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8. 핸드백 속에 감춰둔 속옷
* * *
잠시 집 안에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지애가 말을 이었다.
“이혼하고부터 연락 못드렸어요. 그 전에 오랫동안 마음 고생을 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혼하니 너무 괴롭더라구요."
지애는 말을 잇는게 편치 않은지 차를 한모금 마셨다.
지애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혼자 살면서 달래느라 시간을 보냈죠. 쉬기도 하고, 일도 하고, 여행도 하고. 연락 못 드려 죄송해요."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아픈 부분이 종료되었는지 지애가 미소지으며 마무리했다.
"염려 마세요. 지금은 다 괜찮아졌어요.”
아빠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처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그러나 지애는 함빡 웃었다.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더 활짝 웃는 듯하기도 했다.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그동안 마음이 아플 때는 두 분께 연락 못 드리겠더라구요. 지금은 다 나아서 다시 뵈러 온 거에요.”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연락을 피했구나. 이를 어째. 진작 알았더라면 위로라도 했을텐데.”
소원이 대화에 껴들었다.
막내딸이라서 그런지 쳐진 분위기를 밝게 하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이모. 괜찮아! 힘내! 이모 여전히 예쁘고 우아하니 지금부터 화려한 돌싱 고고!”
“아이구, 저거 말버릇 하고는”
엄마가 소원에게 눈치를 주자 지애가 웃었다.
엄마는 고개를 돌리더니 여전히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근데 무슨 문제였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지애가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다지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언니. 다음에 얘기할께.”
아빠가 보기에는 지애가 아직 이유까지 설명할 준비는 안된 듯했다.
속 깊은 처제이니 나중에 적당한 시점에 얘기해줄 듯 했다.
아빠가 지애를 위해 소원을 편들며 화제를 전환했다.
“뭐, 소원이 말도 틀린 거 없지.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럼 오늘은 늦었으니 살아 온 얘기는 나중에 하자구."
아빠가 소원을 보며 찡긋했다.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얼른 동참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마침 내일이 금요일이니 처제가 돌아온 기념으로 와인파티 어때? 와인은 내가 쏠께.”
아빠의 신호를 본 소원이 외쳤다.
사실 신호가 없었더라도 파티라는 말에 좋아했을 거긴 했다.
“와! 짱 좋아!”
엄마가 소원에게 면박을 줬다.
“넌 술도 못 마시면서! 소주 두 잔도 못 먹는 애가.”
“왜 이래? 나 요즘은 늘어서 소주 네 잔은 마셔. 그리고 와인은 맛있단 말야.”
“그게 늘은 거니? 술 마실 때 마다 인사불성이 되어 가지구는. 그만 먹어 이것아.”
엄마가 소원에게 혀를 끌끌차더니, 고개를 돌려 아빠를 일깨웠다.
“근데 당신 주말에 골프 약속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맞다. 내 정신 좀 봐. 나는 골프접대 있어서 토요일 새벽 일찍 나가야 해. 그러니 내일은 한잔만 하고 자는 걸로 하지."
아빠는 지애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빠져 줘야 처제도 마음 놓고 마실거야. 그치?”
지애가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아니에요, 형부. 시간되시면 내일 말구 나중에 형부 되실 때 그 때 와인 마셔요.”
“아냐아냐. 이번에는 월요일에 내려간대며? 나 일요일에도 라운딩있어서 이번주는 어차피 시간이 안돼. 말 나온 김에 일단 내일은 소희까지 셋이서 한잔들 하고, 다음에 처제 오면 그땐 나까지 넷이서 다시 한잔 하자구. 내일은 내가 함께 못 해 미안하니, 어쨌든 와인은 내가 살께.”
대화는 어느새 ‘와인파티'로 주제가 변해 버렸다.
소원은 온갖 맛있는 안주거리를 재잘재잘 얘기하며 늘어 놓았다.
뒤이어서는 어디서 먹는게 좋을지 연이어 재잘거렸다.
엄마는 그런 소원을 수시로 타박을 주고, 아빠는 마지 못해 받아줬다.
결국 아빠가 일찍 자야하니 과하게 나가서 먹을 거 없이, 집에서 먹자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몇 가지 음식을 간단히 요리해서 먹으면 될 거였다.
소희만 동의하면 결론이 나려는 참이었다.
지애는 별 말이 없는 채, 세 가족의 단란한 대화에 마음이 편안해져 웃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화목한 가족의 분위기가 부럽기만 했다.
이혼 전의 삭막했던 자신의 결혼 생활은 물론, 이혼하기 전 혼자 살았던 2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갑자기 도어락에서 소리가 들렸다.
삑삑삑삑
현관문이 열리더니 소희가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엄마가 소희를 반기며 물었다.
“그래. 볼 일은 다 봤니?”
“네. 다 하고 왔어요.”
소원이 소희를 불렀다.
“언니, 이리 와서 과일 좀 먹어”
“응. 나 씻고 옷 좀 갈아입고 올께.”
소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빨리 와. 내일 와인파티 할 건데 그거 얘기하자~."
소원의 호들갑이야 늘상 있는 일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궁금했지만, 손과 몸에 남아있는 정우의 정액을 닦아내는 게 먼저였다.
소희는 지애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할까 했으나, 퇴근 후에도 샤워를 했었는데 지금 들어오자마자 바로 다시 하게 되면 가족들의 의심을 살게 뻔했다.
샤워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손부터 씻었다.
그런 후 하늘색 스커트를 벗고는 셔츠를 조금 올려 하복부부터 허벅지까지 물기를 손에 묻혀 가볍게 닦아냈다.
샤워기로 씻기에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염려됐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정우와의 행위로 인해 남아있던 진득한 흔적이 씻겨 나가는 게 느껴졌다.
물기 묻은 손이 소중한 곳을 닦는 동안, 이 곳을 정우의 입술과 혀와 드나들던 느낌과 페니스가 닿던 느낌이 떠올랐다.
‘그렇게 원하는데, 그 때 받아줄 걸 그랬나?’
문득 소희는 호기심에 은밀한 곳의 갈라진 틈에 손가락을 넣어 속을 만져 보았다.
약간 들뜨려 하기는 했지만, 정우가 해줄 때만큼은 아니었다.
'음란한 생각은 그만.'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꺼내, 마저 씻기 시작했다.
물기 묻은 손이 남은 곳은 닦는 동안 그저 정우와 함께 했던 시간을 돌이키며 기억을 음미했다.
한편으로는 두근거리고 설레었으나, 다시 생각해봐도 마지막 선을 넘지 않은 건 다행이다 싶었다.
소희는 몸을 지키겠다던 스스로의 다짐을 지킨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앞으로도 다른 방법으로 만족시켜주면 될 터였다.
간단히 아래를 씻은 소희가 핸드백에서 팬티를 꺼내 살폈다.
핑크색 팬티는 아직도 여기저기 조금씩 젖은 부분이 있긴 했다.
하지만 대체로는 점액질 액체가 다 말라붙어 있었다.
세면대에서 지금 손세탁을 하기에는 손세탁 후 뒷처리가 곤란했다.
욕실 안에 널어 두는 것도, 가지고 나가서 방이나 베란다에 너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의 시선을 끌게 뻔했다.
베란다의 세탁기로 가져 가서 슬쩍 넣어두는 것도 지금은 곤란했다.
동선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기회를 봐서 자기 전에 세탁기에 넣을 생각으로 팬티를 다시 핸드백에 집어넣고 소희는 욕실을 나섰다.
거실에서는 TV를 보며 도란도란 얘기가 오가고 있을 뿐 아무도 소희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
방으로 들어간 소희는 잠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새로운 팬티를 꺼내 입었다.
이 방은 오늘 지애가 자야 했기에 지금 방을 비워줘야 했다.
이모가 불편하지 않게 간단히 정리를 하는데 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어디쯤이야? 잘 들어갔어?
오늘 하루동안 많이도 봤었지만, 여전히 반가웠다.
오늘부터 특별한 사이가 된 정우라서 그런지 가슴이 설레었다.
“응 나 방금 잘 도착했어.”
뭐 할 꺼야, 이제?
“응 이제 거실에 나가려구. 가족끼리 얘기한다며 나도 빨리 오래.”
알았어. 가서 얘기 잘 나눠.
문득 병실에서 정우가 뭘 할지가 궁금했다.
“넌 지금부터 뭐 할거야?”
피곤해서 잠이나 잘까 하고 있지?
소희도 정우와의 오늘 하루동안 몇 번이나 애정행위를 나눈 탓에 피곤해 있던 터였다.
자기만 피곤한 줄 알았는데 남자인 정우도 피곤하다 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알았어. 잘 자. 내일 아침에 보자.”
응 누나 내일 봐.
전화를 끊으려다 뭔가 번득 생각난 소희가 부랴부랴 말을 이었다.
“참, 너나 나나 가족한테는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아직 비밀이다?”
동네에서 오래 함께 자란 터라, 가족들끼리도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누구 하나 알게 되면, 모두들 알게 될 거였다.
나야 뭐. 누나가 하자는대로 할께. 근데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아?
아직 그래서는 안되었다.
양 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지,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아냐. 나 민망해. 사람들한테는 나중에 봐서 얘기하자.”
알았어. 그러지 뭐.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소희는 통화를 마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방정리며 통화를 하다보니 방에 너무 오래 있던 것 같아 서둘러 방을 나섰다.
정우와 통화하다보니 소희는 어느새 중요한 걸 깜박 잊고 있었다.
책상 위 가장자리에 세워 둔 핸드백에 자신이 벗어 둔 팬티가 남아 있었다.
밤꽃 향기 나는, 정우의 정액이 묻은 핑크색 팬티가.
**********
소희가 거실로 나오자 소원이 반기면서 말했다.
“언니. 내일 집에서 와인파티하자.”
“갑자기 왠 와인파티?”
소희가 반문하자 엄마가 웃으며 정리해줬다.
“이모도 간만에 왔으니 우리끼리 조촐하게 와인 한잔 하자는 거지. 아빠빼고 우리끼리 집에서 간단하게 안주만 만들어 먹자.”
“아빠는 왜?”
“난 토요일에 라운딩있어서 새벽 일찍 나가야 해."
엄마가 소희에게 물었다.
"정우는 괜찮니? 네가 가볼 정도라는거 보니 심한거 같은데, 내일 퇴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응 괜찮아. 특별한 일만 없다면 내일 퇴원할거야. 그리고 정우는 잠깐만 본거구. 일하다가 온 거라니깐."
소희는 괜시리 불안해져서 유독 일하다 왔다는 말을 강조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럼 정우 내일 퇴원하면 걔네 부모 여행가느라 집도 비었을건데 내일 같이 한잔 하자고 해라.”
소희는 생각 못했던 아빠의 제안이 반가웠다.
정우가 함께 하는 술자리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가족들에게는 둘의 사이를 숨겨야 했다.
“아. 네. 물어 볼께요.”
“언니, 이건 내가 물어 볼래.”
소희만 혼자 병문안을 다녀온 거 같아 내심 섭섭했던 소원이 끼어 들었다.
소원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신호가 울리더니 정우가 전화를 받았다.
“오빠? 나 소원이.”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정우도 반갑게 받아 주었다.
오 소원이~. 별일없지?
“얘기 들었어. 다쳤다며? 괜찮아?
아. 누나한테 들었구나? 조금 다치긴 했는데 그런대로 참을만 해.
“다행이다. 내일 퇴원한다며?”
응. 의사선생님 말로는 내일 퇴원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라.
“그럼 내일 퇴원하면 저녁에 우리 집에 올래? 와인파티 할 건데 아빠가 오빠도 괜찮으면 오래.”
잠시 뜸들이던 정우가 수락해 왔다.
그래. 나야 좋지.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줘.
통화를 마친 소원은 정우가 온다며 유난히 좋아했다.
지애가 그런 소원에게 조용히 물었다.
“소원이가 정우를 많이 좋아하나 보네?”
소희가 집을 나서 정우를 보러 간다고 자리를 비운 직후 정우의 근황이 잠시 식탁의 화제가 되었더랬다.
지애도 정우가 코흘리개이던 시절부터 고등학생일 때까지 자주 봐왔기에 친근한 아이였다.
그때부터도 소원은 정우에 대한 호감을 더러 표출했었다.
소원에게 물어본 후 지애는 아무도 모르게 소희를 슬쩍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지만 소원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소희에게서 약간 긴장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민망해진 소원이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부정했다.
“좋아하긴, 아니야. 동네 오빠지 뭐. 그냥 친한 것 뿐이야, 이모.”
지애는 다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소희를 살폈다.
방금 전과 다르게 몸을 뒤로 하며 소파에 몸을 묻고 있는게 왠지 안심해 하는 듯 했다.
소원이 포크로 사과를 집으며 투덜거렸다.
“나 남자친구도 있다니깐 그래.”
지애는 빙긋이 웃었다.
“알았어. 그냥 놀려 본거야.”
지애는 소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희도 그냥 친한 거 뿐이니, 정우랑?”
소희가 애써 부정했다.
“나도 그냥 친한 동생인데? 걔랑 우리랑은 그냥 남매야 왜 그래 이모~.”
지애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난 오랜만이라서 궁금해서 그랬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늦은 저녁 정우에게 문병 간다던 소희의 사랑스러운 옷차림도,
지금 애써 부정하는 듯한 소희의 대답도,
정우에게 과한 관심을 보이는 소원의 행동도,
그에 대해 긴장하는 소희의 모습도.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이 어느새 여자가 되어 있는 걸 새삼 다시 느꼈다.
지애는 찻잔을 들어 커피 한모금을 천천히 음미했다.
자기만 빼고 세상이 다 변해 있었다.
뭔가 모자랐는지 커피가 씁쓸했다.
그게 뭔지는 지애도 알지 못했다.
설탕도, 프림도 아닌 오랜 외로움을 달래줄 그 뭔가가 무엇인지 아직 지애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