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9. 얼룩진 핑크
* * *
소희네 집 거실.
시간은 지나가고 어느새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피곤해하던 아빠는 벌써 주무시러 들어가고 없었다.
“난 그럼 이만 자러 갈께. 언니 잘자. 너희도 잘 자렴.”
지애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더니 발걸음을 방으로 옮기려 했다.
소희가 혹시 몰라 지애에게 물었다.
“이모, 내 잠옷 빌려줄까? 이모 나랑 사이즈 비슷할거 같은데.”
엄마가 소희를 거들었다.
“맞다. 그러고보니 지애랑 소희가 키며 몸매며 비슷하네. 지애 너 혹시 옷 안 가져 왔으면 소희꺼 빌려 입어도 되겠다, 얘”
지애가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 무슨 말이야. 소희가 훨씬 더 날씬하고 예쁘지. 나야 마흔살 된 아줌마인데 뭘.”
어느새 지애 옆으로 다가온 소희가 지애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이모가 어딜 봐서 40살된 아줌마야. 어딜봐도 20대 아가씨 몸인데. 이렇게 예쁜 엉덩이를 가진 아줌마가 어디 있어? 피부도 뽀얗구.”
사실 지애는 옅은 메이크업만 하고 길거리를 걸어도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할 정도로 외모가 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지애 본인이 원래 겸손하기에 애써 미모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지애가 활짝 웃으며 엉덩이를 토닥이는 소희의 손을 잡았다.
“어머 얘 좀 봐. 어딜 만지니?”
소원도 지애의 외모를 칭찬하고 나섰다.
“이모. 엄마 말이 맞아. 사실 아빠가 있어서 말은 못했지만 나도 아까부터 이모랑 언니를 비교해 봤는데, 둘이 몸매가 비슷해. 바스트도 그래 보이구. 뭐 물론 둘 다 나보다야 못하지만.”
엄마가 여지없이 소원을 타박했다.
“아이고 이것아, 철 좀 들어.”
엄마의 말에 지애와 소희가 함께 웃었다.
지애가 잠시 동안의 소란을 정리하며 말했다.
“소희야, 고맙지만 잠옷은 가져왔어. 다른 거 혹시 필요하면 얘기할께.”
그 말을 듣자 소원이 물었다.
“아, 맞어. 그러고보니 이모는 맨날 잠옷으로 몸에 붙는 슬립 섹시한 거 입고 잤었지? 오늘도 가져왔겠네?”
소원의 말에 소희도 공감했는지 관심을 기울였다.
자매가 어릴 적, 지애가 와서 자는 날에는 자매는 지애의 잠옷을 포함한 속옷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었다.
지애는 섹시한 스타일의 속옷들을 선호했고, 그런 스타일이 어린 자매들에게는 화려하게만 보였다.
미모의 이모가 남 모르게 입는 것 같은 예쁜 속옷.
그건 옷에 한창 관심을 가지게 되던 사춘기 소녀들을 들뜨게 할 충분한 소재였다.
지애는 국제선 승무원이었기에 비행 후 해외 현지에서 쇼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해외의 스타일리시한 고급 속옷을 남들보다 먼저 접했었다.
늘 조용하고 기품있는 자세로 어린 자매를 대해주던 지애의 모습과 그런 지애의 속옷 취향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어린 자매의 눈에는 그런 지애가 신기해 보이기만 했다.
소원이 슬립 얘기에 민망해했다.
“그 때도 내가 그랬었니? 기억도 안난다, 얘.”
소원이 지애에게 다가가더니 장난스레 매달리며 졸랐다.
“이모 이따가 입은거 보여줘~.”
지애가 웃었다.
“어머, 얘는 또 왜 이래~. 예쁜거야 한창 젊을 때 얘기지, 지금은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아줌마 스타일의 옷이라서 너희 눈에 차지도 않을 거야.”
소희도 와서는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아냐. 지금도 이쁠거야. 이모 몸매에는 사실 뭘 입어도 어울릴껄? 나도 기대 돼~.”
자매는 그렇게 이모에게 오랜만에 만난 정을 표했다.
좀 더 대화를 나눈 네 사람은 도란도란 인사를 나누고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지애는 소희의 방으로 돌아와 혹시 몰라 방문을 잠궜다.
잠자기 위해 슬립으로 갈아 입으려는 거였다.
지애는 여행용 트렁크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은색 슬립이었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슬립으로 갈아 입자마자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머?”
평소 항상 기품있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던 지애도 지금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문을 잠궜었는데도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들어온 사람은 소희와 소원이었다.
“이모 우리 왔어.”
지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너희구나. 내가 문을 잠궜던 거 같은데 아니었나?”
소희는 웃으면서 방문 손잡이 위에 따로 달린 걸쇠를 가리켰다.
“아니야. 며칠 전에 손잡이가 고장났어. 그래서 여기 걸쇠로 걸어야 잠겨 이모.”
“아, 그랬구나.”
소원이 옆에 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와, 이모 슬립 예쁘다. 어머, 안이 다 비쳐, 이모.”
등이 깊게 파진 슬립이었다.
지애의 우윳빛 피부가 슬립의 어깨 끈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투명한 피부는 가는 실로 엷게 만들어진 슬립 안에서도 은은하게 드러났다.
여자인 소원이 보기에도 매혹적이었다.
지애가 강조하던 아줌마 스타일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지애가 미소지었다.
“잘 때만 입는 거야. 너희 집에 온다고 그나마 무난한 거로 가져왔는데, 너무 야한가?”
슬립은 충분히 엷어 안의 속옷도 비쳤다.
소희가 어릴 적부터도 이모는 자매들 앞에서는 속옷이나 잠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 줬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모가 입던 속옷 스타일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생각에 소희는 한편으로 안심되었다.
방금 전, 소원으로부터 잠깐 따로 들은터라 소희도 지애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비록 이혼한 이모가 외로울지 몰라도,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은 여전해 보여 다행이었다.
속 깊은 소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괜찮아. 이모한테 너무 잘 어울려.”
“너희 마음에 들면 선물로 하나씩 사줄까?”
소원이 좋아라 매달렸다.
“정말? 나야 완전 좋지. 고마워, 이모!”
소희가 펄쩍 달려들어 지애를 뒤에서 안았다.
“어머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지애는 부드러운 타박과 함께 팔을 뒤로 돌려 안았다
자매는 어릴 때부터도 이모에게 자주 안기거나 매달리고는 했었다.
누군가가 안아주는게 오랜만인 지애는 조카의 포옹에 기분이 좋았다.
소원이 앞으로 안은 손을 위로 올리며 지애를 장난스레 더듬었다.
“어머머, 이모 가슴 탄력 좀 봐.”
조카의 재롱에 까르르 웃으며 지애가 소원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간지러워, 얘”
소원은 웃으면서 지애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 했다.
둘이서 옥신각신 하는데 그러다가 그만 소원의 팔꿈치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던 핸드백을 쳐버렸다.
작은 핸드백은 강한 바닥에 떨어져 쓰러지며 열렸다.
안의 내용물이 몇 개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핑크색 팬티도 있었다.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핸드백을 신경쓰고 있던 소희가 급히 다가왔다.
소희가 방에 온 목적은 사실 핸드백 안의 팬티 때문이었다.
소희가 저녁 외출할 때 입고 있던 팬티에는 정우의 정액을 닦아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모두가 늦은 시간 자기 위해 방으로 흩어진 그 후에서야 소희는 이모가 자려는 방에 팬티를 두고 온게 생각난 거였다.
누가 보기 전에 살짝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런 후 손세탁을 하든, 대충 닦아낸 후 빨래감에 묻어두든 하려 했다.
그랬기에 방에 들어온 이후에는 이모와 소원이 모르게 자연스럽게 밖으로 가져가려고 적당한 시기를 노리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만 소원의 호들갑에 그만 핸드백이 떨어져 버리며 팬티도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소희가 다가와 팬티를 집으려는 그 때였다.
가까이 있던 지애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지애의 손이 먼저 그 걸 잡아 들었다.
지애는 나름 내용물들을 챙겨주려 몸을 숙인 거였다.
여러가지 중에서도 핑크색 옷가지 같은게 눈에 두드러지게 띄어 집어 든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손수건이 뭉쳐진 것 같았던 그걸 집어들던 지애는 그게 여자의 팬티인 걸 알 수 있었다.
지애가 무심코 손 안의 팬티를 펼쳐 보는 순간, 소희의 팔이 잽싸게 지애의 손에서 팬티를 낚아채더니 등 뒤로 숨겼다.
“이모, 고마워.”
뒤늦게 온 소원이 핑크색 옷가지가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걸 보고 궁금해했다.
소원도 핑크색의 뭔가가 나온건 봤지만, 자세히 보지 못해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었다.
“뭔데 이모?”
소희가 지애의 입을 막으려는 듯 황급히 대신해서 대답했다.
당황한 나머지 거짓말이 나왔다.
정우를 만날 때 가지고 나간 핸드백 안에, 갈아입은 팬티가 있던 걸 밝힐 수는 없었다.
말하는 품새에 당황하는 끼가 역력했다.
“아무 것도 아냐. 손수건이야.”
지애는 소희를 잠시 바라봤다.
분명히 속옷이었다.
그런데 소희는 손수건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소원은 소희가 당황해하자 더욱 궁금해 했다.
“언니한테 그런 손수건이 있었어? 나도 좀 봐.”
그럴수록 소희는 민망한건지 화가 나는건지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소희는 등 뒤로 숨긴 핑크빛 옷가지를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오늘 샀어. 사자마자 더러워져서 빨아야 해.”
묵묵히 생각만 하던 지애는 소희가 지나치게 민망해하자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지애는 모른 척 소희에게 맞춰줬다.
“응. 손수건 색깔 예쁘다 얘.”
“고마워 ,이모. 나 잠깐 화장실 좀.”
말을 마친 소희는 방을 나가 욕실로 갔다.
지애는 묵묵히 흩어진 물품들을 핸드백에 주워 담아 책상 위에 올렸다.
마침내 소원도 자러 가자, 이제야 홀로 된 지애가 걸쇠를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오래간만에 만난 조카들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오늘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떠올리던 지애의 머리를 문득 스치는게 있었다.
소희가 핑크색 팬티로 인해 유난히 당황하던 모습이었다.
지애는 팬티를 펼쳐보던 순간, 잠깐이지만 연분홍빛 색 바탕에 앞 뒤로 넓게 펼져진 얼룩을 분명히 봤었다.
물론 소희도 숙녀였기에 갑작스레 나온 생리혈이나 또는 냉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리혈이라기에는 색이 달랐고, 냉이라기에는 너무 넓게 묻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손끝에 느껴지던 촉감과 은은히 풍기던 내음도 생생했다.
부드러운 섬유와는 이질적이던 그 느낌.
옅게나마 남아있던 밤꽃 냄새.
지애는 깨달았다.
그건 바로 남자의 말라붙은 정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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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정우의 병실.
정우는 잘자라는 세나의 메시지에 답했다.
누나도
아무 답이 없었다.
정우는 세나가 잠들었나 싶었다.
가만히 있는데 삼십분 정도 후에 세나로부터 답이 왔다.
지금 볼래?
정우는 답하지 않았다.
보지 않겠다고 하려니 외로울 세나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보자고 하려니 여자친구인 소희에게 미안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누워서 고민만 하고 있는데, 서랍장에 놓여져 있던 작은 봉투가 보였다.
소희가 주고 간 머랭쿠키였다.
꺼내 먹으니 무척 달았다.
안 그래도 단 머랭쿠키는 오늘 하루 지친 정우에게 유난히 달고 맛있었다.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소희의 전화이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나의 전화였으면 싶기도 했다.
기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드니 소원이었다.
잠깐했던 긴장이 풀어졌다.
정우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원은 내일 저녁 집에서 와인파티를 할거니 퇴원하면 오라고 했다.
이전이라면 부담없이 가던 소희 집인지라 괜찮았을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희와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깊어진터라 망설여졌다.
자신의 방문을 소희가 어찌 생각할까 잠시 생각하던 정우는 결국 가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둘의 사이를 표시낼 수 없더라도, 소희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수록 좋을 듯 했다.
혹시라도 소희가 오지 말라고 하면 그때 가서 가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정우는 소원에게 가겠다고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다.
명랑한 소원과 통화를 하자 기분이 다시 밝아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눕는데 그 순간 핸드폰이 짧게 울리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소원이가 보낸 메시지인가 싶어 열어 봤다.
그러나 발신자는 세나였다.
보고 싶어. 기다릴께. 엘리베이터 반대쪽 계단. 9층.