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 서툰 물리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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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의 병실에서 나온 소희는 데스크 위에 은색 금속실을 올려 놓고 오분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금속실에시 비롯된 의혹을 바탕으로 한 당황스러움과 배신감을 비롯한 여러가지 감정으로 인해 심정이 복잡했다.
어떻게 하는게 맞을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시 정우의 병실로 돌아가서 정우에게 따져 묻는게 좋을지, 아니면 세나에게 찾아가서 건내주며 세나의 분위기를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병실에서 나오는 정우가 보였다.
소희를 본 정우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인사하면서 소희의 눈치를 살피는 정우의 모습에 소희는 조금 안쓰럽기는 했지만, 아직 마음이 풀어지진 않았다.
소희가 인사를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어느 병실에서 간호사를 호출하는 벨이 울렸다.
소희는 금속 실을 데스크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놓아 두고 호출벨이 울린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소희를 바라보던 정우는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소희가 화난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희를 놔두고 세나와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소희에게 매우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소희가 그걸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제외한 다른 이유 중에서만 소희가 화난 이유를 찾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특히 방금 전 소희가 갑자기 돌변한 건, 소희가 침대에서 금속 실을 발견한 걸 모르는 정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소희의 태도에 정우는 왠지 모를 섭섭함마저도 생겨나려고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고 내려가는 동안 정우는 아침에 소희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함께 올라 오던 때가 생각났다.
‘아침에 본 누나의 뒷모습이 참 예쁘고 매혹적이었는데’
오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아하면서도 매력적이었던 소희의 목덜미를 내려다 보며 속으로 설레이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깨 위에서 슬쩍 가슴살을 내려다 보던 모습까지도 떠올랐다.
그리고 그 후에 일련의 사건들에 이어 이성친구로까지 사이가 발전한 걸 떠 올리자 소희에 대한 섭섭함은 점점 머리에서 지워져 갔다.
‘그래. 내가 좀 더 잘 해 주자.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
정우가 스스로 마음을 잡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물리치료실을 찾아 들어가니 물리치료실은 그 자체가 거대한 방이었다.
그 중심에는 PC가 올려진 데스크가 하나 있었고, 창측과 안측에 커튼이 쳐진 작은 방이 이십여개 있었다.
입원병동의 간호사복과는 다른 색상의 유니폼을 입은 안경 쓴 여성 한 분이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또한 몇 명의 여성이 여기저기서 환자들을 케어하는게 보였다.
커튼 쳐진 작은 방 몇 군데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도 있었다.
그런 것으로 봐서는 환자들도 더러 있는 듯 싶었다.
물리치료는 처음이라 어떻게 할지 둘러보던 정우는 데스크에 앉아있던 안경 쓴 분에게 다가갔다.
그러잖아도 뾰족한 턱이 뿔테 안경을 써서 그런지 한눈에 봐도 도드라져 보였다.
양쪽 끝이 뾰족한 뿔테 안경은 그녀를 더욱 깐깐하고 차갑게 보이게 했다.
가슴에는 ‘실장 배현주’ 라고 이름이 적힌 명찰이 붙어 있었다.
차가운 인상 때문에 왠지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서 정우가 말 붙일 사람은 그녀 뿐이었다.
“저.. 간호사 선생님, 503호 입원환자인데 물리치료 받으라고 해서 왔어요.”
데스크에 있던 현주라는 여자는 정우를 한번 스윽 보더니 살짝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의외의 미소였다.
차가워 보이는 그녀가 살짝 미소짓자 정우는 예상치 못했던 반전 매력이 느껴졌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물리치료사라고 부르면 되요. 503호 입원환자라고 하셨죠? 어디보자..."
현주는 이내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더니 그 뒤로는 정우를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PC에서 자료를 찾더니 주의 깊게 읽었다.
“음. 팔은 오늘은 하지 마시고, 허리 뒷부분에 근육통이 있다고 되어 있네요. 허리에 물리치료 받으시겠어요?”
“네. 그럴께요.”
허리의 통증은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치료 해 두는 게 좋다고 여긴 정우는 받기로 했다.
현주는 며칠은 꾸준히 받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정우에게 12번 방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일렀다.
정우가 둘러보니 커튼 쳐진 방들마다 입구 위에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그 중 12번 방을 찾아 들어가니 방 양쪽에 침대가 하나씩 놓여져 있고 그 사이에 기계가 하나 놓여져 있었는데, 물리치료용 기계인 듯 싶었다.
물리치료가 처음인 정우는 자리에 서 있기도, 침대에 눕기도 애매해서 그냥 한쪽 침대에 걸터 앉았다.
아마도 물리치료사가 들어올 것 같았는데, 방금 전의 현주가 들어온다면 왠지 불편할 것만 같았다.
차가운 인상의 그녀랑 한 공간에 있는 건 부담스러워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별달리 할게 없어서 앉은 채로 기계를 살펴보고 있었다.
잠시 후 커튼이 열리더니 현주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물리치료사 한 명이 들어왔다.
정우가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들어온 사람은 다행히 현주가 아니라, 작고 예쁘장한 앳된 얼굴의 여자분이었다.
아담한 체형과는 대조적으로 가슴이 커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가슴을 향했다.
가슴 위의 명찰을 보니 ‘조은아’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은아. 예쁘다. 눈도 크고 가슴도 크고. ’
치료를 받으러 온 처지에 물리치료사의 외모를 훑어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정우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던 정우는 그러면서도 은아에게 치료 받게 될게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한 것을 후회하게 될 줄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문득 정우는 자신의 시선에 은아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아. 죄송해요. 성함이 궁금해서 본거라.. 다른 뜻은 없었어요. 사과 드려요.”
정우가 정중하게 사과하자 은아의 얼굴이 이내 밝아졌다.
은아는 방긋 웃으면서 가벼운 목례와 함께 대답했다.
“네”
가슴이 큰 은아에게 있어서 상체를 향하는 남자들의 시선은 늘 부담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평소에는 몇 치수 큰 옷을 입고 다니면서 최대한 바스트를 감추었다.
그러나 병원의 유니폼을 입었을 때 만큼은 옷이 몸에 꼈기에 큰 가슴이 감춰지진 않았다.
그래서 병원에서 만큼은 기분 나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일하는 터였다.
사실 방금 전에도 정우의 시선을 느끼고 민망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흘깃 쳐다보고 모른 척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정우는 사과를 해 왔다.
정우로부터 사과를 받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자리에 엎드리고 바지는 허리가 드러날 정도로만 밑으로 내리세요.”
은아는 정우의 발끝을 커튼 방향으로 향하게 해서 왼쪽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정우의 왼팔이 벽에 닿았고, 깁스를 한 정우의 오른팔은 은아 옆에 놓이게 되었다.
“고주파 치료입니다.”
얼굴만큼이나 앳된 목소리였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정우가 엎드린 채로 은아의 나이를 궁금해 하는데, 등의 살갗에 부드럽고 미끈미끈한 게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정우는 그게 은아의 손인 줄 알고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건 은아의 손이 아니라 환자의 신체를 문지르는 도구였다.
정우가 뒤를 돌아보자 은아도 놀라서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정우는 급히 수습하며 답했다.
차마 은아가 맨 손으로 터치하는 걸로 오해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등에 부드러운 게 닿길래 뭔가 해서요.”
은아는 이미 한번 대화하면서 정우에게 호감을 가진 터라 미소 지으면서 그 '도구'를 들어 보였다.
보통 남성 환자들은 그냥 치료만 받다가 가는 편이라 질문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질문해 오는 정우가 반갑기도 했다.
“이건 헤드라는 기구에요. 환부에 전용 크림을 바르고 헤드로 마시지 해드리는 거에요.”
은아가 웃자 정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도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은아의 가슴으로 눈길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볼수록 매혹적이고 탐스러운 가슴이었다.
그러다가 은아의 큰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얼버무리고 사과를 하며 다시 엎드렸다.
“앗. 죄송해요. 이름을 잊어서 다시 보느라고 그만.”
이번에는 너무 말이 안되는 변명이었다.
정우도 알고, 은아 역시 알 수 있었다.
은아는 민망했지만, 변명하는 정우의 모습이 웃기기도 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은아가 헤드로 정우의 등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그 느낌이 좋아진 정우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오늘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사정을 몇 차례나 해서 피곤했는지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오분 정도 지났을까 막 잠이 들 무렵이었다.
은아가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플레이트를 안 깔았네.”
정우가 무슨 일인가 해서 돌아보니 은아가 기계 옆에서 금속판을 하나 꺼내고 있었다.
“환자분, 죄송한대, 배 아래에 이걸 깔고 그 위에 엎드리셔야 해요. 제가 깜박했네요. 처음부터 다시 해 드릴께요.”
정우는 마침 바쁘지도 않았고, 마사지받는 느낌도 좋았던 터라 은아의 실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엎드렸다.
“괜찮아요. 저는 시간 많아요.”
자신의 실수에 개의치 않는 정우의 대답에 은아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플레이트를 깔고, 그 위에 정우가 다시 엎드렸다.
잠깐 지났을까, 헤드를 움직이던 은아가 또 부산스러워졌다.
“어머 어떡해. 환자분 죄송해요. 제가 크림을 너무 많이 발랐나 봐요. 옷에 다 묻었어요.”
정우가 돌아보니 바지 뒷면의 상단이 크림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깁스를 하지 않은 왼손을 내려 더듬어 보니, 하의는 물론이고 상의 아랫자락에도 크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크림이 많이 묻은 부분을 더듬는 바람에 왼손에도 크림이 꽤 많이 묻게 되었다.
“어머 어째.”
은아는 티슈를 뽑아서 정우의 옷자락에 묻은 크림을 닦은 후, 손에 묻어있는 크림을 세심하게 닦아 줬다.
“이 크림이 몸에 해롭거나 한 건 아니라서 묻어도 괜찮으실 거에요. 그래도 죄송해요. 묻혀서.”
은아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정우는 개의치 않았다.
환자복은 병원에 얘기하면 바꿔줄 것 같아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아가 자신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티슈로 닦아주는 느낌이 왠지 좋았다.
은아의 손가락이 자신의 다섯손가락 사이사이를 매만지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은아가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조금 야하게도 느껴졌다.
이 정도 실수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계속 하세요.”
정우는 다시 엎드렸고 마사지하는 느낌에 잠이 들었다.
오분 정도 후에 마침내 고주파치료가 끝났다.
“적외선 치료 해 드릴께요.”
은아는 스탠드 같이 생긴 기계를 끌어오더니 정우의 등을 향하도록 설치했다.
스위치를 누른 은아는 타이머를 세팅한 후 볼 일을 보기 위해 방을 나섰다.
적외선 치료기는 환부에 일정시간 따뜻한 열을 내리쬐어 치료하는 기계였다.
그렇기에 옆에 사람이 있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정우는 은아의 말에 잠깐 잠이 깼지만 등이 열로 인해 따듯해지는 느낌에 노곤해진 나머지 다시 잠들었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까, 정우는 등이 몹시 뜨거웠다.
마치 등에 누군가 불을 지른 듯한 느낌이 들자 잠에서 깼다.
원래 이런 건가 싶어 참아보려 했지만, 왠지 너무 많이 뜨거운 것 같아 은아를 불렀다.
“선생님, 잠시만요”
"네"
곧 커튼이 열리더니 은아가 들어왔다.
은아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또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어머 어떡해! 환자분 괜찮으세요?”
정우의 등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