는 이제 바지 벗는 동작이 지긋지긋해져 버렸다.

환자복은 청바지보다는 내리기 쉬울 것이었으나, 난이도를 넘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싫어진 것이다.

지금 선택을 잘 해야만 바지를 다시 벗고 입는 수고로움이 줄어들 것이었다.

'맞어. 환자는 병원에서 깨끗해야 하니까, 밖에서 입던 속옷은 다 벗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하겠네. '

결론을 내린 정우는 방금 전과 같이 옷장에 등을 기댄 자세로 왼 손으로 팬티를 잡아 내려서 발목에서 벗기려 했다.

그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종종 걸음으로 들어왔다.

소희였다.

“어머나!”

소희는 링거를 놔줄 생각에 별 생각 없이 급하게 들어와 자연스럽게 정우의 침상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는데, 의도치 않게도 그만 정우의 페니스를 적나라하게 봐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소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악!”

소희가 워낙 빨리 다가오는 바람에, 미처 아랫도리를 가릴 새가 없었던 정우는 크게 놀라 황급히 쭈그리고 앉아 버렸다.

발목까지 내려간 바지와 팬티를 올리는 것 보다 차라리 앉는 게 몸을 숨기기에 더 좋다는 순간적인 본능에 한 행동이었다.

통증이 두려웠으나, 그런 것을 신경쓸 게재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옷을 갈아입지 못 할 정도로 움직이기 힘들던 몸은, 위기 상황이 되자 한계를 극복하며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문제는 그 다음에 오는 통증이었다.

“아악”

급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허리에 순간적인 극심한 통증이 온 정우가 단말마를 내지르더니 그대로 깁스한 오른팔을 침대에 기대며 고통스러워했다.

부상당한 몸을 급하게 움직인 반대급부로 생긴 통증이었다.

별거 아닌 부상이라고 생각한 허리가, 지금 만큼은 엄청나게 아파왔다.

정우가 아파하는 모습에 소희는 한번 더 놀라게 되었다.

방금 전 상황에서는 여자로서 놀란 소희였지만, 이내 간호사 간호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소희는 손에 있던 걸 침상에 내려놓고 정우에게 재빨리 다가와서 미안한 마음에 걱정스레 물었다.

“어머, 정우야 다쳤어? 너 급하게 움직여서 그러잖아.”

“옷 갈아 입고 있는데 누나가 갑자기 들어와서 그렇지. 아 아파.”

“어디 좀 봐. 괜찮아?”

“아 안돼 보지마. 난 괜찮아. 아까 다쳤던 허리가 좀 아프긴 한데 그래도 참을만 해. “

조심스레 정우가 몸을 움직여 보니 큰 이상은 없는 듯 했다.

소희 역시 대강 살펴봤는데, 방금 전의 동작으로 인한 추가적인 부상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마음이 놓이자 의문이 생겼다.

'근데 얘는 팬티를 왜 내리고 있었을까?'

정우가 웅크리고 앉아 있고, 그 옆에서 소희가 내려다 보는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가르며 정우가 입을 열었다.

“누나 미안. 내가 그만 못 볼 껄 보게 했네. ”

소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소 뾰루퉁하게 대답했다.

제 아무리 상냥한 소희라도 지금 상황은 이해되기 힘들었다.

"그러게. 못 볼 껄 봐 버렸다. 근데 팬티는 왜 벗고 있냐?"

정우가 고개를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며 물었다.

"속옷 벗는거 아니야? 갈아 입으라며?"

“당연히 아니지! 그걸 왜 벗어! ”

"속옷없이 깨끗한 환자복으로 입어야지!"

"환자복은 세탁해서 여러 사람이 입는 건데, 다른 사람도 맨 살에 입던 걸 너도 맨 살에 하루종일 입고 있으라고 한다면 넌 좋겠니?"

이제야 정우는 자신이 실수한 걸 깨달았다.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정우는 자책하며 사과했다.

“누나 미안. 내가 잘 못 했어. 착각했나 봐."

정우의 사과를 들으며 소희가 다시 생각해보니 정우가 딱히 큰 잘못을 한 건 없었다.

정우는 그냥 잘못 생각해서 속옷을 다 벗었을 뿐이고, 그런 실수를 하는 와중에 자기가 갑자기 들어와 버린 해프닝일 뿐이었다.

정우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러면서 좋지 않은 허리까지 급하게 움직이느라 정우가 아파하게 되었으니 염려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히려 속옷은 입고 있으라고 말 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실수가 다소 미안해졌다.

평소 다른 환자에게는 해 주던 말이었는데, 하필 오늘 정우에게 빼먹고 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아니야.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내 잘못이지. 내가 얘기를 제대로 못 해 준 탓도 있는 걸.”

그러는 소희의 자책이 정우에겐 부담스럽기도 했다.

자신이 꾸물거리다 보니 이렇게 된 거 같기도 한 데다, 소희가 미안한 감정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고보니 순간적으로 소희 탓을 한 것도 미안해졌다.

둘 사이에 다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미안하지. 나 청바지가 잘 안 벗겨져서 좀 늦어졌어. 몸이 불편하니까 힘드네.”

정우가 겸연쩍어하며 말하자 소희가 그제야 미소지었다.

“거 봐. 어쩐지 염려되더라. 내가 도와준대니깐. 다음에 어디 입원할 일 생기면, 속옷은 벗지않아도 돼.”

정우가 민망해 하지 않도록 소희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정우에게 핀잔을 주고는 볼을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으이구. 팬티나 빨리 입어. 나머진 내가 도와 줄께.”

소희는 뒤 돌아서서 정우가 팬티를 입는 걸 기다린 후, 바지와 상의를 마저 갈아 입는 것을 옆에서 도와줬다.

소희가 가져온 건 링거였다. 소희는 병상에 누운 정우의 왼팔에 링거를 놔줬다.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는 정우의 팔뚝에 바늘을 찌르고 갈무리를 하며 말했다.

“원장님이 처방해 주신 진통제랑 수액이야. 이거 맞고 두어 시간 쉬고 있으면 한결 나아질거야.”

“고마워. 누나.”

정우는 링거를 놔주는 과정에 간간이 터치하는 누나의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원래 의료행위 과정에서의 환자와 간호사 사이의 최소한의 스킨쉽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소희가 평소와는 달리 오늘 유난히 더 예쁘게 느껴지기에 정우에게는 소희의 손길마저 색다르게 느껴진 것이다.

링거를 마저 세팅하고서, 소희는 정우로부터 다친 과정에 대한 무용담을 들었다.

둘 사이에 잠깐 생겼던 서먹함은 잠시 대화하는 중에 어느새 사라지게 되었다.

둘은 금새 친한 누나 동생으로 다시 돌아왔고, 오히려 이제는 서로가 더 가까워진 것처럼도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걔는 예뻤어? 잘 해봐 한번~”

“무슨 소리야.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됐거든요.”

어느새 소희가 갈 시간이 되었다.

집기를 챙기고 옆자리의 빈 침상을 간단히 정리한 소희가 대뜸 방향을 바꿔 정우에게 놀리듯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너 꽤 크더라? ”

소희의 놀리는 듯한 말에 정우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누나. 잊어 빨리. 어디 가서 말하지마. 나 창피해서 뛰어내릴지도 몰라~”

소희는 대답없이 집기를 가슴에 안고 말헸다.

“얌전하게 쉬고 있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호출벨 누르고. 내가 와서 돌봐줄테니까. 만일 내가 바쁘면 다른 간호사 선생님이 오실 거야. ”

“알았어 누나. 고마워. 그리고 방금 그거 보여준 거는 비밀이다?”

정우가 자신의 페니스를 보인걸 민망해하며 다급히 다짐을 요청하자 소희는 다시 놀렸다.

“쿠쿠쿠. 앞으로 하는 거 봐서. 얌전히 잘 있어.”

소희는 혀를 조금 내밀며 "메롱"하더니 병실 문 쪽으로 나갔다.

정우는 소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희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가자 한숨을 내쉬었다.

“창피해 죽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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